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 궁예 : 난세에 피어난 화려한 불꽃 (1)
본문
궁예
왕자로 태어나 숨어살다가, 떠돌이 중이 되었고, 도둑의 부하가 되었으며, 세력을 모아 장군을 자칭하였고. 두목을 꺾고 왕이 되었다.
탁월한 전략을 지닌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으며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냉철한 정치가였다.
따르는 민초들에게는 교주로 숭앙되었고 나라를 교단처럼 운영했던 특이한 인물이었다.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이고 장보고의 외손자로서,
출생 시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 한다.
불길하다 하여 죽임을 당할 뻔했는데, 유모가 데리고 탈출하였고, 그때 유모의 손가락에 찔려 애꾸가 되었다고 하는데,
다 믿기는 어렵고... 그저 어려서 한쪽 눈을 잃은 몰락한 진골 귀족 출신 정도로만 알아도 무방할 것이다.
어렸을 때는 악동이었던 모양으로, 열 여남은 살 쯤에 그 말썽을 견디다 못한 유모가 궁예에게 신세내력을 알려주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궁예는 뜻한 바 있어 세달사로 출가했다고 한다.
...그 어린 것이 말썽을 피웠으면 얼마나 피웠겠고 뜻을 세웠으면 얼마나 큰 뜻을 세웠을까?
그저 평탄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고, 절에 의탁해야 할 정도로 몰락한 것을 미화한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세달사에서도 궁예는 착실한 중은 아니었던 것 같고, 종간과 같이 마음에 맞는 동지들과 세속에 뜻을 두고 심신을 단련했던 것 같다. 활을 잘 쐈나보다.
이렇게 산 속에서 외눈으로 천하를 노려보던 궁예는 진성여왕 시기라는 호기를 맞아 각지의 호걸들이 몸을 일으키자, 미련 없이 절을 나와 세상풍파에 몸을 던졌다.
산을 내려와 처음 찾아간 호걸은 죽주(안성)의 기훤이었는데, 기훤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성질이 지랄맞았는지, 궁예를 푸대접하였고,
궁예는 이 꼴 같지 않은 도둑놈의 휘하를 떠나, 더 큰 도둑놈인 북원(원주)의 양길에게 의탁하였다.
이때 기훤의 부하들 중 일부도 궁예를 따라갔다고 하는 것을 보아 궁예의 리더쉽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양길은 멋도 모르고 궁예를 환영하였고, 호랑이 새끼 궁예에게 군사를 주어 북원 동쪽 땅을 접수하게 하였는데,
이때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으며,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여, 난세에 지친 자들의 의지처가 되어 주었고,
백성들은 그런 그를 미륵의 화신으로 숭앙하였다 한다.
절 생활이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현세에 강림한 미륵이 이끄는 군대는 무적이었고, 양길의 기대를 넘어 명주(강릉)에 다다르게 되었다.
당시 명주는 진골귀족인 김 순식의 영지로서, 영동지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영서까지 영향력이 상당한, 요지중의 요지였다.
이 정도 강력한 성은, 아무리 미륵이 이끈다 해도 전직 도적 내지 거지 출신 군사들에게는 난공불락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고...,
이를 잘아는 궁예는 김 순식과 모종의 협상을 한 듯 보인다.
궁예는 절에 있을 때부터 김순식의 후원을 받던 처지였다는 설도 있다.
어찌되었건 명주를 접수한 궁예는 장군을 자칭하였다.
명주를 기반으로 삼은 궁예는 강원도 전 지역을 석권하였고 철원에 자리를 잡았는데,
궁예가 이렇게 성장하자 예성강 이북지역인 패서의 호족들과 그 대표격인 송악(개성)의 해상 호족 왕륭 · 왕건 부자도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궁예는 왕건의 건의를 받아들여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고, 왕건을 시켜 양주와 청주 등 30여개 성을 정벌하였으며,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궁예가 잘나가게 되자, 주인 격인 양길은 뻘쭘하게 되었고 호랑이 새끼를 키웠음을 자책하게 되었다.
양길은 투자한 대가를 받기는커녕 본거지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견훤과 연계를 맺고 한산주 호족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으나, 이미 다 자란 호랑이는 원주인을 물어뜯어 버렸고,
여세를 몰아 충주, 청주 등 한반도 중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궁예는 견훤이 백제의 후예를 자처한 것처럼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였고,
부석사에서 신라 왕의 초상을 발견하자, 칼로 베어버리며 반 신라 정책을 공식화하였다.
궁예가 이렇게 후삼국의 한 축으로 성장하자, 이미 옛 백제 땅에 기업을 세운 견훤과 충돌은 필연이 되었다.
궁예의 탁월한 군사적 식견은 적 후방 깊숙이에 있는 나주를 주목하였고,
해상 호족 출신인 왕건은 훌륭한 수족이 되어 나주룰 궁예에게 바쳤다.
이는 견훤의 뒤통수를 제대로 날린 것으로 이후 견훤은 앞뒤의 공격에 갈팡질팡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견훤을 곤란하게 만든 궁예는 효공왕 7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쳤으며 공주 지역의 복속을 받았다.
어느덧 한반도 최강자가 된 궁예는 당연한 수순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하여,
우선 국내 최대 호족인 왕건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송악에서 철원으로 재천도하였다.
원래 철원은 교통이 불편하고 생산력이 보잘 것 없어 왕도로는 부적합한 땅이었는데,
궁예는 이를 보강하기 위해 청주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대궐을 크게 짓는 등 투자를 많이 하여 도읍의 위용을 갖추었다.
이후 평양 성주를 비롯한 북쪽 호족들의 항복을 받았고, 견훤을 상주에서 크게 격파하였으며,
나주지역에 대한 진출도 재개하여 진도, 고이도, 덕진포 등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견훤의 수군 장수 능창을 사로잡는 등 나주 전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가 궁예의 최전성기였고 이대로 몇 해만 더 가면 난세를 끝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내외적인 성공이 크게 고무되었는지, 궁예는 궁궐을 증축하였으며 스스로를 미륵불과 동일시 하였다.
국호도 태봉으로 고쳤는데, 태봉은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 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을 타고,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세워 걷게 했으며,
자신의 두 아들을 청광보살 · 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했고, 직접 경전을 지어 설법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불교계를 지배하던 다른 종파들을 자극하였고,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궁예는 자신의 경전을 혹평하는 미륵 종파의 대덕 석총을 철퇴로 패 죽여 버렸다고 한다.
궁예는 왕권 전제화에도 공을 들여, 왕권 강화에 걸림이 되는 호족들을 숙청하거나 좌천하였는데,
왕건도 시중자리에서 쫓겨나 나주로 파견가야 했으며,
패서계 호족출신인 왕비가 호족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고 하자, 쇠꼬챙이로 찔러죽이고 그녀의 소생인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여 버렸다 한다.
궁예는 숙청을 할 때 반란의 증거를 들이 민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 내지는 신통력을 의미하는 관심법으로 알았다고 우겼다 하는데...
관심법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타심통이라 한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 역사 상 종교적 광신을 정치에 이용한 최초이자 유일한 군주일 것이다.
918년 7월 궁예의 살벌한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 지지파인 신숭겸 등이 한밤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고,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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