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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코사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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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식명칭은 '페르시아(이란) 코사크 여단(Persian Cossack Brigade)'이다. 1879년에 창설된 카자르 왕조의 친위부대이며, 이들은 이란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고 이란의 역사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란 코사크군의 모습(미국 브루클린 미술관 소장)

 

[초기 이란 코사크군]

 카자르조의 샤한샤, 나스르 알 딘 샤(Naser al-Din Shah)가 1878년 러시아를 순방하던 도중에 우연히 카프카스 주둔 코사크 기병대의 훈련을 참관했다. 황실 친위부대의 부진을 깊게 통감했던 샤는 코사크 기병대의 훈련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 러시아인 장교를 중축으로 하여 황실 친위부대인 이란 코사크군을 창설하였다. 코사크군의 초대 여단장은 러시아 제국의 장교였던 알렉세이 도만토비치(Aleksey Domantovich)가 임명되었다.

 

 황실 친위대 역할을 했던 이란 코사크군의 우두머리인 여단장은 레자 샤를 제외하고 모두 러시아인들로 임명되었다. 그런 만큼 러시아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이란 코사크군은 친러 성향으로 향후 러시아를 도와 1896년의 소요사태와 이란 입헌혁명(1905-1911)에서 러시아의 이익에 충분히 부합되는 행동을 하였다.

 

  1879년에 결성된 이란 코사크군은 초기에 자금난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었고, 초기의 군세는 러시아의 압제에 견디다 못해 이란으로 이주한 체르케스인 400명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샤는 정규 군인 600명을 충원하여 이란 코사크군을 증강시켰으며, 알렉세이 도만토비치(Aleksey Domantovich)는 코사크군 내부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코사크군은 나스르 알 딘 샤와 도만토비치의 노력으로 급속도로 성장했으나 자칫하면 러시아의 도구가 될 위험이 높았다.


 이러한 위험 가운데, 샤의 압력으로 코사크군의 여단장은 도만토비치에서 표트르 차르코프스키(Pyotr Charkovsky)로 교체되었다.(1882) 차르코브스키가 여단장으로 있었던 시기의 코사크군은 샤의 견제로 인해 무기고에 대포 4문을 배치하는 것 외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2년 후, 여단장이 알렉산드르 쿠즈민-카라바예프(Aleksandr Kuzmin-Karavayev)로 바뀐 이후 상황은 심각해졌다. 카자르 페르시아(카자르 왕조)의 재정이 악화일로에 치닫아 코사크군에 투입되던 예산이 감소했으며, 1890년에 발생한 콜레라로 인해 이란 코사크군의 수는 대폭 줄어들은 것이었다. 침체기의 절정을 보여주듯, 1891년에 코사크군의 여단장이 알렉산드로 슈네어(Aleksandr Shnyeur)로 바뀌었을 때, 코사크군은 200명으로 감축되었다. 이토록 친위부대가 이토록 유명무실하게 전락할 시점에 샤는 독일인 장교들을 중심으로 친위부대를 재조직하려 하였고, 코사크군은 1894년 슈네어가 여단장직에서 물러날 때에 이르러선 150명으로 수가 감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내부의 특권층들은 특권을 향유하려 했고, 이는 결국 파벌을 만들었다. 이는 가뜩이나 침체기에 시달리던 이란 코사크군을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뜻밖에도 가련한 코사크군을 구해주었고, 이란 코사크군은 여러 사건들을 거치며 상승일로를 걷기 시작하였다.

 

[전환점] 

 1895년 5월, 오랜 공백기 끝에 이란 코사크군의 5대 여단장으로 블라디미르 코소르고르프스키(Vladimir Kossogovsky)가 부임했다. 이란 코사크군의 가장 큰 문제는 코사크군 내부에 특권을 가진 군인들이 제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파벌이 일어났던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코사크군 내부의 문제를 개선하고자 코소르고르프스키는 군 내부의 특권층을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취급했다. 이것이 금새 효과가 나타나서 이란 코사크군은 좀전의 분열되고 무기력한 부대가 아닌 효율성있는 부대로 재탄생했다. 이후 이란 코사크군은 점차 이란 내부의 정치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양적인, 질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이란 코사크군과 관련된 사건들]

1. 1896년-짧은 혼란기 



 1896년 5월 1일, 카자르 페르시아의 나스르 알 딘 샤가 암살당했고, 뒤이어 수도에서는 여러 파벌들과 군중들의 소요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 찾아왔고, 정규군과 경찰로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코소르고르프스키는 당시 재상이었던 미르자 알리 아슈가르 칸(Mirza Ali Asghar Khan)의 허락을 받아 이란 코사크군을 이끌고 테헤란 시가지를 신속하게 점거하였다.

 

 수도의 혼란스러운 소요를 진정시킨 코소르고르프스키를 필두로 한 이란 코사크군은 카자르조의 파벌분쟁에 개입하였다. 러시아와 영국의 지원을 받은 이란 코사크군은 타브리즈에 주둔하던 황태자, 무자파르 앗 딘(Mozaffar ad-Din Shah)을 지지했다. 반대파는 이란 코사크군의 세력에 밀렸고, 결국 1896년 6월 7일, 이란 코사크군의 호위 하에 무자파르 앗 딘 샤가 테헤란에 입성하여 카자르 페르시아의 5대 샤로 등극하였다. 짧은 소요는 무자파르 앗 딘 샤가 카자르 페르시아의 5대 샤로 등극하면서 끝이 났지만, 이후로 이란 코사크군과 러시아의 영향력은 카자르 페르시아 내에서 엄청나게 증가했다.

