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온의 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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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 2차 여수전쟁 : 살수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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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전쟁에서 패전한 문제는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후 고구려에 대한 원정 계획 일체를 중단시켰고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고구려를 대했다 한다.

문제는 확실히 명군이었다.

 

그러나 604년 애비를 시해하고 새로운 군주로 등극한 양광은 전혀 다른 인간 이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오만하고 잔인하면서도 패기와 야심이 남달랐던 수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했고, 대운하건설을 재개하여 완성하였다.

또한 친히 원정을 떠나 서방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진출하는 등 그 위세를 떨쳤다.

고구려의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수양제도 지 애비처럼 영양왕에게 입조를 명하였으나 이번에도 고구려는 입조를 거절한 것은 물론 전쟁 준비를 하였다.

607년, 고구려는 사신을 동돌궐에 파견하였는데 하필 그때 수양제가 동돌궐을 방문하여 수양제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최후통첩을 날린다.

 

611년 2월. 양제는 친정을 시작했다.

양제는 탁군에 도착한 후 백성들을 징발하여 몇 개월 만에 수백 척의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군수물품을 모으고 병사를 징집하여 무려 113만이라는 공전절후, 전무후무의 대군을 만들어 내었다.

보급을 위한 인원까지 포함하면 총 동원인원은 300만 정도로서 당시 전체 중국인구의 5%가 훨씬 넘는 숫자였다.

 

천하에 명령이 떨어져 탁군으로 병력이 모였고,

7월에는 군량을 수송했는데 군량을 수송하기 위해 꼬리를 물고 이어진 배가 1천리였다고 한다.

병사들은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밤에도 걸어야 했기 때문에 피로로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고.

군수품을 나르는 인부와 차부가 60만 명이나 징용되었는데

길이 멀고 험해 할당량인 두 사람 당 쌀 석 섬은 자기들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정해진 분량을 나르지 못하면 처벌 받기 때문에 징용된 사람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도망치면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어서 천하에 쫓기는 자가 넘쳐났고 여기저기에서 떼를 지어 비적이 되었다.

미친놈 하나 때문에 온 천하가 몸살을 앓은 것이다

히틀러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612년 음력 1월, 수양제는 공식적으로 총공격을 명했다.

우중문과 우문술로 하여금 육로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내호아에게는 수군 대장의 직책을 맡겼다.

육군이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내지로 잠입할 때 내호아의 수군이 이와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친다는 계획이었다.

수양제가 이끄는 부대가 요수에 이르자 고구려 군은 우선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지켰고

양제는 우문개에게 명하여 부교를 만들게 하였다.

첫번째 시도 때는 부교를 세 개 만들었으나 강의 길이를 잘못 예측하여 부교가 딱 어른 한 명 키 남짓하게 모자랐다고 한다.

도강하던 수나라군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고 고구려는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으나

수나라군이 다시 부교를 만들어 공격하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여 무려 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확실히 쪽수에는 장사가 없다.

 

도하에 성공한 양광은 100만의 군사로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했고 맹렬한 공격을 하였지만

우리의 요동성은 강한 저항을 했고 3개월이 지나도 요지부동이었다.

이 요동성이 양제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수비하며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2차 여수전쟁의 승패가 갈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요동성이 뚤려 100만의 대군이 밀려 들었다면

을지문덕이 제아무리 신묘한 계책을 쓴다 해도 역부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농성하는 도중 상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항복의사를 타진하곤 했는데,

수나라군은 황제의 친정이었기에 중요 결정상황은 황제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 보고와 결정 그리고 전달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한다.

워낙 대군이니 그 단계가 오죽 많았겠는가?

당연히 이 기간 동안은 휴전이 불가피했고, 고구려 군은 그 시간을 정비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반면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 때 감히 멋대로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짓을 세 번 연속으로 했다고 하는데

양제는 대국 황제의 관대함을 보이기 위해 알면서도 속아주었다고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요동성은 함락을 거부하고 있었고, 시간은 가고

답답한 마음에 방어선 상의 다른 성도 건들여 보았지만 단 하나의 성도 함락을 시키지 못하였다.

