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 제 18 대 의종 (2) : 무신 정변
본문
1170년 가을,
악동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다가 마지막 놀이터를 보현원으로 잡은 의종은 그동안 시짓기 놀이에서 소외되어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끌려만 다니느라 열을 잔뜩 받은 무신들이 신경쓰였는지,
출발하기 직전 갑자기 일종의 무술 경연 대회인 수박희를 열어 무인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인재도 발굴하고자 하였다.
일종의 보상이었으므로 모두가 즐거워 했...는지는 알 수없으나, 오랜만의 무신들만을 위한 잔치라 계급장 떼고 모두 참가하였는지,
대장군 이 소응도 출전하였는데, 이 반백이 넘은 장군 각하는 마음만 청춘이고 몸이 안 따라주어 그랬는지 아니면 대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그리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새카만 후배인 젊은 군졸에게 쫓겨 도망가는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였다.
매우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으므로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웃고 즐겼을 것이나
이 운명의 날, 주연을 맡게 되는 젊은 문신 한 뇌는 내기를 걸었다가 졌는지 아니면 무신들을 위한 잔치가 아니꼬와 주사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아버지뻘인 대장군의 앞을 가로막고, 뺨을 때리며 욕지거리를 하였다.
머리가 허연 대장군은 섬돌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고...
대장군은 품계가 종3품으로 정3품 상장군의 바로 아래 자리이므로 요즘으로 치면 별 서넛단 군단장 쯤 되는 지위이고,
평소에 임금과 허물없이 지내는 문신인 5품관 내시는 실세 청와대 비서관 정도라 할 수 있으므로,
이는 겁대가리 없는 젊은 청와대 비서관 놈이 연세 지긋한 군단장의 따귀를 날린 것과 비슷한 기막힌 상황인데...
이런 아연실색할 만한 장면을 보고도 개념 없는 의종은 한 뇌를 질책하기는 커녕 주변의 문신들과 함께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하였다 한다.
이 꼴을 본 무신들은 당연히 크게 분노하였고, 이 의방, 이 고 등은 칼까지 뽑으려 하였으나,
상장군 정 중부는 일단 자제를 시키고, 한 뇌의 멱살을 잡아 임금 앞에 패대기쳐 버렸다.
정 중부의 당시 나이가 60대 중반이었다고 하는데... 한 뇌가 약골이었던 모양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멍청한 왕도 심각성을 눈치 채었는지, 정 중부를 좋은 말로 달랜 뒤 보현원으로 출발했다고 하는데,
분위기가 이랬으면 나들이고 뭐고 일단 집구석으로 돌아갈 노릇이지, 평소에도 자주 가는 보현원에 뭐 줏어 먹을 게 있다고...
어찌 되었건 이것이 의종의 마지막 패착이었다.
그동안의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 이미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던 정 중부, 이 의방, 이 고 등 무신들은 낮에 있었던 싸대기 사건으로 더욱 확실한 명분을 얻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칼을 뽑아 보현원까지 수행했던 문신들의 목을 따버렸는데,
싸가지 없는 한 뇌는 이 고에 의해 왕 앞에서 목이 잘렸고,
예전에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 무신들을 모욕했던 또 하나의 싸가지이자 당대의 실세였던,
김 부식의 아들 김 돈중은 살육의 현장인 보현원에서는 어찌어찌 탈출하였으나,
반격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대책없이 개경 인근의 산에 동생과 함께 숨어 있다가 하인 놈의 밀고로 발각되어 육신이 분리되었다.
죽은 지 오래 된 김 부식도 무덤에서 끌려나와 부관참시 되었고...
의종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하는데...
칼 든 놈들 대부분이 손수 발탁하여 키운 금군들이고,
그들의 수장 정 중부는 2대에 걸쳐 왕의 총애를 받으며 무관 최고위직인 상장군까지 오른 측근 중의 측근이었으므로,
지금이야 성질나서 저 지랄이지만, 나중에 잘 달래주면 수그러들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뭐가 되었건 그의 무신경이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무신 정변은 무슨 거창한 이념보다는 처우에 대한 불만, 원한 등이 쌓인 금군들에 의해 촉발되었고,
그들보다 더 못한 처지였던 다른 무신들과 일반 병사들의 적극적인 참여에서 추진력을 얻은 일종의 군란이었으므로,
그 주체들도 정권을 잡기 위해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문신들에 대한 증오를 무차별적으로 표출하였는데,
이에 대한 문신들의 대응은 김 돈중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이 없을 정도로 찌질하였다.
이는 정변이 워낙 전격적으로 발생하였고,
다른 부대의 무신들 및 일반 병사들은 물론 김 돈중의 하인처럼 하층민들까지 폭발적으로 호응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명분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살육을 당하는 바람에 속수무책이었다....라고 해석하기엔,
그동안 군림하며 고려를 지배해 왔던 그들의 명성이 너무 무색하고....잘 이해가 되진 않지만 어쨌든,
신화와 같던 문신 체제가 의외로 허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 군란의 주체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과감하게 혁명으로 나아가,
이래저래 거추장스러운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도에 안치시켰으며,
문신들을 옥석을 가리지 않고 말살시켜 버렸다.
우리 역사에서 예를 찾기 쉽지 않은 이러한 지배세력의 완전한 교체는 체제의 변혁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으므로,
임금의 지위는 얼굴마담으로 고착되었고, 칼끝에서 정권이 창출되는 본격적인 중세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덕분에 자신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 문신들의 몰락을 통쾌하게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즐겼던 백성들은,
적나라한 폭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중세의 야만성에 그대로 노출되어 구관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거제에 귀양을 가 있던 의종은,
무신들에게 항거하여 김 보당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경주로 이동하여 재기를 꿈꾸었으나,
이 의민에게 패하여 그대로 연금 되었으며,
제 2의 김 보당의 난을 두려워한 혁명주체들에 의해 얼마 후 처형되는 신세가되었다.
마지막 술잔을 올린 이 의민은 필살기인 등뼈 꺾기를 시전하여, 천민인 자신을 발탁하고 중용하였던 옛 군주의 목숨을 거두었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껄껄껄 웃었다 한다.
고려가 건국된 지 255년째인 1173년의 일이었고, 고려 전기의 마침표가 찍는 날이었다.
향년 47세, 24년 6개월 간의 재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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