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 : 제 5 대 경종
본문
왕 주
광종의 맏아들이자 외아들이었다.
광종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꼬투리만 잡히면 처형을 하였는데 단순히 사람 죽이는 재미로 그런 것은 아니고, 연이은 참소에 피아를 구분하기 힘들게 되자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차피 호족이고,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기는 매한가지였으므로 옥석구분 없이 없애버렸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었던 호족들은 왕의 교체를 생각하였을 것이고, 교체한다면 명분이 클수록 좋았을 것이므로 최고의 명분을 가지고 있던 비운의 왕태자들인 혜종의 아들과 정종의 아들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결국 처형되었다.
경종 또한 비슷한 이유로 아버지의 의심을 받게 되었는데, 그 똑똑했던 광종이 어린아이에 불과한 자기 아들이 역심을 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리야 없지만, 마누라인 대목왕후까지 호족들의 편을 들던 당시의 정세가 아들까지도 위험인물로 취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종은 동생인 효화 태자가 요절하여 외아들이 되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으나,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볼 때마다 윽박지르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 곁에서 불안에 떨며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975년, 위대했으나 무시무시했던 아버지 광종이 저승사자와 함께 먼길을 떠나자 스물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 또한 아버지 치세에 고생했던 피해자 중의 하나였으므로 호족들의 분노에 공감하는 바가 많았는지,
호족 출신들을 우대하였고 그들의 요구대로 일종의 보복법을 만들어 무고당한 자들의 한을 풀게 하였으나,
이번에는 반대쪽이 무고를 당하여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아버지의 치세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꼴을 본 경종은 보복법을 취소하였고, 전권을 휘두르던 왕선을 숙청해 버렸다.... 만만찮은 청년이었다.
22살이 된 젊은 왕은 중원 외교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 왕조의 숙명에 따라 송과의 외교에 주력하였으며, 전시과를 최초로 실시하였다.
전시과.
소작료를 받아먹는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를 지급하는 과전이라는 뜻으로 전, 현직 관리에게 관품에 따라 차등 지급한 일종의 봉급이었고 원칙적으로 상속은 금지되어 있었다.
태조의 역분전을 계승한 제도로서 후대에 개정 전시과, 경정 전시과 등으로 변천하며, 무신란으로 폐지될 때까지 고려 토지제도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이렇게 3 ~ 4년 정상적인 왕노릇을 하던 경종은 말년에 정치에 뜻을 잃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병을 얻고 말았는데, 회복될 가망은 없고 아들은 어리고 하여 고민이 많았는지 당시 도덕군자라는 소리를 듣던 사촌 동생에게 왕위를 넘겼고 양위 후 치료에 전념하였는지 아니면 하던 짓을 쭉 계속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달 만에 향년 27세로 사망하였다.
981년, 재위는 6년이었다.
경종은 아버지의 훈육이 부족한 상태로 왕위에 오른데다가, 아버지 치세의 후유증을 치유하느라 대부분의 정력을 소비해야 했는데,
가뜩이나 감정이 좋지 않았을 아버지였기에 그 뒤치닥거리에 일찌감치 실증을 내어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그래도 먹고 사는데 기본이 되는 토지제도를 제대로 손질하여 시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후계자를 선정하여 고려를 안정시킨 보이지 않는 업적도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죽은 아버지에 대한 때 늦은 반항으로 방탕에만 빠져들었던 철모르는 젊은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무서운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받지 못하고 시달리기만 하다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스러져간 경종....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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