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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제 10 대 산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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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왕

이름은 연우, 산상릉에 장사 지내서 산상왕이다.

신대왕의 넷째 아들로, 고국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산상왕이 왕위를 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좀 있다.

왕후 우씨는 고국천왕이 갑자기 사망하자, 계속 왕비를 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절노부의 압력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사장되었던 형사취수의 전통을 되살리기로 마음먹고 두 시동생들을 시험하였다 한다.

형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발기는 호동왕자 꼴이 날까 두려워 이름에 걸맞지 않게 발기하지 않았고

연우는 냉큼 응해 우씨의 낙점을 받을 수 있었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셋째 발기는 고국천왕 때의 첫째 발기처럼 발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연나부가 아니라 소노부가 도왔다고 한다.

발기는 왕궁까지 포위하였으나  다른 세력의 호응이 없어 실패하였고 요동으로 탈출하였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다시 공손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수도를 공격하였으나 막내 동생 계수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진행 과정을 보면 고국천왕 때 첫째 발기와 반란의 과정이 거의 흡사한데 결말 부분만 다르다.

그래서 고국천왕과 산상왕이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갖는 듯하다.

발기가 죽은 후 소노부 3만여 가가 요동으로 투항했다 하는데...너무 많다.

소노부가 통째로 빠져 나가지 않고서야....

 

뭐가 되었건 산상왕의 치세는 반란과 왕후 우씨와 얽힌 일화들을 제외하면 별게 없다.

눈에 띄는 것은 즉위 다음 해부터 환도성을 쌓아 10년 만에 도읍을 옮겼고

217년 후한의 하요가 1천여 가를 거느리고 투항하여 책성에 이들을 안치하였다는 정도이다.

산상왕의 나머지 기사는 후궁을 들여 후사를 얻는 정도인데.

시동생의 아내가 된 문제의 여인 우씨는 불임이었는지 또 아이를 낳지 못했다.

산상왕은 돼지를 잡은 처녀와 통정을 하였고 왕후의 질투가 심했으나 무사히 후궁으로 들여 후사를 볼 수 있었다.

이후 열심히 애 키우며 살다가 227년 사망하였다.

재위기간은 30년이었고 사망 나이는 모른다.

 

남겨진 기록만 보면 쓸데 없이 소란하기만한 인생을 산 것 같으나

도읍을 옮겼고 후사를 남겨 부자 상속을 실현한, 상당히 실속있는 삶이었다.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기존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빅 이벤트라 할 수 있으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눌러야 하고 재력도 상당해야 하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을 실현한 산상왕은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또한 공신이랄 수 있는 형수이자 마누라인 우씨의 뜻을 꺽고, 후궁을 들여 후사를 이은 것은 단순한 치정 사건으로 보이지만

형제상속의 고리를 끊고 부자상속을 정착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을 안정시킨 중요한 정치적 발전이었다.

산상왕은 고구려의 면모를 일신한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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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산상왕때 조금씩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듯..
근데 고대사는 워낙 자료가 없어서.. 근데 상상할수 있어서 재밌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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