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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제 22 대 안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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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왕

춘향전과 플롯이 거의 같은 러브 스토리로 유명하다.

휘는 흥안, 문자명왕의 아들로 519년 왕위에 올라 중국의 남북 양조 모두와 교류하였.

재위 5년에 백제를 공격하였고

재위 11년에 오곡에서 백제를 크게 이기고 2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재위 13년째에 사망하였.

 

기록을 요약하면 이렇게 빈약하여, 고구려 쇠퇴기의 시작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으나,

안장왕이 그렇게 간단한 왕은 아니었다.

요서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북위의 용성을 습격 약탈하였고, 백제와 빈번한 전쟁을 벌여 한강 유역을 확보하는 등

문자명왕 보다 더 공격적이었고 실적도 좋았으므로 확보한 영토가 더 넓었을 수도 있다.

남조는 물론 변경을 약탈 당한 북위도 고구려를 높이 평가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 것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의 위상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위상을 유지할 만큼 국력이 강대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전성기는 안장왕까지 연장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전해 오는 일화에 따르면

안장왕이 태자 시절, 한성 부근에서 첩보 활동을 하였는데

한주라는 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안장왕이 귀국하여 고구려에 있는 동안, 

그녀의 미모에 홀린 고을 태수가 첩을 삼으려 했고, 거부하자 죽이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부하 장수를 파견해, 잔칫날 태수를 참살하 이 의리 있는 미녀를 구하였고,

뒤이어 대군을 이끌고 안장왕이 쳐들어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한다.

춘향전과 거의 같은 스토리이다.

또한 정몽주의 단심가는 한주가 태수의 협박과 유혹을 거절하면서 쓴 시를 정몽주가 차용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안장왕의 능력과 로맨틱한 면이 부각되는 일화라 하겠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안장왕의 죽음이 암살이고 아들인 복귀군은 일본으로 망명해 코마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로맨티스트인 안장왕이 뒤를 이을 후사가 없어, 동생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 좀 어색하여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워낙에 신뢰도가 바닥인 일본 서기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왜놈들 창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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