2. 이란 입헌혁명(1905-1911)​ 

 1906년, 외세의 간섭에 무기력했던 정부의 태도와 샤의 과도한 사치들을 규탄하며 전(全)국민적으로 자주외교와 샤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자는 주장 하에 입헌혁명이 일어났다.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무자파르 앗 딘 샤는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했고 의회 소집과 헌법 제정에 동의하였으나, 얼마 안가 급사했고(1907) 페르시아는 1896년보다 배로 심한 혼란기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십수년간 페르시아 정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오던 이란 코사크군은 다시 이란의 내정에 개입하였다. 코사크군은 황태자 모함마드 알리를 지지했다. 모함마드 알리(Mohammad Ali)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카자르 페르시아의 7대 샤로 즉위하였고, 이후 반동적인 전제정치를 시행하였다. 이란 코사크군은 샤의 전제정치를 지지하여, 샤가 1907년에 입헌정치의 산물인 의회를 정지시키고 반동적인 친위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이란 코사크군은 의회를 폐쇄하고 건물을 포격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코사크군은 소전제* 기간동안 큰 혜택을 누렸으며, 당시 여단장이었던 블라디미르 리아코프(Vladimir Liakhov)는 수도 테헤란의 방위를 맡게 되었다.

 

 1909년 이란 코사크군​ 

 

 그러나 1909년, 소전제가 붕괴되고 입헌파들이 주축으로 새 정부가 세워지자, 이란 코사크군은 러시아를 도와 입헌파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였고 이는 1911년 러시아의 이란 침공에서 잘 나타났다. 타브리즈와 테헤란에서 코사크군은 러시아군을 도와 입헌파 세력을 궤멸시키면서 친러/친외세 성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1914-1920년 사이의 이란 코사크군]

 이란 코사크군은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카자르 페르시아 내에서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발돋음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는 그 군세가 8천 명에 이르렀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오스만제국이 카프카스와 이란 일대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려 했을 때, 이란 코사크군은 러시아군을 따라 페르시아 북부에서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치뤘다.

 

 1차 세계대전 와중 러시아에선 2월의 혁명(1917.2)이 일어났고 그 결과 차르정부가 몰락했다. 이는 친러색이 강했고, 러시아의 손 안에 있던 이란 코사크군에도 영향을 주었다. 혁명이 일어난 직후 영국은 재빨리 이란 코사크군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란 코사크군은 이후 영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였으며, 전형적인 예로 레자 칸의 쿠데타(1921)를 들 수 있다.

 

1921년 쿠데타의 주역들(좌)과 레자 칸(우)

 

[레자 샤의 쿠데타와 이란 코사크군]

 1920년, 레자 칸(Reza khan)은 이란 출신으로써 코사크군의 최초이자 마지막 여단장이 되었다. 그가 여단장이 된 데는 영국의 영향이 실로 컸다. 영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레자 칸은 코사크군과 함께 테헤란으로 진공할 수 없었을 것이고,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레자 칸이 코사크군의 여단장이 된 시기에 카자르왕조는 페르시아 전역을 제대로 지배하지 못했으며, 지방의 반란과 소요를 통제하고, 진압할 힘도 없었다. 바야흐로 절대권력의 부재가 찾아온 것이다. 1905-1911년의 혼란기보다 더욱 심각해진 상황은 테헤란의 카자르조를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는 처지로 만들어놓았다. 

 

 이처럼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자, '말을 탄 남자' 레자 칸은 영국의 지원을 잡아 '질서를 잡겠다는 명목 하에 1921년, 카자르조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레자 칸은 수천 명의 코사크군을 이끌고 수도를 장악했으며, 쿠데타의 성공으로 레자 샤는 전(全)페르시아의 1인자가 되었다. 이후 레자 칸은 '상징적인' 권력 확보하기 위해 코사크군을 적극 활용하였다.

 

 레자 칸은 코사크군을 길란(Gilan)인민공화국*과 쿠르드족(Kurds)등 이란 각지에 할거하던 지방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했고, 이는 성공을 거두었다. 1920년대 당시 이란 코사크군은 7~8천 명으로 추정되며, 레자 칸은 카자르조를 몰아내고 신정부를 세울 시 이란 코사크군의 주요 인물들을 요직에 않힐 생각이었다.(카자르 말엽의 인사들도 레자 샤 집권 초기에 크게 중용함) 또한 쿠데타 이후, 레자 칸은 휘하의 코사크군을 새로운 군대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이란 코사크군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기록으로 남게 되었고, 코사크군의 마지막 여단장이기도 했던 레자 칸은 신정부의 수반으로써 레자 샤 팔레비(Reza Shah pahlavi)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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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본래 정식명칭은 페르시아(이란) 코사크 여단이나, 필자는 편의상 '이란 코사크군' 이라 쓰며, 본문에 나와 있는 '코사크군' 은 이란 코사크군을 지칭한다.

1. 소전제-모함마드 알리 샤(Mohammad Ali Shah)의 제위기간(1907-1909)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이 기간동안 샤 모함마드 알리는 보수반동적인 전제정치를 실시하여 국민들의 반발을 샀으며, 1909년, 전국민적인 봉기(제 2차 입헌혁명)로 인해 러시아로 쫒겨났다. 이후 국민들은 샤의 어린 아들인 아흐마드(Ahmad)를 샤로 옹립하였다.

2.길란인민공화국-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아 길란(Gilan) 지역에 세워진 공화국이었으나 레자 칸에 의해 일찍 단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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