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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제 21 대 문자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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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명왕

고구려 최대 판도를 이룩한 왕이자 전성기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져 있다.

휘는 나운.

발음을 조심해야 하는 아버지 '조다'가, 징그럽게 오래 산 할아버지보다 일찍 죽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명치호왕이라고도 하는데 이로 미루어 정식 시호는 문자명치호왕이 아닐까 한다.

 

491년 즉위하였는데

재위 3년에 세력이 커진 물길에 시달리던 부여가 항복하는 바람에 

부여 지역을 완전히 복속시킬 수 있었고 고구려 최대 판도를 이루게 되었다.

재위 6년에  신라의 우산성을 재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고

8년엔 백제인이 기근으로 투항해 오기도 하였다.

16년에 말갈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21년에 백제의 가불,·원산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519년 사망하였고 재위는 28년이었다.

 

문자명왕의 재위 시기는 이전 장수왕의 시대와 대외 여건이 판이하였다.

서쪽의 북위와는 대체로 친선 외교를 지속하였으나,

거란의 기병을 이용하여 북위의 변방을 약탈하기도 하였다는 기사 등으로 보아 갈등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북 쪽에는 숙신의 뒤를 이은 물길이 세력을 확장하여, 부여를 멸망시키는 등 끊임없이 준동하였고,

남쪽은 나제 동맹이 단단한 결속을 자랑하며 저항하고 있었다.

예전의 속국 내지 반 속국 상태의 세력들이 모두 적대적으로 바뀐 환경이므로,

고구려는 예전의 막강한 위세를 잃게 되었고, 결국 문자명왕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은 그저 현상유지 정도였을 것이다.

 

남북으로 끊임없는 도전에 시달리며 왕노릇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절을 세우는 등 불교에 의지한 흔적도 보인다.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기의 위대한 고구려를 생각하면 조금 아쉬움이 남으나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는 인간사의 법칙을 누가 피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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