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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오스만제국 지배기 세르비아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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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년 세르비아 전제공국이 멸망한 이후 세르비아의 지배자로 떠오른 오스만제국은 세르비아 지역을 파샬루크(pashaluk, 속주)로 개편하였다. 이 시기에 일부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지배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본연의 신앙-정교회을 고수하였다. 그에 반면, 신앙을 장려하고 유지시켜나가야 할 세르비아 정교회는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2세가 사망한 이후 후계자가 선출되지 않았다.사실상 세르비아 정교회의 맥은 끊겼으며 오스만제국 내의 정교회들을 관장하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종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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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당시 세르비아 총대주교구의 관할구역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에 종속된 세르비아 정교회는 1557년 메흐메트 파샤 소콜로비치의 중재로, 술레이만 대제에 의해 독립적 교회로 복원되었다. 총대주교는 이전처럼 페치(Peć)에 기거했으며, 복원된 세르비아 정교회의 초대 총대주교는 소콜로비치의 인척관계인 마카리예 소콜로비치(Макарије Соколовић)가 선출되었다. 세르비아 총대주교의 복원은 이후 제국 내의 세르비아인들의 정신적 통일을 촉진하였다.

 

 하지만 오스만제국 정부는 교회가 잇다른 세르비아인의 봉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1766년 페치의 총대주교구를 폐지하였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구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후 세르비아 정교회는 1879년 세르비아가 독립한 이듬해에야 독립자치교회가 될 수 있었다. 1766년 이후 세르비아 정교회는 세르비아인들의 영적 지도자로써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으며, 그리스계 파나리오트들이 주요 요직을 독점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두나브 공국의 파나리오트들도 그렇고, 세르비아의 파나리오트들도 그렇고..이들 중 대다수는 탐욕에 어두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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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18세기 초반에 일어난 '세르비아인들의 대이동' 당시 합스부르크 군주국으로 망명하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아르세니예 3세(Арсеније III)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발칸반도의 크리스트교인들은 오스만제국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돌아오는 것은 가혹한 처우 뿐이었으며, 그를 피하고자 이들은 이슬람(순니)교로 개종하였다. 일련의 세르비아인들은 그러한 처우를 피하고자 합스부르크 군주국(Habsburgermonarchie)으로 망명하였고 자연스레 세르비아 정교회의 중심은 페치에서 합스부르크 군주국 남부의 카를로프치(Karlovci)로 이동하였다. 카를로프치ⅰ의 세르비아 교회는 나름의 자율성을 구가하였으며, 그 결실로 1848년에 대주교구가 신설되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정교회의 분열은 여전히 극복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정교회로 나누어져 있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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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를로프치의 독일어는 카를로비츠(Karlowitz)이며, 1699년 대투르크 전쟁을 끝낸 카를로비츠 조약(Treaty of Karlowitz)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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