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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제 29 대 태종무열왕 : 중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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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무열왕 김춘추
삼국 통일의 초석을 놓은, 첫 진골 출신 왕으로,
진지왕의 장자인 김용춘과 진평왕의 두 딸 중 한 명인 천명 공주의 아들이다.
김용춘이 선덕여왕의 세 남편 중 하나였으므로 선덕여왕의 조카이자 의붓아들이라는 신분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쁘고, 말 잘 듣고, 명 짧은 진덕여왕 사후, 추대를 받아 654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이듬해에 김 유신의 동생 문희의 소생인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삼았고,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내어 처남을 사위로 삼았다.
음.. 좀 해괴하긴 하지만 중첩된 혼인관계로 세력의 결속을 다지는 것은 고대의 관행이었고 그 중에서 신라는 더욱 심했으므로 그러려니 하자.
군사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왕권처럼 허망한 것도 없으니, 당대 최고의 군벌 김유신을 묶어두기 위해서는 필요했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에게 북쪽 변경의 33개 성을 빼앗겨 당에 SOS를 날렸고,
당은 이에 화답하여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비록 소정방의 원정은 실패하였으나 고구려의 압력을 해소하는 효과는 있었다.
3년부터 아들을 비롯한 친족들을 요직에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7년에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면서 내부 정리를 완결하였다.


상대등은 신라 최고위 관직으로 대대로 귀족세력의 수장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주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던 상대등에 최측근인 김유신을 임명했다는 것은,

가야출신 군벌 김유신을 체제 내에 묶어두면서 기존 귀족세력을 견제하게함으로서, 

전제왕권의 강화를 노린 양수겹장의 묘수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부정리는 이후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구걸외교가 결실을 맺어,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 땅에 상륙하였고, 김유신은 5만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로 향하였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였고 당나라 군대도 백제군의 저지를 뚫고 기벌포로 상륙하여, 백제의 숨통을 끊었는데, 
소정방은 당으로 돌아갔고 신라도 전후 정리를 시작하였으나,
백제는 망한 후 더 거세게 저항을 하였고, 고구려도 칠중성을 공격하는 등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백제 부흥군을 잡기위해 무열왕은 태자와 함께 친정까지 해야 했는데, 그 고생을 하며 멸망시킨 백제 땅에,
당은 웅진 도독부를 설치하고, 부여융을 도독으로 임명하는 등 전형적인 갑질을 시작하였는데...

음..백제가 부활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이래서야 종노릇을 하며 백제를 멸망시킨 보람이 없기에, 김유신 등 신라의 조야는 당과 일전불사를 외치며 펄펄 뛰었으나, 
김춘추는 냉철한 정치가답게 침묵으로 견디어 내었다 한다.
이는 현명한 판단으로서 거센 부흥군의 저항과, 여전한 고구려의 위협, 그리고 왜의 동향 등을 고려하면 그래도 믿을 건 당 밖에 없었고,
설령 다른 요인들이 신라에 우호적이었다 해도 당대의 패권국 당과 싸우는 것은 당장 망할 지경이 아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
8년에는 백제부흥군의 기세가 더욱 심해져 자주 패하였고, 고구려까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와 막느라 고생하는 등 되는 일이 없었고,
결국 6월에 점령한 백제 땅이 안정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담소를 잘했고 대식가였다 한다.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신라 중대 왕실의 시조로서, 비록 외세를 끌어들이긴 하였으나, 백제를 멸망시키는 위업을 이루었다.
신라가 이때 백제만 먹고 고구려와 화친하며 당과 싸웠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고...

저자세 굴욕외교로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루는 바람에, 한민족의 무대가 반도로 국한되었고, 

결국 사대하는 민족이 되었다고 김춘추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김춘추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당시는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고 부를 정도로 동류의식이 없었으며 백제 또한 인식이 비슷하였다.
결국 삼국은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적대적인 외국에 불과할 뿐이었다.
원교 근공책은 이미 중국 전국시대에 그 효용이 입증된 국가 전략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김춘추에게, 같은 민족에게 외세의 칼을 꼽는다는 죄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그는 그저 약소한 조국을 위해 동분서주한 당대의 능력있는 외교가요 정치가였을 뿐이었다.
당시 신라인에게 김춘추는 누대의 원수 백제를 멸망시킨 영웅이자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게 해준 은혜로운 임금이었다.
그는 원효대사의 장인 즉 설총의 외할아버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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