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일반

삼국시대 회의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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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라의 화백회의

신라 화백회의는 진골귀족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대등(大等)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의장인 상대등(上大等)은 법흥왕 18년(531)에 처음 설치되었다
 . 화백회의는 상대등의
주관으로 '네 곳의 신령한 땅'이라는 의미의 사령지(四靈地)에서 돌아가면서 개최되었다.
청송산·오지산·피전·금강산이 그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평소 국가의 중대사를
만장일치로 의결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왕위 계승권자가 애매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비상시에는 왕위 계승권자를 선출하기도 하였다.


2.백제의 정사암회의

정사암은 국정을 논하거나 재상을 선출할 때에 이용하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사비(부여) 부근의 호암사(虎巖寺)에 정사암이란 바위가 있어, 이 곳에서 국정을 논하는 회의와
특히 재상을 선정할 때 당선 자격자 3, 4명의 이름을 봉함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펴 보아 이름 위에 인적(印跡)이 있는 자를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렇듯 유독 바위 위에서 회의를 하거나 재상을 선출했다는 점은 당시의 사회가 신의를
중시했다는 일면을 추측할 수 있다
.


3.고구려의 제가회의

고구려의 귀족들이 모여 국사를 논의하던 최고의 귀족회의체이다. 5부체제가 유지되던
고구려 초기에는 왕권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각 부의 책임자인 가(加)들이 모여
제가회의를 구성해서 왕위계승·대외전쟁·외교문제, 그밖의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결정했다.
초기에는 국왕이 제가회의의 의장 역할을 했으나, 점차 국상(國相)이 이를 대신했다

삼국은 귀족연합적인 정치 성격때문에 고유의 회의제도를 갖고 있었는데,

신라는 화백(和白)제도, 백제는 정사암(政事巖), 고구려는 제가회의(諸加會議)를 두고 있었다.

삼국시대 회의제도들은 부족연맹시대 씨족 또는 족장회의가 발전한 형태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국가가 성립된 뒤 국왕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함께 모여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는 회의기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먼저, 신라의 화랑 제도는 왕권의 강화와 군사력 증대를 위한 통치 도구였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하고나서 전쟁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신라는 내부적으로 왕실의 권위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이란 시급한 과제에 직면하였다.

화백제도의 경우, 귀족들의 단결심과 집단체제의 강화를 위해서, 또한 왕권과 귀족간의 권력균형을 위해서 만장일치 제도가 이용되었다.

귀족들의 힘이 왕권보다 강하면 이러한 회의에서의 결정은 왕권을 무력화시켰다. 분점된 권력이냐 집중된 권력이냐에 따라서 회의의 성격이 달랐다.


그러나 백제의 정사암(政事巖), 고구려는 제가회의(諸加會議)는 기록이없어 만장일치제인지는 확인할수 없는데 화백회의 처럼 만장일치제가 아닌가 추측만 할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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