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일반

병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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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인양요의 배경

 1866년 9월 18일, 프랑스 극동함대 로즈 제독이 군함 3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나 강화 해협을 중심으로 인천에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고 서울 양화진까지 올라와 지세를 세밀히 정찰하여 지도 3장을 만들고, 그해 10월 11일 군함 7척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 최인서, 심순녀를 대동하여 조선 원정에 나섰다. 당시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행사했던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 명령을 내려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를 학살하였는데, 이때 화를 면한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이를 알리면서 이에 대한 보복 원정을 촉구하게 되었고, 이에 로즈가 함대에 수로 안내원과 통역관으로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 최인서, 심순녀를 태워 조선을 침략하여 이로써 조선-프랑스 간 군사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전에도 조선-프랑스 간 군사 긴장이 있기는 있었다. 1831년 로마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교구로 설정하여 양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를 파견하여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고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되자 이에 조선 임금 헌종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 사이에 권력 쟁탈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척사 윤음을 내리고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박해를 가하였는데, 이때 프랑스 천주교 신부 3명이 처형 당하였다(기해박해). 이를 계기로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세실 해군 소령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서해안에 나타나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 조정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화답을 받고자 이듬해에 다시 오리라 통고하고 돌아갔다. 이듬해 그들의 말대로 라파에르 해군 대령을 중심으로 군함 2척을 거느리고 다시 왔으나 강풍에 파선되는 바람에 영국 선박의 도움을 얻어 그냥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사실 처음부터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6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이 전해지고, 제정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압박을 가하자 오히려 그는 천주교의 협력을 얻어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던 것이다(또 개인적으로도 천주교는 자신의 부인 여흥 대부인 민씨의 종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베르뇌 주교는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나 홍봉주, 남종상 등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조선-프랑스 동맹 체결을 조정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북경에서 양인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를 반대하던 조정 대신들이 천주교와의 교섭을 비난하고 나아가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의 체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천주교를 외교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을 바꾼 대원군은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병인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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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

 

 2. 병인양요의 경과 및 결과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갑곶에 육전대를 상륙시키고 한강 입구를 봉쇄하여 강화부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을 접한 조선 조정은 순무영을 설치하고 대장에 이경하, 중군에 이용희, 천총(千總)에 제주목사 양헌수를 임명했다. 이때 양헌수는 통진부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꾀하였다. 이후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을 공격하였는데, 그들의 화력에 강화도의 관리, 군인, 백성이 모두 피난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의 손아귀에 강화도는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통진에 입성한 이용희는 로즈 제독에게 격문을 보내어 프랑스의 조선 침략이 부당하다며 항의하였고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로즈제독은 이용희에게 동일자로 화답하면서 조선 조정의 프랑스 선교사 살해를 문책하며 그 주모자를 엄벌하고 전권대사를 보내 조약의 초안 작성을 요구하였다.

 한편, 김포 문수산성을 수비하던 한성근은  그 일대를 정찰하던 군사 70명을 이끌고 때마침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병력 부족으로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에 양헌수는 화력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어융박략(禦戎方略: 매복, 기습, 육박전, 경계강화 등의 전술이 어우러진 일종의 게릴라 전법)'을 구상하여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는 549명의 부대를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야간 도하 작전을 전개하고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탈환하였다. 그는 정족진을 결성하고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이 지휘하는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 이렴이 지휘하는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 이대흥이 지휘하는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하고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한편,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점거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 제독은 올리비에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윽고 프랑스군은 분견대 160명을 이끌고 야포 없이 경무장하고서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동문과 서문으로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조선군은 일제히 포격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에서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접전 벌인 끝에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을 내었다. 0

  프랑스군은 강화도 상륙 이래 1달동안 강화도를 점령하였지만, 정신적, 육체적 피로에 곧 닥쳐올 추위로 염하가 얼어붙어 보급로 차단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지만 결국 철수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들은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약탈해갔으며, 이때 외규장각문서도 가져갔다. 이후 로즈 제독은 조선의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 응징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에 주둔한 외교관들은 고개를 저었다. 프랑스와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협상조차 벌이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 정족산성에서 패전한 직후에 곧바로 함대를 철수했다는 것, 조선 원정의 빌미였던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은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그들과 다르게 이 원정을 성공으로 간주하였는데, 그것은 미국 정부가 이듬해 3월 제너럴셔먼호사건, 프랑스는 병인박해로 인해 조선으로부터 피해를 보았으니 대 조선 미불 공동 원정을 제의하자 당시 프랑스 정부가 이미 로즈 제독의 조선 원정을 통해 응징 보복을 행했으므로 새삼스레 그럴 필요는 없다고 거절한 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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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함대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톨릭사전

위키백과사전

뉴스천지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9-09-25 11:24:01 한국사 연대기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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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ㅎㅎㅎ; 조선사 말머리 개설해 드릴게요^^;
그나저나 에디터의 사진 업로드를 이용하시면, 사진이 더 잘 출력되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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