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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제 20 대 장수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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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무지 오래 살았다.

기록에는 태조대왕이 118세로 최고령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믿기는 좀 거시기 하고...

아마도 98세까지 살며 792개월 간 재위한 장수왕이 세계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

징그럽게 오래 살며 5세기의 고구려를 지배한 이 양반의 이름은 거련, 광개토대왕의 아들이다.

위대한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39세의 이른 나이로 사망하자

412년 아버지처럼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장수왕이 이어받은 고구려는 변방에 위치한 그저 그런 소국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동북아의 강대국으로서,

넓어진 영토와 많아진 백성 등 겉보기에는 화려했으나, 규모에 비례해서 문제도 많았다.

따라서 관리해야 하는 어려움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

복속시킨 지역의 백성이나 세력들이 본거지와 같이 안정되었을 리는 없으므로, 틈만 보이면 언제든 반란 세력으로 돌변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아무리 1년 간 대리청정하였다 해도,아버지 대에 양산된 공신들과 가뜩이나 드센 누대의 귀족 세력들에게 

18세의 신왕에게 고분 고분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차라리 망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이 중원의 강자가 된 북위도 얌전히 있지는 않았고,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북연을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끊임없이 실력을 투사하고 있었으므로 이 또한 두통거리였을 것이다.

 

이렇게 수두룩한 난제에 둘러싸인 18세의 어린 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은 광개토대왕의 적통이라는 것이므로, 일단 광개토왕릉비를 세워 위대한 아버지의 업적을 기렸고,

사신을 보내고 받고 사냥하는 등 일상적인 왕 노릇을 하며 10여 년을 보낸 후 평양성으로 천도 하였다.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로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만만한 평양의 귀족들을 친위 세력으로 삼아  다루기 힘든 국내성 귀족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을 것이다.

이 동네 귀족들이라고 만만할 리는 없었으나 국내성의 귀족들 보다는 고분고분했을 것이니,

장수왕에게 평양 천도는 현재의 답답한 상황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신의 한 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니네들 견제하기 위해 옮길란다` 이럴 수는 없으므로 명분은 방어였을 것이다.

 

역대의 싸움이 증명하듯이 가상의 주적 북위와 전쟁을 하기에는, 국내성이 거리도 가깝고 방어하기에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후가 춥고 토질이 척박한데 그나마 농사 지을 수 있는 땅도 얼마 안되었다.

반면에 평양은 우선 거리가 멀고, 그사이에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 많은 데다,

중국 세력의 동방 경략 기지 역할을 하던 당대의 정치, 문화, 경제 중심지에 걸맞게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고

농사지을 땅이 상대적으로 풍부하였으며 기후와 토질이 농사에 적합하였다.

나중에는 배후의 신라나 백제가 위협이 되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는 둘 다 식물 상태였으므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평양 천도를 완성했을 때가 재위 16년으로 다른 왕들이라면 재위 말년기에 해당하지만

장수왕에게는 이제 시작이었다.

 

재위  24년 째 북위가 준동하여 북연을 먹으려 하자,

북연의 3대 황제 풍홍이 고구려에 구원 요청을 하는 일이 발생한다.

북연과 고구려의 관계는 좀 모호한데...

북연은 설립 시 고구려의 분가 개념으로 고구려의 우위를 인정하였고,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 느낌이 강하였으나 황제국이었다

반면에 우위에 있는 고구려는 조공국이었으니 뭔가 이상하다.

이런 식의 관계가 설정된 이유는 아마도 북연의 설립시,

풍발이 쿠데타를 일으켜 후연의 황제를 죽여버리고 양자로 있던 고구려계 고운을 추대하였는데,

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고운은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면서 모용씨를 버리고 고씨로 복성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를 종가로 인정하는 행위였으나, 원래 황제국이었으므로 그대로 황제를 칭하였고,

고구려는 북연이 중원 제세력에 대한 방파제가 되어주는 상황이므로 별 불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운이 암살 당하고 풍발이 2대 황제가 되면서 제법 황제 노릇을 잘했고 국력을 키웠으므로,

고운과는 달리 제대로 된 황제국 대접을 원하였을 것이고, 고구려는 기왕에 하던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북연의 3대 황제, 풍홍이 즉위한 후 북위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위기에 몰린 풍홍은 자신의 조공국인 고구려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제후국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고구려는 풍홍만 구원하여 탈출시켰다.

이는 풍홍의 정치적 비중을 생각해서 한 일이지, 상전의 위기를 나의 위기로 여겨 북위와 대리전을 치르는 개념은 아니었을 것이나 풍홍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구원을 받은 풍홍은 위로하는 장수왕을 꾸짖고,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의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등 개념없는 짓을 하였다.

이런 어이없는 짓거리에 장수왕은 크게 노하였고 풍홍은 결국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지가 한 짓은 생각 안하고 장수왕을 원망한 풍홍은 송나라로 망명을 시도하여,

장수왕의 인내를 바닥나게 했고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북위의 신병인도 요청까지 거부하며 대접을 하면 감사하게 받고 찌그러져 살았으면 별 탈 없었을텐데,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바보짓을 하다가 명을 단축한 것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전형적인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일화라 하겠다.

 

당시 장수왕의 위상은 풍홍 따위가 꾸짖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장수왕은 처음 풍홍을 구출하였을 때 북위에서 신병 인도를 요청하였으나 거부하였고,

풍홍이 송에 망명 요청을 하여 그를 데려갈 사신이 병사와 더불어 도착하였는데도,

인도를 거부하고 죽여버렸으며 그 와중에 고구려 장군이 전사하자 송의 장군을 체포해 버렸다.

이렇게 중국의 남북조를 모두 무시하였으나 둘 다 감히 항의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는 오히려 혼인 동맹을 청하였고, 송은 체포되어 송환된 장수를 투옥하고 고구려의 눈치를 보았다 하니

당시 고구려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럭 저럭 중국의 남북조, 유연, 그리고 고구려의 4강 체제가 안정되었고 장수왕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일반적인 왕이라면 이쯤에서 저승구경을 해도 재위기간이 길다는 느낌인데

장수왕의 메인 게임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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