요동 일대, 고구려 요새들의 격렬한 저항은 수양제의 본래의 작전에 큰 차질을 만들었다.

인구의 5%가 넘는 성인 남자를 끌고 와서 요동성에서 시간만 끌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다급해진 수양제는 평양 직공을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을 대장으로 하는 별동대를 구성하게 한다.

9개 군 35만 병력을 차출해 평양 직공을 명령한 것이다.

각지의 방어선을 우회하고 평양 일대에서 수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공략하여 일격에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는 고구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으며  고구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수양제의 별동대에도 문제가 있었다.

35만이면 별동대라 부르기에 지나치게 많다. 당연히 보급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유사시를 대비한 백일분의 추가 식량을 병사 개개인이 짊어지게 하였는데···

이게 너무 무거웠다.

그렇지 않아도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스트레스가 심한데, 길은 험하고 짐까지 무거우니,

너도 나도 보급품을 버린 것이다.

지휘부의 금지 명령도 소용이 없어서, 길의 절반 정도 온 상태에서 식량이 간당간당해졌다.

지쳐 죽는 게 빠를지, 굶어 죽는 게 빠를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을지문덕은 당연히 청야전술로 불난 집에 부채질 하였고.

거짓 항복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을지문덕의 거짓항복은 수나라 수뇌부의 혼동을 불렀고, 식량도 부족한데 시간을 더 끌게 하였다

을지문덕이 항복 의사를 밝히고 돌아간 후에 전혀 소식을 전해오지 않자

우문중은 속은 것을 눈치 채고 진군을 시작하였다.

배고프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정처 없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고,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 챈 을지문덕은 이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위해 싸울 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났다.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을 모두 지는 일도 있었다.

수나라군은 어쨌든 그동안 목말랐던 승리를 계속하여 맛보았고, 진군을 할 수 있어 어느 정도 사기가 올랐으나

편하게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면서 진군 하는 것이니, 피로도 피로이지만 시간이 말도 못하게 걸렸다.

 

육군이 이렇게 꾸물거리는 동안 먼저 평양 인근에 도착한 수의 수군은 조급해졌다.

수의 수군은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가 지휘하는 병력을 격파하고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초전의 승리에 흥분한 내호아가 육군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4만의 병력으로 평양성 직공에 나섰는데···

고구려군의 공성계에 걸려 전멸해 버렸다.

이때 왕제 고건무는 500기의 결사대로 적진을 휩쓸었다고 한다.

내호아는 겨우 탈출하여 대동강 하구로 후퇴했고 이후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오지 않았다.

쫄쫄 굶고 있는 육군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수군의 이러한 패퇴가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우중문의 별동대는 평양성까지는 어찌어찌 도착했으나 수군은 코빼기도 안비치고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보급은 바닥이 난지 오래고 수군과의 합류는 물 건너 간 진퇴양난의 우중문의 군대에 을지문덕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마지막 거짓 항복 편지였으나 이번엔 달랐다.

철군의 명분을 준 것이다.

우중문은 별수 없이 퇴각하였고 을지문덕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7월, 수나라 군대는 살수에 이르러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갑자기 고구려 군대가 뒤에서 공격해오자 모든 부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렸다.

전투고 뭐고 없는 상태에서 살아남은 수나라 군대는 하루에 450여 리를 달아났으며,

35만에 육박하던 별동대 9군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겨우 2천7백 명이었고

수만을 헤아렸던 군수와 기계는 모두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살수대첩의 참변을 접한 수양제는 크게 노하여 돌아온 우문술, 우중문, 내호아 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들을 모조리 삭탈관직한 후에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죄수 취급을 하며 수나라로 압송하였고

특히, 을지문덕을 그냥 놔주게 만든 주범인 유사룡은 극형에 처했다 하는데...

수나라가 8개월간 그 엄청난 국력 소모와 수십만의 병사를 죽이고 얻은 소득은

요수 서쪽에서 무려라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한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성 하나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병사만 잔뜩 죽이고 퇴각하였으니

책임을 져야할 자는 양광이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물론 최고의 승리였지만 전 국토가 전화에 휩싸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고

국력소모도 막대하였다.

 

그리고 을지씨.... 이게 우리나라 성씨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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