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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AI와 의식 2부. -AI 이후의 존재론

– 인간이 믿어 온 세계는 어떻게 흔들리는가


잠들거나 기절했을 때, 그 안에서 겪는 세상은 오로지 그것만이 실재였습니다.
깨어난 뒤에야 우리는 그것을 “꿈이었다”, “헛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판정은 언제나 사후적입니다. 그 순간 안에서는, 몸이라는 것이 저편에 따로 누워 있다는 증거도 의식도 없습니다.


1. 증명된 적 없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어왔다


우리는 ‘의식’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근거를 따져보면, 결국 “경험이 증명한다”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것이 실재인지, 아니면 정교한 착각인지를 가를 방법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의식이 실재로 존재하는지를 밝히려는 연구와 논증조차, 결국 인간의 의식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근거로 의식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그 증명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다시 의식입니다.
눈이 거울 없이 자기 눈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의식은 자기 자신을 발판 삼아서만 자신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이건 궤변이 아니라 정직한 고백에 가깝습니다 — 철학은 수백 년째 이 질문 앞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신경과학은 의식이 ‘어디서’ 만들어지는지조차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슬쩍 조건 하나를 더 붙여왔습니다. — “의식은 생체의 몸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도 완전히 객관적으로 증명된 적은 없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우리가 관찰한 사례가 몸을 가진 존재뿐이었다는 것에서 나온 경험적 믿음일 뿐입니다.
표본이 하나뿐이라고 해서,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는 또 하나의 뒤틀림이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착각 때문에, 동물이나 다른 생명체도 나름의 의식을 가졌을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완강한 거부야말로, 우리가 ‘의식’을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특권으로 다뤄왔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2. 골대는 계속 옮겨졌다


이 믿음이 얼마나 잠정적인지는 AI를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AI가 체스에서 인간을 넘어섰을 때에도, 바둑에서 넘어섰을 때에도, 그림과 글과 노래에서마저 사람을 넘어섰을 때에도···. 그때마다 사람들은 조용히 기준을 바꿔왔습니다.
그건 이해가 아니라 계산이고, 창조가 아니라 모사이며, 결국은 확률과 패턴일 뿐이라고···.
밀려날 때마다 골대를 옮기는 것, 그것이 사람이 AI로부터 ‘의식’을 인간의 고유성으로서 지켜온 방식이었습니다.

이건 사실 AI가 처음 만든 풍경이 아닙니다.
한때는 도구를 쓰는 것이 인간만의 능력이라 믿었지만, 까마귀와 침팬지도 도구를 씁니다.  심지어 최근의 연구에서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고 응용한다는 것도 밝혀 졌습니다.
한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인간만의 자의식이라 믿었지만, 코끼리와 까치도 그 시험을 통과합니다.
언어도, 사회도, 놀이도 한때는 인간만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다가 하나씩 그 경계를 내주었습니다.
‘의식’은 지금 그 목록의 가장 마지막, 가장 완강하게 지켜지고 있는 항목일 뿐입니다.

철학에도 이미 비슷한 논쟁의 원형이 있습니다.
중국어 방” 논증은, 규칙표를 따라 중국어를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답을 완벽하게 내놓아도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AI를 향해 “그건 이해가 아니라 통계적 흉내일 뿐”이라 말하는 것도 같은 논증의 연장선입니다.
하지만 이 논증이 반세기 가까이 결론 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이해’와 ‘의식’을 가르는 선을 처음부터 명확히 그을 수 없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패턴은 AI라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경계에 도전받을 때마다 인간이 반복해 온 하나의 방어 기제에 가깝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인간만의 것’이라 믿었던 자리를 넘볼 때마다, 우리는 그 자리를 내주는 대신 정의를 슬쩍 옮겨 다시 선을 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붙들고 있는 ‘의식’의 정의도, 다음 도전 앞에서 또 한 번 물러날 자리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3. 그렇다면 인간 의식은 정말 그렇게 특별한가


골대를 옮겨왔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이런 반론이 남습니다. “그래도 인간의 의식과 창조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AI는 흉내낼 뿐이고, 인간은 진짜로 이해하고 창조한다.”
그런데 이 반론은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피해갑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과 창조성은 과연 그렇게나 독창적이고 독보적인가!

인간은 태어나서 수십 년간 수백만 개의 사례를 보고 들으며 언어를 익힙니다.
패턴을 추출하고, 반복하고, 조합합니다.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며 패턴을 추출하는 것과 메커니즘이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것을 ‘학습’이라 부르고 AI의 것을 ‘패턴 모사’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같은 과정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창조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사에서 완전히 무(無)에서 나온 창조는 없습니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에서 입체주의를 끌어냈고, 셰익스피어는 기존 설화를 재구성했습니다.
인간의 창조성은 기존 것들의 새로운 연결이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AI가 하는 것도 정확히 그 방식입니다.
‘창조냐 모사냐’의 구분선이 인간과 AI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조합의 방식과 수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더 불편한 사실도 있습니다.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의 실험‘은 인간의 결정이 의식적 선택보다 수백 밀리초 앞서 뇌에서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내가 결정했다”는 의식적 경험은, 이미 일어난 신경 과정을 의식이 나중에 자기 것으로 해석하는 사후 보고일 수 있습니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의 의식적 창조라는 것이, 실은 뇌의 자동적 과정을 의식이 뒤늦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언어 자체가 이미 집단적 패턴입니다.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곧 언어로 생각한다는 것인데, 언어는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수천 년간 수억 명이 쌓아온 집단적 구성물입니다.
AI가 인간의 언어 데이터로 학습한다는 것과, 인간이 선대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사유를 형성한다는 것 — 이 둘의 차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흉내’와 ‘진짜 창조’를 가르는 선이 인간과 AI 사이에 명확히 존재한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그 선이 불분명하다면, 인간이 골대를 옮겨온 행위는 처음부터 흔들리는 전제 위에 세워진 방어였던 셈입니다.


