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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제 14 대 봉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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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왕

폭군질 하다가 쫒겨나 자살한 왕으로 유명한데....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292, 서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명성에 걸맞게 즉위 하자마자 숙신 정벌의 영웅이자 숙부인 달가를 추문으로 엮어 죽여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부담이 되는 세력과 명성을 가진 숙부를, 서모를 비롯한 자신의 반대 세력이 이용하려 하자 선수를 쳐서 죽여버린 것인데,

권력의 속성 상 그럴 수도 있겠으나, 국방의 공백은 피할 수 없었는지,

다음 해에 연나라 모용외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모용외의 기습적인 수도 직공에 대응하지 못하고 신성으로 대피 하였는데

신성에는 다행히 명장 고노자가 부대장으로 있어서 모용외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폭군치곤 아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데

모용외가 물러간지 한 달도 안되어 아우 돌고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폭군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인지,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 지는 잘 모른다.

미래의 미천왕인 돌고의 아들 을불은 이때부터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아우를 죽인 다음 해에 운명의 창조리를 국상에 임명하였고.

즉위 5년 째에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왔는데, 이 놈들은 서천왕릉을 도굴하다가 투탕카멘의 저주를 만나 도망갔다고 한다.

황당한 이야기기는 하나 고구려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음을 상징하는 일화일 것이다.

모용외가 물러간 후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아 방비하게 하였다.

외정만  봐서는 이 양반이 왜 폭군인지 잘 모르겠지만,

모용외의 침입을 두번이나 격퇴하고, 주변의 정적들을 일소하여 마음이 놓였는지

재위 7년 째에 서리와 우박으로 백성들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궁실을 증축하는 전형적인 폭군 짓을 시작하였고, 아직 죽이지 못한 을불을 찾으라고 신하들을 닥달하기 시작하였다.

재위 9년째에는 귀신이 울고, 지진이 일어나고, 가뭄으로 흉년이 드는데도 또 궁궐을 증축하는 꼴통짓을 하였고...

창조리가 정신차리라고 하는데도 말을 안 듣다가 쿠데타를 만나 실각하였다.

창조리는 왕을 유폐시키고 소금장수 을불을 데려다 왕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유폐된 봉상왕은 아들과 함께 목 매 자살하여 우리 역사상 몇 안 되는 자살한 왕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봉상의 들에 장사 지내어 봉상왕이라 한다.

86개월간의 재위였다.

 

다음 대의 미천왕이 워낙 영민한 군주이고 그 초년 고생이 동정을 자아내는지라  봉상왕이 더욱 형편없이 느껴지기는 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

명장 고노자를 중용하여 외침을 막았고 창조리를 재상에 임명하여 내정을 다스린 것은 잘한 일이었...

정적을 숙청하는 것은 명군이고 혼군이고를 떠나 누구나 하는 짓이니 따로 공과를 논하기 어려운 것이고....

다만 흉년에 궁궐을 증축하는 짓은 좀 심하지만 그게 쫒겨날 정도의 이유가 될까?

그런 짓을 한 왕이 한 둘인가? 대원군도 그 짓을 했는데.

간언하는 창조리에게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아주 틀린 말은 아니고...

다만 왕권이 약하고 귀족들이 드센 정치 풍토에서 먹히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

유폐된 상태에서 자식들과 함께 자살한 것보아, 아주 자존심이 센 인물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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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어려서 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다는걸 보아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이 생각나네... 하지만 자세 들어다보니 봉상왕도 나름 왕노릇을 한거 같은데... 좀 내가 봐도 심한 부분이 없지 않아 많은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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