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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제 23 대 법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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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원종 또는 모즉지.... 원종은 개명일 것이다.
지증왕과 연제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소지왕의 사위 자격으로 514년 왕위에 올랐다 하는데,
이 동네 족보는 워낙 복잡하므로 공동 아들일 수도 있고 조카에 당숙에...
아무튼 여러 가지 신분이 복합되어 계승 1순위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재위 4년에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였고.
7년에는 율령과 관제를 반포하고 관료의 복식을 지정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14년에 이차돈이 하얀 피를 흘리며 순교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15년에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후 왕가를 석가모니의 가문과 동일시하여, 귀족들이 제사장을 겸하고 있는 토속 종교를 누르고,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18년에는 상대등의 관직을 설치하여, 6부의 귀족 세력을 관료체계에 포함시켰는는데,
이로써 왕실은 6부의 하나인 탁부의 대표에서 벗어나, 신라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얻었다.
19년에 금관가야를 합병하여 낙동강 유역을 손에 넣었고,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을 얻었다.
23년에는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27년간의 재위한 후 흥륜사로 출가하여 법공 화상이 되었고, 바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법흥이다.

남들은 한참 전에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었고 일차 전성기까지 지났는데,
지진아 신라는 이제야 제대로 모양이 나오는 고대국가가 되었다.
그만큼 신라가 후진적인 사회였다는 뜻일 것이고, 이 한심한 신라를 개혁하는데 불교는 적절한 도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도입 과정에서 많은 피를 뿌려야 했고,정착을 위해서도 많은 진통이 필요했다.
법흥왕은 토속신앙의 아성인 신라의 일곱 성지를, 과거불이 주재하던 장소라고 우기며 밀어버리고, 절을 짓는 국책사업을 벌였는데,
당연히 귀족들의 반대가 심했고, 짓던 절을 때려 부쉈다가 다시 짓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이때 지어진 절들 중 유명한 것이 분황사, 사천왕사 그리고 불국사 등인데,
어찌 보면 무리한 밀어붙이기 처럼 보이기도 하나 결과적으로 샤머니즘이 판치는 부족 연맹체 수준의 신라를,고대 왕권 국가로 탈바꿈시켰으며,

금관가야를 합병하여 영토를 넓혔고,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법흥왕,

대단한 명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시기에도 왜구의 준동이 없었다... 이놈들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걸까?
맛이 간 백제를 지원하느라 여력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나제동맹이 확장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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