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 제 23 대 고종 : 최 우 : 몽골의 3차 침입
본문
살리타이가 화살에 꿰뚤려 사망한 후 만주의 정세는 어지러웠다.
그 동안 몽골을 열 받게 하던 풍운아 포선만노가 결국 살해되면서 만주의 동진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듬해 1234년엔 개봉에서 애절하게 버티던 금 애종이 남송과 몽골의 연합 공격에 무너졌다.
나라를 잃어 슬픈 애종이 자살을 선택하면서 강제로 임명했던 황제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피살되어 단 하루 재위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시호도 없어 그냥 말제이다.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에 신비로울 정도로 급성장하여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던 금나라는 인류역사상 최강의 군대라는 몽골군을 맞아 금방 망할 것 같으면서도 20여년을 버티어내는 저력을 보여주었는데,
그 죽지 않는 힘의 원천은 영원한 밥줄 남송이었으므로 몽골은 그동안 이래저래 쌓인 게 많았던 남송을 회유하였고,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 그동안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던 여진족을 만주의 핍박받는 족속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몽골에게 남쪽 침공로를 제공한 남송은 군량도 주고 군대도 주었는데,
남송군을 이끈 맹장 맹공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며 금나라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채주를 함락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마치 예전 복송시절 금을 도와 요를 멸망시킬 때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죽 쒀서 개를 준 쓰라린 역사가 있는 남송은 또 헛짓을 할 수는 없기에, 몽골과 상의 없이 개봉에 20만 대군을 진주시켜, 무슨 일이 있어도 오랜 숙원인 3경 8릉을 수복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된 몽골은 기가 찼을 것이다.
열 받은 몽골은 군대를 집결시켜 개봉의 남송군을 공격하였는데,
제 아무리 대단한 맹공이라할 지라도 농사짓다 끌려온 무지렁이들을 데리고 역대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몽골군과 야전을 할 수는 없었고.
몽골에게 싹쓸이를 당해 폐허가 된지 오래인 개봉은 20만 대군을 먹일 식량이 없었다. 시체를 뜯어먹으며 농성을 할 상황도 아닌 남송군은 결국 지리멸렬 패주하였고.
개봉에 진주하기 전에 몽골과 국경협상을 했더라면 피할 수도 있었던 파국이었을지도 모르나, 역사는 제 관성대로 흘러 남송에게 또 한 번의 바보짓을 강요하였다.
예전 금나라의 역할을 대치한 몽골 또한 지들 논리에 충실히 따라 1235년 쿠릴타이에서 남송정벌을 결의한 후 남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는 길에 감히 몽골군 대장의 모가지에 바람구멍을 낸 고려까지 손보기로 하면서, 한반도에도 지옥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1235년 당올태가 별동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된 몽골의 3차 침입은 총 3회에 걸쳐 4년간 진행되었다.
침입 병력의 규모는 확실치는 않으나, 주공 방향은 남송이었고 이듬해에 바투의 유럽원정이 시행되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대군은 아니었을 것이고. 1차 침입 때와 비슷한 3만 내외가 아니었을까?
얼마가 되었건 전투력만은 최강인 이놈들은 초장에 북계를 유린하고 대동강 이남의 서해도를 박살내면서 경주까지 별동대를 진출시켰다.
남송을 치러간 몽골의 주력군도 파죽지세로 남하여 유비의 도시 성도를 함락하였으며 장강의 관문 양양의 접수를 목전에 두는 등 승전고를 울리느라 바빴다.
이 꼴을 본 최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1236년 돌아갔던 놈들이 다시 내려와서 북계 서해도 뿐만 아니라 동계로도 진출하였고 충청도, 전라도까지 유린하였다.
이때는 어쩐 일로 최우가 정부군을 파견하여 개주에서 몽골군을 기습 , 성공하였는데, 하지만 그걸로 그뿐, 단발적인 공격은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고 몽골군도 별 타격이 없었다.
이에 최 우는 가병들을 총동원하고, 각지의 지방군들과 연계하여 총력 작전을 편 것이 아니라, 강화도에 장경도감을 설치하고 팔만대장경의 제조를 시작하였다. 지 놈은 안전한 강화도에서 잘 처먹고 잘 살 테니 몽골은 부처가 막으라는 이야긴데, 부처를 용병 취급하는 이 마구니 같은 놈에게 석가모니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최 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몽골 놈들은 1237년 또 내려와서 이번엔 경상도 쪽으로 방향을 잡아 황룡사를 몽땅 불태워 버렸다.
정부군이 있어야 야전을 하든, 유기적인 저항을 하든, 전략적인 싸움을 할 텐데, 개주에서 한 번 공격한 걸로 체면 치례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최우는 강도에서 멀거니 황폐해져가는 본토를 바라만 보았다.
저항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 국토를 방치한 채 강도에만 처박혀 불경이나 새기는 적국의 수뇌부, 그리고 더 이상 약탈할 대상조차 없는 고려, 몽골 놈들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난감해 하는 이넘들에게 비소로 고려의 항복사절이 오고, 몽골이 받아들이고, 철수하였다. 1239년이었다.
몽골의 철군 조건은 왕의 입조였는데, 까짓 얼굴마담 쯤 그냥 보내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리되면 몽골에 진짜 항복하는 게 되어 최 우도 실각하게 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나라와 백성보다는 항상 제 몸보신이 우선이었던 최 우는 몽골에 사기를 쳐서 왕족을 볼모로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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