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 제 18 대 의종 (1)
본문
왕 현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여 부모에게 걱정을 많이 끼치는 자식이었다 한다.
아들이 하나라면 모를까 다섯이나 되었으므로 엄마는 반항기 많은 맏아들 보다는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둘째에게 마음이 더 갔던 모양이나,
정정불안이라면 신물 나게 겪었던 아빠와 유교적 명분론을 강력히 주장하는 스승의 지원에 힘입어 ,
1146년 왕 되기 딱 좋은 나이인 20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평생 무력감에 치를 떨었던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역대 고려왕의 화두이기도 한 왕실의 권위 확립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노력한 듯한데,
당시 조정은 언제나처럼 문벌 귀족들이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고,
전대에 있었던 묘청의 난으로 왕의 입지가 극도로 축소되어 버린 상황이었으므로,
갓 성년에 도달한 청년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작도 해보기 전에 좌절하기에는 인간 왕 현이 가지고 있는 반항기가 녹녹하지 않았으므로,
시문에 능하고 활 잘 쏘고 승마, 격구 실력도 상당했다는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전공을 살려 무신들과 친하게 어울렸으며,
정 중부, 이 의방, 이 고, 이 의민 등의 인재를 발탁하여 친위군을 강화하는 한편
말 잘 듣는 환관들과 궁 안에 상주하며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일종의 비서관인 내시 등과 친분을 쌓아,
친위세력을 구성하였다.
그의 놀기 좋아하는 성품이 한 몫하였을 것이다.
비록 인재 풀이 협소하여 그 구성 인물들의 질은 그다지 높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나으므로 이정도로 시작하여 겸손하게 정치를 배우고 힘을 길렀더라면,
아버지 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왕노릇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반항기가 많은 천성 탓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반대로 즉위에 어려움을 겪었던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의종은 그렇게 사려 깊은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신분이 낮은 자들과 어울리며 격구에 심취하고 환관들을 우대하는 등
유학자들이 싫어하는 짓을 빠짐없이 하는 제자를 본 정 몽주의 선조 정 습명은
폭풍같은 잔소리를 쏟아내며 고명대신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려 하였고,
간관들 또한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에 충실하여, 왕의 행동에 여러 가지 제동을 걸었는데,
부모 말도 안 듣던 애가 왕까지 되어 남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을 리 없었으므로,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신하들은 시위 및 출근투쟁을 불사하며 왕의 의지를 꺾고자 하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왕의 측근은 기어이 축출하였으며,
반란이라도 발생하면 그 또한 왕의 실책이라고 꾸짖기도 하였다.
좀 과한 면이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틀린 소리도 아니었으므로 좀 반성하고 개선책을 찾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왕은 이게 다 왕권이 약해 신하들이 임금을 업신여겨서 발생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왕도 태업 및 파업으로 신하들에게 맞서는 한편 친위세력을 더욱 강화하여 그들하고만 어울렸다.
하지만 친위세력이라고 해봐야,
왕과 이상을 공유하고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거창한 인물들로 구성된 집단이 아니라,
그저 배짱이 맞고 아첨에 능한 인물들이 주를 이루었으므로,
별 대책없이 그저 놀기만 하였을 것이다.
격구광이었다고 하니 격구 스타플레이어들과 술이나 한잔하며 신세타령이나 하지 않았을까?
어찌 되었건, 비록 방법은 찌질하였지만 줄기차게 신하들과 투쟁을 이어가던 의종은 제법 내공이 쌓였는지,
스승 정 습명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뜻밖의 개가를 올리게 되었는데...
정 습명으로서는 제대로 된 왕을 만들겠다는 인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자에게 애프터 서비스를 좀 과할 정도로 베푼 것이었으나,
이 못된 제자 놈은 정 습명 또한 문벌 귀족의 일원이므로 왕을 무시하여 그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 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의 질책에 넌더리를 내버렸고, 나름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제 복을 걷어차 버렸다.
정 습명은 이렇게 어떨결에 조정에서 밀려난 후 분사하였으나,
왕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야 말겠다는 간관들의 남다른 신념은 여전하여 사사건건 왕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고
그 좋아하는 격구 관람을 중지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왕도 제법 노련해져 간관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몇 년 후 시중자리에 있던 외조부 임 원후마저 사망하면서, 더 이상 조정에 임금을 제어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신하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으므로,
의종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지하고 싶은 짓을 마음껏 하게 되었다.
왕은 우선 모후 공예태후를 절간에 안치시키는 한편 왕위를 놓고 다투었던 동생 대령후를 유배시켜 정치보복을 하였고,
측근들을 대거 등용하여 소망하던 왕권을 강화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을 살피고 제도를 개혁하여, 미래의 먹거리 창출을 위해 힘을 쏟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닮았는지 풍수 도참 점복에 빠져 들었으며, 열심히 절을 지어 외형상으로나마 불교세력을 복원시켜 주었고, 무엇보다 사치와 향락에 탐닉하였다.
문벌 귀족들은 혀를 끌끌 차기는 하였겠으나,
왕이 그저 놀기나 좋아할 뿐, 무슨 대단한 이상을 가지고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개혁 따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왕의 스승이나 외할아버지 처럼 책임감이나 애정 따위가 있었을 리 만무한 그들은 괜히 나서서 욕먹고 가문을 위험에 빠뜨리는 짓을 하기 보다는 그냥 방치하였다.
국가 원로들의 방관 속에 소원하던 왕권을 손에 쥐기는 하였으나
그 왕권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던 철없는 왕은 그저 놀기만 하였고,
역시 아무 생각이 없던 그의 추종자들은 호가호위하며 매관매직과 부정 축재에 열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렇게 한 몇년 지속되자 동북아의 부국 고려는 안으로부터 골병이 들게 되었고
배부르고 등 따습던 백성들의 살림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부역 나간 남편의 배를 채우기 위해 머리칼을 팔아야 했던 여인네의 이야기가 생겨난 것도 이 시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종은 간관들과의 약속대로 격구 관람을 안 하는 대신,
주변에 모인 쓰레기들과 어울려 시를 지으며 놀자판을 이어갔는데,
이렇게 되자 시짓는 재주가 있을 리 없던 왕년의 스타플레이어 출신 무신들은 졸지에 실직 아닌 실직 상태가 되어,
단순 호위병이나 잔치 심부름꾼의 역할을 해야 하는 한심한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이 놈의 잔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열렸을 뿐만 아니라, 경치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놀았기 때문에 이동 거리가 만만치 않아,
호위를 담당하는 무신들은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고 하니...
욕 나왔을 것이다.
당시 내시와 환관들의 권력은 아주 강력하여 왕명이 고자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들은 특별한 능력이나 업적 없이 그저 아첨으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은 저렴한 인격의 소유자들이었으므로 겸손이라는 것을 몰랐고 그 권력의 행사도 치졸하여,
왕의 권력기반의 한 축을 이루는 무신들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짓을 다반사로 하였다 한다.
의종도 문, 무신간의 갈등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던 듯하나,
늘 그렇듯이 별 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무신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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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읽으려고 들어왔더니 쓰는중이라니...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