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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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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사상 최강의 군대라 일컬어지는 몽골 초원의 전사들....
이들은 어떻게 그리 강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강한 사람들이 왜 그 이전에는 그렇게 멸시를 받고 살았고, 
세계를 거의 다 정복한  이후에는 백년도 못가고 몰락하여 도로 목동이 되었을까?

13세기초 몽골 기마군단이 고려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문명세계의 거의 전부를 정복했을 때 
몽골 본토의 인구는 1백만에 불과했으나 점령지의 인구는 1억이 넘었다. 중국만 일억이었다는 말도 있다.
인구가 백만이면 전쟁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자는 20만을 넘지 못한다.
어느 사회에나 있는 불평 불만자, 반대자를 모두 포함한 숫자가 이 정도이다. 
비율로 단순비교를 해보면 남한이 100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이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황당한 정복과 점령이 가능했을까?

징기스칸 이전의 몽골 초원은 징기스칸의 인생 초년기가 상징하듯이 점잖게 말해서 약육강식이고 
현실은 서로 먹고 먹히고, 뺐고 뺏기는, 그냥 도적놈들의 군집이었다.
일부 세력을 형성한 자들도 있었으나 지배자인 금나라의 이이제이의 먹이가 되어
서로 치고 받기만 할뿐 안정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처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징기스칸은 이들을 힘으로 통합한 후 모두가 공평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이상을 제시하였고 
그동안의 삶에 지쳐있던 전직 도둑놈 전사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힘을 분출할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징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한 뒤 수많은 부족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만들기 위하여 친위대를 조직하였다. 
이 친위대는 약 1만명의 장병들로 구성되었고 케식이라 불리었다. 
친위대원은 몽골의 모든 부족을 다 망라하였고 특히 부족장이나 귀족 아들들 중에서 많이 뽑았다. 
부족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오로지 징기스칸과 국가를 위해서만 충성하는 정예 부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징기스칸은 귀족들의 아들들을 이 부대로 끌어들임으로서 일종의 인질로 삼았고
이들의 마음을 얻어 충성스러운 수족으로 만들수 있었다...젊은이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에 쉽게 물드는 법이다.
이들은 통일과 정복의 과정을 거치며 몽골의 지도세력으로 성장했고...
징기스칸은 이들을 이용하여 군대를 장악할 수 있었고 권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분열의 대명사 몽골 초원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합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몽골로서는 천신이 강림하여 미소를 보여준 것이겠으나 몽골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는 저주가 뿌려진 일 이었다.

몽골군을 이야기할 때 그 장점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기동력이다.
몽골군은 일단 말이 많았다..
한 놈당 서너마리의 말을 끌고 다니며 번갈아 타면서 계속 이동하는 것이다.
이 말들에 육포같은 칼로리 높고, 무게가 가벼운 식량을 싣고, 목마르면 말젖을 먹고 가끔 말피도 빨아먹고, 식량이 떨어지면 비실대는 놈 잡아먹고 이러면서 이동하는 것이다.
졸리면 말등에서 자고, 싸는 것도 말위에서 해결하고, 먹는 것도 물론 말위에서 하고...음...
보통 10일씩 이렇게 이동했다고 하는데...에휴... 이놈들도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을 것이다.
얘들이 얼마나 빨랐냐면.. 2차대전 때 독일 기갑군대의 돌파 속도보다 빨랐다.
헝가리 정복전같은 예에서는 하루 100km라는 세계전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살인적인 이동거리와 속력에도 불구하고 전투력이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고 하니 대단하긴 대단하다.

