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온의 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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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 1차 여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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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서

대대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을지문덕에게 농락당해 도로 쫒겨났고, 그 여파로 망해 버린,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나 한껏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그저 그런 중국의 왕조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는 그렇게 만만한 국가가 아니었다.

 

후한 말기부터 시작된 400년간의 혼란기를 종식시킨 것만으로도 평가 받을 만하지만,

대운하의 완성으로 대륙의 동질성을 높인 점, 율령의 핵심인 3성 6부제의 시행, 과거제의 원형 도입 등

중국의 후대가 감사해야 할 업적이 많은 강대국이었다.

비록 3대를 지속하지 못한 단명의 국가였으나

양제 때 고구려 침공을 위해 동원한 병력과 인원은 동서양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이는 수의 국력이 엄청났음을 의미한다.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수한 이는 수 문제이다 .

중국을 통일하고 훌륭한 내치를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문제는

장성 이북에 있던 돌궐과 고구려를 장차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하였다.

 

수나라가 가진 엄청한 힘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생각만 해도 고구려는 아찔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평원왕 시절부터 수나라에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는 한편 군비를 확충하며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쇠락하던 고구려를 부흥시킨 평원왕이 죽고 운명의 영양왕이 590년 즉위 하였다

중국의 통일 후 수 문제는 돌궐과 토곡혼은 물론 베트남, 백제, 신라 등 주변국들로부터

동등한 위치가 아닌 황제와 신하의 관계로써 조공을 받는 등 기세등등해져 있었는데

고구려는 조공을 하기는 하였으나 완전 굴복과는 거리가 있었다.

 

문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수륙군 30만명을 은밀히 준비하는 한편,

고구려에 수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조공을 하고 제후국이 되라는 서신을 보내었는데, 

그 서신이 너무도 무례하였다.

분노한 영양왕은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고 수의 반응도 보기 위해 선제공격을 하게 된다.

강이식에게 말갈,거란의 기병 1만여 명을 주어 임유관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이 공격으로 수나라의 영주총관 위충이 살해되었고 수나라의 북방 요충지가 파괴되어 버렸다.

 

이에 문제는 대노하여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게 된다.

문제는 다섯째 아들 한왕 양량을 원수로 삼고, 장군 왕세적에게 30만 대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진격하여 요동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군사 행렬과 보급로가 수백 리에 걸쳐 늘어지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게다가 시기는 음력 6월.  한여름에 접어들게 되는 시점이었다.

육군은 장마 때문에 보급의 수송에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발생하였다.

수군도  태풍을 만나 싸우기도 전에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고구려판 가미가제인 셈이다.

수군이 어찌어찌 요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했고, 육군도 엉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음력 9월이 될 무렵 군사들을 이끌던 양량과 왕세적은 견디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군사를 물릴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영양왕이 그 무렵 자신을 요동 분토의 신하로 낮추는 표문을 보내자,

수문제도 철군에 동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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