역사일반

거란족 : 1차 침입 그리고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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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거란족은 우리 민족과 여러모로 연관이 많은 민족이다.

발해를 멸망시켜 우리 역사의 무대를 한반도로 축소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고려에 3번이나 대규모로 침입해서 서희, 강감찬 등 역사상 위인들을 양산하였다.

 

이들은 4세기경부터 내몽고 일대에 거주했던 북방민족으로서, 선비족의 일파로 보이는데

분파한 이래 중국과 초원의 패자, 그리고 고구려, 발해 사이에 끼여,

상황에 따라 이리 복속하기도 하고, 저리 채이기도 하는 참으로 한심한 신세였다.

이 안습의 민족에 서광이 비추인 것은 10세기 초였다.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거란족을 대통합한 것이다.

이들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초원을 통합하고, 북중국까지 집어삼키는 기염을 토하며, 요를 세워 당대의 패자로 등극하였다.

상당히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실효지배는 아니었고, 피지배민족들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누르지 못하는 등 유목국가의 한계를 노정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거란을 배척하면서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고

송도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하려고 시도하였다.

발해 유민들의 국가인 정안국 또한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목민족의 한계를 극복하고 거란을 전성기로 이끈 영명한 군주 성종이 982년 등극한다.

성종은 986년 고려와 손잡으려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고려에게 송과 친교를 끊고 거란에 화친할 것을 종용하였다.

고려는 거부하였고...

송과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있던 거란은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침입한다.

이것이 거란의 1차침입이며 이때 고려의 왕의 묘호도 성종이었다.

 

993년, 10월 요나라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소손녕은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면서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80만 대군은 소손녕의 허풍이었고 실제로는 10만 이하의 병력이었다고 한다.

손손녕의 뻥에 속았는지 아니면 봉산 전투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했는지는 모르지만 고려 조정은 동요했다.

항전론은 아예 없었고 항복하느냐 아니면 영토를 일부 내어주고 강화를 하느냐 하는 항복론과 할지론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서희도 주전론자는 아니었고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영토를 내어주는 할지론을 홀로 강력히 반대했다고 한다.

서희의 외로운 주장은 메아리가 없었고 서경은 어쨌든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할 때

마침 안융진에서 대도수와 유방이 승리하였다.

안융진 전투 이후 소손녕은 전투를 확대하지 않고 회담을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이러한 상황 전개에 고려 조정은 회담에 응하게 되는데...

고려 측에서는 대표가 서희 하나였다.

다른 신료들은 죽을까봐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 성종도 멀리까지 배웅하며 눈물의 전송을 하였고...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은 널리 알려진 대로 당당하고 자주적인 실리외교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알찬 결과를 얻게 되어 서희를 민족의 위인으로 만들었고,

단 한 차례도 단위부대를 지휘해 본 적 없는 서희를 장군으로 불리게 했다.

서희의 업적은 강동 6주를 얻었다는 것인데....

강동6주는 현재 평안도 일대의 지역으로 당시에는 누구의 땅도 아니었고, 발해의 유민이랄 수 있는 여진족이 거주하는 땅이었다.

고려가 거란과 친교하지 않는 이유로 중간에 끼어있는 여진족 핑계를 대었고, 거란은 마치 자기 땅을 주듯 고려에게 이양한 것이다.

어쨌든 회담의 결과, 평안도 일대를 개척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거란의 철수를 이끌어 내었으니, 회담은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거란 입장에서도 송과의 한판 대결이라는 메인게임을 남겨놓고, 고려에서 병력을 소실하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고,

고려와 발해유민인 여진과 싸움을 붙여 놓았으니 이이제이의 계책이 제대로 먹힌 셈이고,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사대의 예를 맺기로 했으니 본래의 목적도 달성한 셈이었다.

요컨대 양측이 서로 만족하는 보람찬 회담 결과였다.

 

거란이 고려에 영토적 욕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배후의 안정을 위해 침입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당당하고 영리하게 대처한 서희 덕분에 고려는 한 차례의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정도가 그토록 칭송받을 만한 이유가 될까?

당시 다른 관료들이 워낙 찌질해서 그렇지 정상적인 국가의 정상적인 관료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서희의 진정한 업적은 명목상 우리의 영토가 된 강동6주를 실제로 개척한 일이다.

강동 6주는 흥화진(의주),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귀성), 곽주(곽산)를 말하는데

원래 험한 지형인 이 일대에 방어시설까지 갖추어 지게 되자 난공불락의 요새지대가 되었다.

거란은 이후의 침입에서 단 한 번도 이 강동 6주의 요새지대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특히 귀주는 이후 귀주 대첩은 물론 몽골의 공격도 방어해 내는 등, 북방 방어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거란의 1차 침입은, 변변한 전투는 없었으나 서희라는 위대한 인물을 탄생시켰고,

새로운 영토를 얻었으며 이후의 침입에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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