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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제 19 대 광개토대왕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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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멸망 후 한동안 잊혀져 있었으나

근대 이후 우리 민족이 외세에 시달리다 주권까지 잃게 되었을 때 

만주에서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면서 그 업적이 재조명되었다.

비에 새겨진 기록은 삼국사기 등 사서의 기록과 서로 보완하며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자존심에 상처 받은 식민 상태의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대왕의 평가는 서로 상반되어 한 쪽에서는 민족혼의 상징으로 거의 신격화 되어 마치 알렉산더처럼 취급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중국이 분열되어 있던 시기에 만주에서 떵떵거리던 운 좋은 싸움꾼처럼 폄훼되기도 하는데,

어느 입장을 취하던 광개토대왕이 우리 민족 사상 드물게 화려한 전공을을 쌓은 최고의 정복군주인 것만은 부인하기 힘들다.

화려한 외정에 비해 내정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한데,

광개토왕릉비에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22년간 동서남북으로 치달리며 끊임없이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배부르고 등 따순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한 번만 치뤄도 나라가 휘청거리는 경우가 태반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대왕은 약 5만 정도의 전문 전투 집단을 운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주로 전쟁을 전담하였고 또 매번 이겼기 때문에 막대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가만히 앉아서 전쟁특수만 누리면 되었으므로,

재위기간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어도 그 흔한 반란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정국이 안정되었으며, 

백성들의 지지까지 받는 아주 이상적인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뭐가 되었건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대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의 빈사 상태에서 막 벗어난 시기로

선왕 고국양왕의 치세에서 알 수 있듯이 남으로는 백제에 힘으로 밀리고, 서로는 후연의 준동에 전전긍긍하였다.

또한 북으로는 거란이 수시로 침입하여 약탈을 하였으며, 숙신과 동부여가 이탈 움직임을 보이는 등 그야 말로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사방이 뺑 돌아 목을 조여오는 상황에서 18세의 홍안 소년이 선택한 방법이 전쟁이었으니...

이러한 용기를 낸 소년도 대단하지만 따라준 병사들은 더 대단하다 하겠다.

병사들이 처음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보였을 리는 만무하고...

즉위 후 첫 전투에서 뛰어난 용병술로 진사왕의 백제를 박살내었고,

동시에 거란까지 정리해버리는 솜씨를 보고 차츰 따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다는 것이 쌈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므로,

포상, 전리품의 분배 등에서도 충분한 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전쟁이 거듭되면서 이들이 전문 전투 집단화되었고 무패의 군대가 되어간 것이 아닐까?

 

이 무패의 군대를 이끌고 후연과 싸워, 요동을 확보하고 영토로 삼았으면서도

신라와 백제를 남겨놓아 후대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원망스러운 평이 많으나

한반도는 그렇게 만만한 땅이 아니었다.

한반도는 고래로 만주에 비해 기후가 온화하고 농사지을 땅이 많으면서도, 산지가 많아 방어가 용이한 땅이었고 인구 밀도도 높았다.

여기에 각지의 호족들이 만만찮은 무력으로 할거하고 있었으니...

일거에 먹어 버리는 것이 불가능한, 요동보다 영토화 하기 훨씬 힘든 땅이었다.

그래도 신라를 속국화하고 백제를 반속국화함으로 인해 고구려 주도의 동질성이 뿌리 내리게 되었으며,

삼한통일이 한반도인의 명제가 되게 하였으니, 대왕이 한민족형성의 씨를 뿌린 셈이다.

 

광개토대왕, 민족혼의 화신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한국판 알렉산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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