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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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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몽고 침략기의 매국노

1231년 인주의 신기도령(神騎都領)으로 있으면서 몽고가 침략해 오자 편민(編民) 1,500호(戶)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그 뒤 고려군민만호(高麗軍民萬戶)에 제수되었고, 몽고의 길잡이가 되어 고려를 침공하는 데 앞장섰다.

몽고가 북계(北界)의 40여 성(城)을 함락시킨 뒤에는 몽고군으로 북계를 수비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232년 고려의 강화천도에 대한 보복으로 살리타(撒禮塔)가 침공해 오자 북계를 근거지로 해서 협력하였다.

살리타가 처인성(處仁城 : 지금의 경기도 용인)에서 사살당하고 몽고군이 철수했는데도 그는 몽고의 구원을 기다리며 북계를 수비하였고. 다음 해에는 서경낭장(西京郎將)의 직함으로 필현보(畢賢甫)와 함께 선유사(宣諭使) 정의(鄭毅)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곧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에게 토벌되어 필현보가 죽임을 당하자 몽고로 도망해 랴오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거처하였다. 이 때 몽고로부터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에 임명되었다.
거기서 전쟁중에 몽고에 투항했거나 유망(流亡)해 간 고려인들을 통치하였다. 또한, 이들을 이끌고 몽고의 고려 침략에 합세해 1235년·1245년·1253년·1254년·1258년의 다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하였다.
당시 원나라에는 고려 출신의 유이민과 전쟁포로들이 많았는데,
원과 고려의 관계가 전쟁상태의 적국이 아닌 황제국과 부마국으로 변화함에 따라 원에서는 이들 고려인들을 위해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라는 특수행정단위를 설치하고 그 기관의 장까지 고려인에게 맡김으로써 사실상 자치를 허용해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당시 안무고려군민총관부의 장은 고려 왕족인 왕준에게 맡겼고 홍복원에게 보좌하게 하였는데, 귀부 군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258년에 죽임을 당하였다. 뒤에 아들 다구와 군상이 몽고에서 관인으로 출세함으로써 가의대부 심양후(嘉議大夫瀋陽侯)로 증직(贈職)되었다.
나중에 고려 충선왕이 심양왕에 봉해짐으로써 고려왕은 사실상 고려와 만주 두 지방의 군주로 원 황실의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충선왕이 개혁정치를 시작함으로써 기득권을 잃게 된 홍중희, 홍중경 형제(홍복원의 손자들.)가 반발한다. 이들 홍씨 형제는 충선왕의 개혁정치를 맹렬히 비난하고 또한 고려왕인 충선왕이 심양왕을 겸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고려에 행성을 세우자고 원나라에 요구한다. 고려를 원의 일개 지방으로 만들어 국가로서의 존재를 없애버리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충선왕을 각별히 아꼈던 원의 황제 인종-충선왕과는 사촌지간인데다가 제위에 오를 당시 충선왕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이 더 이상 논의를 금하도록 함으로써 끝을 맺었지만, 그 결과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시작단계에서부터 실패로 돌아갔고 더욱이 왕위를 물려줄 때에는(개혁정치로 인한 반발로 인해 충선왕은 강제로 퇴위당하기까지 하였다.) 고려왕위는 자신의 장자에게, 심양왕위는 조카에게 물려주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이후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의 왕위를 당연히 자신이 물려받아야 하는 것인데 물려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서로의 왕위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게 된다 .

홍복원... 자손들까지 매국에 앞장섰으니... 우리 나라 역사상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매국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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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니다. 관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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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4.02.2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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