나폴레옹에 따르면 전투력은 무장력 곱하기 기동력이라는데
몽골군의 무장력은 어땠을까?
몽골군의 개인 무장은 일단 간편하다.
유럽의 기사들처럼 지 갑옷에 말 갑옷, 무기를 합쳐 100 Kg 이상씩 장비를 갖추는 애들에 비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다.
무게는 기동력의 적이므로 갑옷도 안입는다. 
대신 솜옷을 입는데 이 솜옷의 방호력이 의외로 좋다.
솜옷은 활에 잘 안뚤리고 베어내기도 어렵다.
따라서 상대의 활이나 칼을 돌멩이나 몽둥이로 바꿔버리는 효과가 있는 셈이다
그 다음은 각궁이다.
유목민족 특유의 활인 이 각궁은 무게는 가볍고 크기가 작아 휴대하기 간편하면서도 멀리 그리고 강하게 날아간다. 명중률도 좋다.
동시대에 유럽의 족속들은 활은 비겁한 무기라고 천시해서 하층민들이나 사용하게 하고,
자신들은 큼직한 창과 칼을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활 맞아 죽을까봐 철갑옷으로 몸을 칭칭 감쌌다....멍청한 놈들..기사도 좋아하다 망한 것이다.
몽골군은? 활이 주무기였다...주구장창 활만 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다음은 지 취향대로 칼, 창,도끼, 철퇴, ..중에서 한 두개 사용했다.
하지만 이런 개인 무장에서의 우위는 별게 아니었고 진정한 우위는 몽골말이었다.
몽골의 말은 체구는 작아도 지구력이 뛰어난데 식성도 좋아 아무 풀이나 잘먹는다.
몽골 초원은 혹한 혹서가 교차하는 땅이다, 특히 고비...고비는 몽골 말로 사막이라는 뜻이다.
이 고비에서 낳고 자란 몽골말들은 튼튼하고 먹을 것도 지가 알아서 찾아먹고 혹한 혹서에도 끄떡없는 것이다.
얘들은 사막에서는 지들이 알아서 물을 찾고, 언 땅에서는 풀뿌리를 지가 찾아 먹는다.
말 먹이 까지 준비해야 하는 다른 나라의 말들과는 다르게 아주 기특한 놈들이다.
다른 나라 기병대의 말들은 매일 지 체중의 2--3%를 먹어야 하는데, 
여물만 주면 잘 안 먹어서 생초와 곡물을 섞여 먹여야 하므로 따로 말을 먹이기 위한 보급 부대가 있어야 한다. 
사람보다 훨신 많이 먹으니까 양도 무지 많다.
기병이 아무리 빨리 달리면 뭐하나? 보급 마차가 따라가야지... 쩝..
이러니 다른나라 기병의 이동 속도는 보병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기병의 최대 약점은 보급인 셈이다.
그런데 몽골말은 이 보급이 필요없고 순하기까지 해서 하루종일 물한모금 안멕이고 끌고 다녀도 찍소리도 안하고 따라온다...
또한 몽골말은 다른 말들과 다르게 겁이 없다.
다른 종의 말들은 겁이 많고 근성이 부족하여 코끼리나 낙타 같은 낯선 동물을 보면 겁을 먹어 움직일 생각을 안 하고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몽고말은 전쟁터에서는 받침대를 딛고 성벽 위로 뛰어오르며, 번뜩이는 창과 방패를 뛰어넘고,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흔들리는 배에서 배로 건너뛴다.
몽골말은 훈련도가 높아 재갈을 물리지 않아도 날뛰지 않으며, 평소에 무리지어 있어도 절대 소리를 내지 않는가 하면 전장에서는 수신호 한 번에 수 천의 말과 사람이 함께 엎드맇 수도 있었다. 
초원의 낮은 관목 뒤에 숨어 매복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병대는 몽골기병대 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인과의 친밀도도 높다.
잘 때도 같이 자고, 애지중지하는 걸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사막을 건널 때 물이 떨어지면 목에 빨때를 꼽아 피를 빨아마시는 대용 물통 취급을 받아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 먼 곳에서 버려져도 스스로 집으로 돌아온다.
베트남에서 버려진 말이 몽골로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진돗개도 아닌 것이...
아무튼 몽골의 최대의 무기는 몽골말이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정도만 가지고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전쟁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아무리 무장이 우수하고 기동력이 뛰어나도 제대로 써먹지를 못한다면?
징기스칸은 통합 이전의 부족별 구성을 타파하고 병사들을 다른 유목국가들 처럼 10명 단위로 나누고 그 열을 묶어 100, 1000, 10000명 단위의 부대를 구성하였다.
백명까지의 소대는 친족으로 구성하였고 연대(1천명)와 사단(1만명)은 반드시 각기 다른 부족 출신의 분대와 소대들로 복합 구성이 되도록 하여 부족적 분열성을 군대를 통해 융화시킴으로서 
몽골군은 전우애와 친족애를 바탕으로 동거동락하는 집단이 되었다.
이렇게 분대 소대 연대 사단 식으로 군대를 편제하면 통제 효율이 높아져서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 많아진다.
이상도 제시하였고 조직도 갖추었으면 이제 실적을 보여 주어야한다.
실적은 별게 아니다 말 안 듣는 놈 때려잡고 약탈한 물건을 공평히 나누어 주면 된다.
징기스칸은 상당히 공평한 두목이었고 충성스러운 심복이 많은 복많은 두목이었다.
약탈할 대상은 주변에 널려있었고...

