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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제 22 대 지증왕 ( 마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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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지대로, 지도로, 지철로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원 발음은 지절로 정도일 것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세었다 한다.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왕의 동생 복호의 손자로 소지왕과는 6촌간이라 하는데,
437년 64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3년에 순장을 금지하고 우경법을 시행하였으며 신궁에 제사지냈다.
이듬해에 국호를 신라로 통일하였고 마립간 대신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5년에 상복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시행하였고 12개의 성을 쌓았다.
이듬해에 나라 안의 주·군·현을 정하였고, 얼음 저장법, 선박 이용법 등을 정했다.
10년에 시장을 관리하는 관청을 설치하였고
13년에 실직주 군주 이사부를 시켜 울릉도의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재위 15년 만에 졸하니 그때 나이가 78세였다고 한다.

죽기 직전까지 여인을 탐하여 평생 거느린 처첩이 10명에 이르렀다는 소지왕이 아들이 없어 6촌 동생이 뒤를 이었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소지왕기에 잦은 외침 및 신궁 설치 등, 사회불안 요소가 많았다는 점을 결부해서 생각해 보면,
소지왕 말년에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한 정황은 보이지 않고... 
다만 소지왕이 사위인 법흥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과도기적으로 지증왕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는 설이 정설처럼 취급된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고대에는 모계의 전통이 강하고 성문화가 개방적이었으며, 신라 왕실은 그 중에서도 유독 심해 거의 난잡지경이었으므로,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지증왕이 45cm에 달하는 거대 물건에 맞는 여자를 찾아 공개구혼까지 하여 맞아들인 연제부인이,
소지왕의 후궁이기도 했다는 기사는 당시 신라 왕실의 성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상징하는데,
이 정신 없는 상황에 신궁의 왕실 전용 씨받이 여인들까지 가세하면,
신라 왕실의 족보는 거의 미로 찾기에 가까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내 새끼에 대한 확신을 갖는 다는 것은 왕이라도 어려웠을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고, 무슨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건 지증왕은 최초가 많은 왕이었다.
신라에서 왕호를 사용한 최초의 왕으로, 한반도에서 순장을 최초로 금지하였으며, 우경법을 최초로 실시하였고,
우리나라 역대 왕중 가장 큰 성기를 보유한 왕이었다... 음 이건 아닌가? 아무튼 등등.
이와 더불어 각종 법을 만들고 주.군.현제를 정비하여 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양반 대에는 특이하게도 외침의 기록이 없는데
고구려는 장수왕 사후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니까 그렇다 치고, 왜놈들마저 조용한 것은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지만,
신라가 그만큼 안정되어 있었고 반대로 왜국에는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뭐가 어찌되었건 이렇게 대외환경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 양반의 복이었고 신라의 복이었다.
덕분에 과도기를 때우는 역할에 불과했던 지증왕은 신라를 정비하여, 법흥왕, 진흥왕으로 이어지는 다음 대의 신라 전성기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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