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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제 5 대 모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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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본왕

왜 모본일까?

그릴 모에 근본 본, 근본을 그리워 한다?

무슨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민중왕처럼 능침이 자리 잡은 지역명일 것이다.

 

모본왕은 우리 고대사 초기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폭군으로,

신하들을 베게나 깔개로 사용했다는 전설을 가진, 연산군의 선배격인 양반이다.

이름은 해우,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형이 자살한 후 태자가 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왕위를 잇지 못했고, 민중왕 사후에 왕위에 올랐다.

뭔가 사연이 많을 것으로 짐작되나 기록이 없으므로 패스.

 

48년에 즉위한 모본왕은 49년에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고

이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이 화친을 청해오자 화친하였다.

이 해에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즉위 4년부터 갑자기 포악해져서 신하들을 침구로 사용하고 함부로 죽이다가 

즉위 6년째에 모본 사람 두로에게 칼 맞아 죽었고 모본왕의 뒤는 재사의 아들인 7살짜리 궁이 이었다.

이게 뭔 일일까?

요서지방을 공격하고 요동 태수를 굴복시켜 영토를 넒힐 정도로 만만찮은 능력을 지녔고,

자연재해에 고생하는 백성을 구휼하는 어진 심성을 가진 임금이

왜 갑자기 미쳐서 신하와 침구를 구별 못하다  칼맞고 죽었을까?

 

재사는 유리왕의 막내아들이므로 궁은 모본왕의 사촌동생이 되는데, 이 양반이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불리는 태조왕이다.

이 때 부터 계루부가 왕권을 독식하게 되는데...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모본왕 시해는 계루부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해씨 고구려설에 의하면 동명성왕은 계루부 왕이고,

유리왕,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은 소노부왕이라 하는데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유리왕의 동화와 같은 등장이나 왕들의 이름에 공통으로 해자가 들어가는 사실 등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입증되지 않은 설이지만 상상은 자유이므로 나름대로 추정을 해보면,

유리왕의 쿠데타로 정권을 잃어버린 계루부가,

대무신왕 사후 민중왕, 모본왕으로 이어지면서 소노부가 분열되고 약화된 틈을 노려,  

반격을 가해 모본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차지하였고,

쿠데타의  명분상 모본왕을 폭군으로 만들었다는 스토리도 가능하다.

 

뭐가 되었건... 모본왕, 안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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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마루밑다락방님의 댓글

신하들을 베개나 깔개로 이용했다니... 그나저나, 역사속에는 왕들의 여성 성폭행이 안나왔지만 분명 있었을거 같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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