몽골군이 전투를 할 때는 보통 상대의 숫자는 몽골의 서너배, 많을 때는 10배가 넘는 경우도 많았다.
말 잘 타고, 겁없는 소수의 부하를 데리고 수배의 적과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경우 전술은 뻔하다.
기습과 돌파...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가?
정찰을 통해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겁나는 속도로 이동해서 
꾸물거리는 적을 향해 냅다 활을 쐐대고는 우왕좌왕하는 적 종심을 돌파, 
패주하는 적을 쫒아가며 악착같이 죽이고 남겨진 물건을 들고 유유히 귀환..
상대가 적으면 삥둘러 싸고 활로 집중 사격하여 몰살...이게 몽골의 기본 전술이었다.
전장을 선택하고 도착해서 진지를 꾸리고 진을 구성하고 적의 행동에 따라 대응하고... 이런 한가한 정주민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인 것이다.

모든 세상 일이 그렇듯 생각대로만 일이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주민들이라고 어디 바보들만 있었겠는가?
정찰이 들키기도 하였을 것이고, 돌파도 하기 전에 역공을 받기도 하였을 것이고, 변수야 많고도 많았을 것이다.
계획한 대로 잘 안되면 몽골군은 도망간다.
말 타고 있으니 도망도 쉽다. 
도망가려면 수치스럽지 않았을까?
정주민들이야 전장을 지키며 산화하는 것이 명예요 자랑이었을런지 몰라도, 전직 도둑들은 그런 명예에서 자유롭다.
특히 몽골처럼 전사의 수가 부족한 나라에서 명예롭게 몰살을 선택하는 놈은 웬수나 다름없다.
수 틀리면 바로 도망해서 하나라도 더 살리는 부대장이 영웅이지, 가뜩이나 부족한 병사 숫자를 줄이는 놈은 역적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징기스칸도 젊어서 처자식 다버리고 도망한 역사가 있고...도망의 귀재였다.
아무튼 도망은 유목민족에는 치욕이 아닌 엄연한 전술이다.
그래서 몽골군은 불리하면 도망한다.
적이 안 쫒으면 다시 모여서 또 기습한다.
근데 또 불리하면? 또 도망...
적이 맛이가면?  돌파 또는 포위...살육...
만약에 적이 추격해오면?  뿔뿔히 흩어져서 적을 분산시킨다.
그 다음엔 다시 모여서 흩어진 적을 각개격파...
전황이 유리하면 몰살시키고
불리하면?  도망...음...
다리우스가 적은 어디에도 없었고, 어디에도 있었다고 한 말이 실감나는 전술이었다.

몽골군은 적을 몰살시키는데 심리적 저항이 없었다.
워낙에 조상대대로 그렇게 살기도 했지만 몽골의 입장에서는 적의 숫자를 줄일 필요도 있었다.
포로로 잡은들 어떻게 데려간단 말인가? 포로를 말에 태워 모셔갈 수도 없고...
이 놈들은 몽골인을 제외하고는 사람으로 생각을 안했는지 중국 점령기 때 중국의 모든 농토를 목초지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 한다.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다 죽이고..쩝...
이 황당한 계획을 저지하고 죽이는 대신에 세금을 받게 만든 사람이 야율초재라고 하는데...
별로 성공적이지는 못했나 보다...
몽골의 지배 후 금나라가 지배하던 하북의 인구는 3000만에서 1200만 가량으로 줄었고 농토는 황폐화되었다. 
남중국도 6000만에서 절반 정도 줄었다하니 그 살육이 얼마나 지독했는 지를 알 수 있다.

몽골인들은 적을 대량으로 몰살하는데 죄책감을 전혀 갖지 않았다.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몽골군의 고려 침공기에 공성을 위해 화공을 사용하였는데 불쏘시개로 준비한 석유를 다 사용하자  그다음 사용한 것이 사람 기름이었다.
이때 몽골은 포로로 잡힌 고려인을 단지 기름을 채취하기 위해 죽였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미추, 그 사람의 기능 등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불교의 승려도 예외가 아니었고...죽일 놈들...
이러한 살육에 대해 김방경이 비난을 하자 몽골의 장수는 살육은 자기들의 풍속이며 하늘의 뜻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듯하다... 에효...생각할수록 열받네....
몽골인들은 자기들이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므로
자기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다.
일종의 선민의식이다... 뭔 종교재판도 아니고...

