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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김유신과 김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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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는 폐왕 진지왕의 손자로서,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왕의 교체는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므로, 진지왕의 폐위는 적대세력에 의한 쿠데타로 기존 세력이 숙청되었음을 의미한다.
숙청된 세력은 당연히 권토중래를 노릴 것이므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진지왕의 막내아들 비형랑이 귀신 두목으로 묘사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진평왕이 잠재적 불온세력의 핵인 김용춘을 사위로 삼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반대파 달래기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다.
문제는 진평왕이 54년간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줄줄이 낳게 되자,
김용춘이 전왕의 장자이자 현왕의 사위라는 신분으로 졸지에 왕위계승 서열 1위가 되어 버린데 있었다.
김용춘이 왕이되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아버지 진지왕을 복권시킬 것이고,
그리되면 진평왕이 찬탈자가 되어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여러 사람이 곤란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므로 김용춘은 유형 무형의 견제를 받았을 것이고...
잘못하면 왕위 계승은 고사하고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기에,
김용춘은 진평왕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충성심을 보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진지왕 계열은 왕위 계승불가 딱지가 붙어 있는, 미운 오리 가문이었기 때문에 성골이 아닌 진골이라고 불렸는지도 모른다.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집단은 성골, 그렇지 않은 미운 오리 새끼들은 진골, 이런 구도가 아니었을까?
뭐가 되었건 김춘추는 비주류로 태어났다.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자손으로 가야 출신이었다.
비록 왕족으로 편입되었고, 할아버지 김무력과 아버지 김서현이 많은 군공을 세우고 고위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왕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어도... 거기까지였다.
왕위는 언감생심이고, 영원한 아웃사이더로서 그저 왕족대접에 감지덕지하며,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신세였을 것이다.
이 태생적 비주류 가문에 김 유신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태어났고, 심상치 않은 성장 과정을 거쳐, 35세에 드디어 성명을 하게 된다.
진평왕 46년, 낭비성 싸움에 아버지를 따라 출전하여, 신출귀몰한 무용을 뽐내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김유신은 신라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성장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때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 용춘과 유대를 만든 것일 것이다.
젊고, 용맹하며, 분수를 아는 이 듬직한 경상도 청년은 불우한 왕족 김 용춘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고
자식과 교류하게 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 유신보다 몇 살 어릴 것으로 추정되는 김춘추는 대부분의 젊은 애송이들이 그러하듯이,
김유신의 무력과 카리스마에 쉽게 매혹되었을 것이고, 피차 불우한 처지의 두 젊은이는 쉽게 의기투합했을 것이다.

이러한 동맹을 통해 김 용춘은 비교적 단결력이 높은 가야세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김유신은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 줄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상생의 동맹은 진평왕 말년 칠숙의 난에서 위력을 발휘하였고,
잠재적 불온세력으로 분류가 되어있던 김 용춘을 일약 친위세력으로 만들었다.
김 용춘은 진평왕 사후, 말도 안 되는 성골 이론을 내세워 만만한 처제를 여왕으로 옹립하였고,
그로 인해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며 권력 상층부에 진입하여 여왕의 남편이 될 수 있었다.
진지왕계가 주류가 된 것이다.
이 때 김유신은 불안하였는지 김춘추에게 혼인 동맹을 요구하였고
이미 기혼상태였던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를 정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아무리 개판인 신라 왕족의 족보라 해도 정부인이 둘이 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는지,
어설픈 연극을 하여 선덕여왕의 허락을 받았다 한다.
어찌 되었건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맹은 더욱 단단해졌으며, 이는 곧 김춘추의 자산이 되었다.

선덕여왕 9년 의자왕의 대공세에 요충지 대야성이 함락되었는데
이때 대야성의 성주 김 품석은 김 춘추의 사위로서 아마도 낙하산 인사였을 것인데,
이놈이 찌질한 짓을 하여 성을 잃었고, 그 와중에 자살하는 막장 짓을 하였다.
저 혼자만 죽은 게 아니라 죄 없는 지 마누라까지 데리고 동반자살 하였다 한다.
이는 신라의 위기인 동시에 김 품석의 후견인 노릇을 했을 정치인 김춘추의 위기였으나,
영리한 김춘추는 고구려와 협상이라는 카드로 국가와 자신의 위기를 넘기려 하였다.
묘책이기는 하였으나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는데, 이때 김유신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내부의 책임론을 잠재웠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 대해 위협도 서슴지 않는 강단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협상은 실패하였고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지만, 김춘추는 김유신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귀환할 수 있었고,
귀국 후에도 책임 추궁을 당하기는커녕 전권대사로 왜국에 파견될 수 있었다.
왜국과의 협상도 소득이 없었으나, 김춘추는 다시 당으로 파견되었다.
이렇게 소득도 없이 천둥에 개 뛰듯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교 말고는 살 길이 없었던 신라의 절박함 이외에도, 김유신이라는 든든한 무력이 있었다.
김유신은 마지막 전성기를 맞은 백제와 여전한 대국 고구려의 침략을 동분서주 막아내며 신라의 구성으로 떠올랐고
이는 고스란히 김춘추의 보호막이 되었다.
만일 김유신이 없었다면 김춘추는 애 저녁에 실각하여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신라도 망했을 것이다.

선덕여왕 말년, 비담의 난을 계기로 정치권력은 완전히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집중되었으나
아직 왕위를 잇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선덕여왕의 유언을 조작하여 여왕의사촌동생인 진덕여왕을 옹립하였다.
진덕여왕은 명분도, 기반도, 능력도 없는 그냥 여인이었으므로 과도기를 맡기기엔 적임이었을 것이다.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이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이 시기 김춘추는 실질적 군주나 다름없었고 김유신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든든한 동지였다.
진덕여왕기에 군벌로 성장한 김유신은 대야성을 수복하고, 실지를 회복하는 등 맹활약을 하였고,
김춘추는 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상태가 되었다.
진덕여왕이 8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마치고 사망하자, 화백회의는 겁도 없이 상대등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김유신의 무력은 이를 취소시켰고 김춘추를 왕위로 밀어 올렸다.
김유신은 이후 대각간, 상대등 등으로 승진하였고 매제인 김춘추의 사위가 되었다.
이로서 둘의 결속은 더욱 단단해졌으며 김춘추는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이 될 수 있었다.
김춘추는 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김유신은 김춘추의 사후에도 여전히 기력이 왕성하여 든든한 왕실의 보호자가 되었으며,
조카이자 처남인 법민을 왕위로 올린 뒤, 숙원 사업인 통일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68세의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여,
고구려의 포위 공격으로 다 죽어가던 소정방을 구원하면서, 고구려 군을 1만 여명이나 죽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평양성 공략전에는 노쇠하여 출전하지는 못했으나, 왕을 대신하여 내정을 맡았고,
고구려 멸망 후 신라마저 삼키려는 당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나당 전쟁을 수행하다가,
문무왕 13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생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
이 두 사람만큼 완벽한 파트너가 있을 수 있을까?
서로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가지고, 완벽한 협력을 이루었으며,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라는 누가 보아도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실현시켰고
결과적으로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만주를 외세에 팔아넘긴 원흉으로 김춘추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김유신이 없었다면 김춘추도 없었을 것이고 신라의 삼국통일도 없었을 것이므로
그 비난의 반은 김유신의 몫이라 할 것이다.
둘의 일생은 완벽한 이인삼각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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