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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제 11 대 동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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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

위나라 관구검과 한판 붙은 것으로 유명한 양반인데...

이 양반 때부터 왕위 계승이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관노부 주통촌에 살던 평민이었는데,

국가의 교체(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떡을 이용해 잡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한다. 

영리한 것이 이쁘기까지 했는지, 산상왕이 방문하여 떡하니 만리장성을 쌓아버렸다.

남편의 바람을 안 우씨는 길길이 뛰었으나,

이 신데렐라는 이미 임신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후궁 소후가 될 수 있었다.

산상왕의 외도는,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공동 왕비이자, 드센 여인 우씨의 불임으로 요원했던,

부자 상속이라는 고대 국가의 중요한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게 하는 쾌거였던 셈이다.

어머니의 일화로 인해 교체로 불렸던 동천왕의 정식 이름은 위궁인데

태어 날 때 태조대왕처럼 바로 눈을 떠서 사물을 바라보았기에 태조대왕의 이름인 궁을 넣었다 한다.

어머니의 출신이 한미한 덕분에 태어나기도 쉽지 않았으나 자랄 때에도 우씨의 등쌀에 사는 게 만만치는 않았다.

우씨의 계속되는 도발을 항상 참고 넘겨야 했으며 항상 순종하는 자세를 보여야 했다고 한다.

이게 성격으로 굳어졌는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평생 화를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다고 하는데,

덕분에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고, 밀우와 유유 같은 충신들을 옆에 둘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에 나쁘기만 한 것은 없는 법이다.

 

동천왕은 227년 19세의 나이로 산상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동천왕 시기는 중국의 삼국 정립기로 삼국 쟁패의 결과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치세 초기에는 오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이후에는 위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요동의 공손연이 위나라에 멸망하고 위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자 관계가 악화되었다.

242년 요동의 서안평을 선제공격하였으나 별 재미를 못 보았는지, 2년 후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초전에는 승리하였으나 적 전술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비류수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환도성을 내주고 말았다.

이듬해 관구검의 재 공세에 동천왕은 열심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현도태수 왕기의 집요한 추적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으나,

만고의 충신 유유가 적 선봉장과 동귀어진하고 밀우가 결사적으로 분전하여, 가까스로 위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기사회생하여 환도성에 돌아왔으나 폐허만이 반겼고 별 수 없이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해에 신라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그럴 정신이 있었는 지는 의심스럽다.

그로부터 2년 후 248년에 졸하였다.

향년 40세.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였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한다.

새 왕이 자살을 금하였으나 장례일이 되어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땔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고  그 땅을 시원이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동천왕에게는 무덤에 얽힌 일화가 또 있는데

두 남자의 여인 왕태후 우씨는 두 번째 남편인 산상왕 옆에 묻혔는데

고국천왕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무당에게 현몽하여 자기 무덤을 가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국천왕의 무덤을 7겹의 소나무로 가렸다고...

 

일화도 많고 다사다난 했던 동천왕이지만 훌륭한 성품으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둘 수 있었고

이를 발판으로 중국의 본격적인 침입에 단호히 맞서 싸우는 고구려의 위용을 처음 선 보였다.

당대의 성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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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허허.. 저 시대 왕은.. 바람 피는게 일종의 업무였을까?ㅋ
음... 이 양반떄 부터 부자상속제도가 정착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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