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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교류글]샤힌 기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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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한국의 마지막 칸으로 1745년 오스만제국의 에디르네(Edirne) 에서 태어났다. 베네치아와 그리스에서 유학했으며 모국어인 크림 타타르어와 그 외 3개 언어에 능통한 수재였다. 20살이 되던 해에 그는 당시 크림한국의 칸이었던 크림 기라이의 요청으로 유학을 중단하고 '정신적 고향'에 도착하였다. 이후 샤힌 기라이는 노가이족 지역의 최고위직인 노가이 베이(nogai Bay)에 임명되었다.

 

 

1774년 퀴췩-카이나르자 조약(Treaty of Kucuk Kaynarca)을 그린 그림. 이 조약으로 인해 크림한국은 오스만제국의 속국 지위에서 벗어나게 되나 대신 러시아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고, 이 상황은 러시아에 합병되기 이전까지 이어졌다.

 

 샤힌 기라이가 크림한국에 도착하고 노가이 베이직에 임명됬을 시점의 국제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보호국으로 두고 있었으며, 다시 흑해 방면으로 남진정책을 피기 시작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가신국이였던 크림 한국도 당연히 러시아의 타깃이 되었다. 제 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1768-1774)을 종결지은 퀴췩-카이나르자 조약에서 러시아는 크림한국을 오스만 제국에게서 떼어놓게금 하였다. 이후 크림 한국은 오스만의 종속국에서 '독립국'이 되었으나 러시아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다. 이때 샤힌 기라이는 크림한국의 칸, 셀림 3세 기라이(제위:1770-1771)의 명을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예카테리나 여제(女帝)를 접견하였다. 예카테리나는 크림한국의 사절단으로 왔던 샤힌 기라이를 두고 이렇게 평하였다.

 

『 크림의 왕자(샤힌 기라이)는 그동안 봐왔던 타타르인들 중 매우 신사적이고 배움에 대한 욕구가 많으며, 재능과 교양을 겸비하고 있다.                                                                                                                                                        』

 

 1776년, 샤힌 기라이는 크림한국의 칸으로 등극하였고 후진적인 자국을 근대화시키려했다. 수도를 바흐치사라이에서 무역항 카파(현 페오도시아)로 천도하였으며, 공장을 짓는 등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울라마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러시아마저 크림한국을 합병하려 압력을 넣는 상황으로 변하였다. 결국 1783년 샤힌 기라이는 러시아의 압력에 굴복, 러시아의 크림한국 합병에 동의하였다. 이로써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던 크림한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졌고 이후 크림한국의 영토는 타우리다 주(Таврическая губерния)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크림한국이 지도상에서 사라진 후 러시아는 마지막 칸, 샤힌 기라이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택연금 생활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태어나고 자란 에디르네에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은 합의를 보아 샤힌 기라이의 에디르네 거주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만제국 정부는 샤힌 기라이를 위험인물로 보고 로도스 섬으로 추방했으며, 그곳에서 크림한국의 마지막 칸, 샤힌 기라이는 4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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