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온의 서고
역사를 바꾼 인물 또는 사건 분류

거란족 : 3차 침입과 귀주대첩 그리고 그 이후

컨텐츠 정보

본문

거란과의 3차 전쟁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드물게 모범적인 전쟁이었다.

매복, 기습 및 제대로 된 청야전술로 적의 힘을 빼앗고 적보다 우세한 전력으로 회전에서 끝장을 내버리는,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승리요, 통쾌한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2차 침입에서 거란의 철수 조건이 현종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이었으나

고려는 오로지 중화사랑에 빠져 송과의 비밀외교에 정성을 기울일 뿐,

이행할 생각이 없었고 거란과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었다.

당연히 요 성종은 열 받았고,

1012년 강동 6주를 무력으로 빼앗겠다는 공식성명을 내고 군사행동에 들어가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강동 6주의 요새는 거란의 침입을 거부하여, 거란의 체면을 깎아 먹었고,

거듭된 거란의 군사적 실패는 여진족들을 이반하게 만들었다.

 

반면 고려는 거란과의 계속되는 군사적 긴장으로 군사력 확장이 불가피했고

무리한 중앙군의 증가는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게 되었다.

재정 고갈은 무리한 정책으로 이어져

1014년, 상장군 최질과 김훈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이 정변은 이 후의 무신 정변과는 다르게, 현종이 서경 유수와 짜고 고위 무신 19명을 속여, 살해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이 났으나

요 성종은 이것을 기회로 여겨 고려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결심하게 된다.

 

거란은 현종 9년(1018) 소배압이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고,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하는 군사 20만 8천 명이 영주에 대기하였다.

강감찬은 흥화진(의주)에서 정예 기병 1만 2천을 뽑아 산곡 사이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동쪽의 큰 내를 막은 후, 거란군이 건너가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려,

도하하는 거란군의 허리를 끊고, 매복한 기병을 돌격시켜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유명한 일화는 귀주대첩이 아니고 흥화진 전투로서 거란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아니었고

다만 전략을 바꾸어 개경을 직공하게 만들었다.

2차 침입 때의 요 성종의 작전을 흉내낸 셈이었으나

고려군은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서 거란에 타격을 주었다.

 

거란군은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경으로 향해, 마침내 현종 10년 정월 3일에 개경에서 100여리 떨어진 신은현에 이르렀고 고려는 전통의 청야전술로 맞섰다.

개경의 방비도 제2차 침입 때와는 달리, 송악산에 산성이 구축되어 있었고, 수도 일원의 경비도 훨씬 강화되어 있었다.

 

거듭되는 패전으로 사기마저 떨어진 거란군은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하여 개경 코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후퇴하던 거란군 궁기병 10만은 귀주에서 기다리던 고려군 20만과 회전을 벌이게 되었다.

수 일 간의 격전 끝에, 고려 철기병 1만에 의해 거란군이 양분되면서 고려에 승리를 선물하는 것으로 전쟁의 종말을 고했다.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이다.

고려군은 수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군마와 낙타, 갑옷, 병기 등을 노획하였는데,

거란은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에 불과할 정도로 고려의 완승이였다.

4반세기에 걸친 여요 전쟁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요의 성종은 크게 노하였다고 하는데 그래봐야 이미 길 떠난 버스요, 불꺼진 창이었다.

강감찬이 개선하자 현종은 친히 영파역까지 나아가 주악 속에 용사들을 맞이하여 성연을 베풀었고,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금화팔지(金花八枝)를 얹어주고, 바른 손으로 금잔을,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였다.

그 동안의 고난을 모두 보상 받는 안도와 축제의 장면이었다.

 

전쟁에 승리하긴 하였으나 전쟁이 내내 고려 영토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고려는 적지 않은 인명손실과 피해를 감수해야했지만.

가장 참혹한 피해를 본 것은 중간에 끼어있던 여진족일 것이다.

거란도 국력을 기울인 전쟁으로 인한 출혈이 적지 않아서, 더 이상의 성장을 할 수 없었고 정체와 쇠퇴를 격게 된다.

송 또한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눈치만 본 댓가로 거란의 밥줄 노릇을 계속해야 했다.

 

이후 고려는 형식적으로 거란에 사대를 하며 어느 정도 자주적인 외교를 보여주었고

거란은 고려의 병탄과 강동 6주를 사실상 포기하였다.

이로서 고려, 요, 송 간의 안정적인 3강 구도가 형성되어

고려는 이후 120여 년간 정치, 경제적 태평성대를 누리며 귀족문화를 활짝 꽃피룰 수 있었다.

 

거란은 12세기 초 송과 금의 연합군에 의해 망하고 옛 조상 흉노를 본받아 서쪽으로 도망친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에 서요를 세우고 잠시 부흥하는 듯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최강의 정복자 징기스칸을 만나게 되고  바로 복속한다.

그 후 징기스칸의 정복전쟁에 적극 협조하였고 결국 몽고족과 동화되어 사라졌다.

서요가 망하고 더 서쪽으로 도망간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이란까지 가서 다시 요를 세웠다.

만주에 남아있던 자들도 금나라가 망하면서 대요수국을 세웠는데 몽골에 의해 얼마 못가 망하고 흡수되었다.

 

대요수국이 망한 뒤 그 잔당들이 강동성에서 농성하였는데

포로로 잡힌 거란 유민들이 8만이었다.

이들은 천민 대접을 받아, 향, 소 ,부곡에 나뉘어 살며

도살업을 하거나 갖바치, 고리 백정, 광대일 등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새댓글


페이스북에서 만나는 마루밑다락방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