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신라사 분류

신라 : 제 46 대 문성왕

컨텐츠 정보

  • 3,996 조회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김 경응

신무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지 6개월 만에 허무하게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839년 왕위에 올라, 처음 한 일이 장보고에게 장군직을 하사하는 일이었는데,

장보고의 청해진은 정권에 안정을 주는 배후세력이었고,

자연재해와 내전으로 피폐해진 나라 살림을 그나마 유지시켜 주는 돈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즉위 이듬해에는 당 문종이 억류하고 있던 국학생을 포함한 신라인 105명을 추방하는 사건이 있었다는데....

뭔 사고를 쳤는지는 모르겠으나 105명씩이나 억류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당과 신라의 교류가 활발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중국 놈들이 이들을 죽이지 않고 추방한 것을 보면, 신라의 위상 또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피비린내 나는 왕권 다툼이 있건 말건, 민초들은 먹고 살기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 무역에 종사했고,

이들의 이러한 활동이 국가를 먹여 살리는 힘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가능하게 한 장보고의 청해진, 국가의 보물이라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백성들의 집에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관심이 없던 골품 귀족들은 권력 싸움에 영일이 없었고,

문성왕 3년, 홍필의 반란 모의가 있었다.... 반란의 시대의 개막이었다.

4년에 이찬 김 위흔의 딸을 왕비로 삼았는데,조강지처 박씨는 어찌되었는지 모르나, 장보고의 항의를 받았다.  

사돈 약속을 지키라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장보고를 달래기 위해,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삼으려했으나 골품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다.

이에 열 받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진압하지 않고, 염장을 시켜 장보고를 암살하여

돈줄인 청해진을 유지시켰다 한다.

군사를 동원하여 제대로 붙었으면 어찌되었을지는 모르나, 비열한 방법으로 장보고를 죽임으로 인해,

원한이 맺힌 청해진의 반 독립적인 거대 해상 세력은 이후  정권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재위 7년째의 일이었다.

 

나라야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골품귀족들의 반란 러시는 이어져, 이듬해엔 이찬 양순이 모반하였고,

11년엔 이찬 김식이 반란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13년엔 용단을 내려 징그럽게 말 안 듣는 청해진을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속은 시원했겠으나... 이제 중계무역은 누가 한다는 말인가?

재위 19년 857년에 숙부 김 의정에게 왕위를 넘기고 왕노릇을 마감하였다.

반란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왕위 다툼으로 인한 혼란과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문성왕이었으므로 왕권 강화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왕의 권위와 비대해질 때로 비대해진 골품 귀족들의 세력 때문에, 왕권강화는커녕 왕의 자리를 지켜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대의 은인이며 현재의 친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장보고는 문성왕의 든든한 배후세력이었으며

청해진의 중계무역은, 선대와 마찬가지로 자연재해와 반란에 시달렸던 문성왕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는 돈줄이었을 것이다.

문성왕이 장보고를 잘 달래어 그 세력을 온전히 흡수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더라면, 국가를 환골탈태 시킨 중흥군주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골품귀족들에게 굴복하여 구원의 동아줄로 목을 매는 올가미를 만든 것이 안타깝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새댓글


페이스북에서 만나는 마루밑다락방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