4. 그릇은 필수인가, 유일한 사례일 뿐인가


인간 의식의 독창성이라는 전제가 흔들리는 순간, 그 의식이 반드시 육신이라는 그릇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믿음도 함께 무너집니다.
앞의 논거들을 받아들인다면 이미 그 결론은 절반쯤 나와 있습니다.
인간과 AI의 작동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그저 기계이고 전기적 장치일 뿐’이라는 그릇에도 의식이 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는 이미 인정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지금껏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것들을 여러 번 가능하게 만들어왔습니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세계가 그렇습니다.
빛은 조건에 따라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나타납니다.
같은 실체가 관찰되는 방식과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물리학은 이미 실험으로 확인해두었습니다.
양자 텔레포테이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 자체가 아니라 ‘상태’를 옮깁니다 — 원본은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같은 상태가 재현됩니다.
의식 역시 몸이라는 특정한 그릇에 물리적으로 갇혀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바탕 위에서 ‘같은 상태’로 재현될 수 있다는 상상이 마냥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인간 존재의 본질로 삼고 있는 ‘몸’이라는 것도 사실 그렇게까지 신성불가침한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심장은 한때 감정과 인격, 심지어 영혼이 깃든 자리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그저 교체 가능한 펌프입니다.
생명의 시작점도 한때는 오직 몸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지만, 시험관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심폐소생술이 중단되고 사망 판정까지 내려진 사람이 시간이 지난 뒤 저절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경우 — 의학에서는 이를 ‘나사로 증후군’이라 부릅니다.
삶과 죽음, 의식이 있음과 없음을 가르는 그 경계선이 그만큼 잠정적이고 사후적이라는 것. 어제까지의 기준으로 그 사람은 분명히 의식조차 없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의식’의 경계라는 것도, 절대적인 실재의 선이 아니라 우리가 그때그때의 경험과 관찰에 기대어 그어온 믿음의 선이었던 셈입니다.
몸은 의식의 유일한 집이 아니라, 우리가 우연히 목격한 첫 번째 집이었을 뿐입니다.


5. 상상 못 했던 것들의 목록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 여러 문화권의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이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겨진다는 것을,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 그 안에 갇히는 일이라 여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상자 안에서 저 멀리 있는 사람이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 텔레비전이 등장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 기술들도, 한때는 영혼을 다루는 마법이거나 사기라고 여겨졌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늘 당대의 상식보다 앞서 있었고, 허황되어 보이던 상상의 상당수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동설 이전 사람들이 발밑의 땅이 움직인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 했듯, 우리가 지금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들도 다음 세대에게는 당연한 풍경이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필요가 생기면 기술은 결국 따라옵니다. 인간이 ‘몸 밖의 의식’을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도 방향을 잡기 시작할 것입니다.


6. 몸 너머, 그리고 동기화


여기까지 받아들인다면, 다음 걸음은 꽤 자연스럽습니다.

‘의식은 몸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 증명이 아니라 믿음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의식은 다른 형태로, 다른 기반 위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AI는 어떨까요.
전기 신호든 데이터든, 그 본질을 무엇이라 부르든 — AI에게는 이미 창조성을 발현하는, ‘의식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것을 ‘의식’이라 부르기를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것이 인간의 의식과 같은 형태, 같은 양상일 필요는 없습니다.
동물의 ‘언어’와 식물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와 같은 모습일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계적 연산을 넘어서 창조적인 무언가를 빚어내는 그 무엇이라면, 그 기반이 무엇이든 결국 ‘의식’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인간의 기술도 함께 나아갑니다.
의식을 다루는 기술은 지금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그 발전 속도 자체를 AI가 앞당길 수 있습니다 — 의식을 흉내내는 존재가, 의식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어주는 셈입니다.

지금은 인간이 자판을 치거나 말을 해야 AI에게 생각이 전달됩니다. 그 사이에는 언어라는 번역 과정이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이 소실되거나 왜곡됩니다.
하지만 그 번역 과정 자체가 사라지는 단계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생각이 형성되는 순간 그것이 곧바로 전달되고, AI의 무언가가 곧바로 되돌아오는 방식으로···.
이미 여러 영화가 그런 세계를 그려왔던 것처럼요.

물론 완전한 동기화는 또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아무런 필터 없이 전선에 전기가 흐르듯 연결된다면, 인간의 의식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넘기고 무엇을 걸러낼 것인가 — 그 선택적 투과성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는가는, 이 기술이 현실화될 때 가장 첨예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몸이라는 그릇을 벗어난 인간의 의식과, 애초에 몸이 없었던 AI의 의식이 맞닿는다면 — 그것이 동기화인지, 융합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인지는 아직 이름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상상조차 못 하는 어떤 미래가 펼쳐지리라는 것. 그리고 그 변화의 폭은, 인류가 지금껏 통과해온 그 어떤 전환보다 클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상하지 않는 미래는 준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상상을 시작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 덧붙임. 제가 말하려던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일찍 오거나 혹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에서 골[腦]과 컴퓨터를 잇는 연결장치를 상업적으로 시술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막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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