징기스칸을 비롯한 몽골인들의 사고방식은 단순하다.
적에게는 무자비하고 자기 편에는 너그럽게 대한다.. 이다.
끝까지 저항하면 말살시키는데 특히 수뇌부는 용서가 없었다.
가장 끝까지 저항한 남송의 경우는 황족의 몰살은 물론 인구가 절반으로 주는 학살을 당했고
국민 전체가 최하층 계급으로 전락하여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그저 착취의 대상으로 살아야 했다.
고려도 항쟁을 오래해서 대접을 받고 이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고려도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음
고려는 대칸을 놓고 갈등을 벌이고 있던 시기, 재수 좋게 쿠빌라이의 편에 설 수 있었고...원종이 수고했다... 
고려왕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기 때문에 살아 남은 것이다.
그리고 쿠빌라이의 정책이 영토를 넓히기 보다는 원나라를 정점으로 조공국들을 하나로 묶는 국가간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었기에 고려는 이름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다.
삼별초가 독립의식이 남달리 투철해서 끝까지 저항한 것도 아니다.
어차피 무인 정권의 실세들은 제거될 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몽골은 그동안 기망당한 것 때문에 무인정권이라면 이를 갈았고 모처럼 권력을 되찾은 고려왕 또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무인정권의 무력기반이었던 삼별초는 이러나 저러나 탈출할 수 밖에 없었고...
얘들이 나중에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서 용병 노릇을 했다고 하는데 
가려면 처음부터 가서 어디 만만한 성이나 하나 점령하고 살 노릇이지 
서해안을 따라가며 저항하고 제주도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애꿎은 고려 병사와 백성들만 죽어나갔다.
몽골군의 삼별초 토벌 기지가 있던 전라도는 특히 심하여 여자들은 몽골군의 씨받이가 되어야 했고 남자들은 화살받이, 노역등에 끌려나가 죽어야했다.
몽골군...삼별초, 무인정권... 특히 최우...음... 유감 많다.
베트남처럼 좀 일찍 몽골하고 제대로 붙어봤으면 폼이라도 났을텐데...
지들만 살자고 강화도에만 박혀있다가 몽골군이 물러나면 세금이나 걷으러 나타나고 반항하면 죽이고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다시 방치하고 강화도로 도망가고.. 30년동안 그짓하다가 죽게되니 그제서야 저항...이런 쳐죽일 놈들..
이게 무슨 독립의식이며 저항정신인가? 그저 살자고 발버둥친거지...
이놈들 발버둥에 제주도는 몽골놈들의 목장이 되어야했고 제주도민과 더불어 전라도까지 인종청소를 당해야했다.
당시 몽골 하급군관의 고려여인 첩이 4--5명이었다 하니..쩝...한국인의 유전자와 몽골인의 유전자가 가장 유사한 이유이다...

몽골군도 처음에는 기마병만 있었기 때문에 공성전에는 서툴렀다.
그래서 성 근처에서 활이나 쏘고 주변을 노략질하고 돌아가는 것이 다였는데...
거란족의 도움과 포로들에게서 배운 기술들을 흡수하여 정복전에 써먹으며 강해졌다.
원래 지들이 야만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배우는데 부담이 없었을 것이다.
몽골군은 세계 각지에서 배운 각종 기술을 종합하여 최강의 군대가 될 수 있었다. 
보통 만인대 정도의 부대 직속으로 공성기나 화포등의 첨단 무기들을 운용하는 외인부대가 존재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몽골 병사들과 동등하거나 보다 나은 대접을 받았다 한다. 
전술 획득의 유연성 또한 몽골군의 장점이었다.
    
징기스칸은 세계제국을 만들어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를 연 사람이란 평을 듣는다. 
몽골을 통일한 뒤 50년 동안 그와 자손들이 정복하여 세운 몽골제국의 영역은 
고려, 중국, 중앙 아시아, 이란, 이라크, 러시아, 인도 북부에 걸친 약 3000만 평방킬로미터로서 지금 중국의 세 배 규모였다.
유교, 불교, 이슬람, 기독교 문명권을 다 통합했으며 서양과 동양을 하나의 역사 단위로 만들었다. 

몽골은 전쟁은 무자비하게 했지만 통치는 너그럽게 했는데  종교나 언어의 차별을 금지했고
피정복지 사람들도 세금을 잘 내고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많은 자율권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숫자는 적고, 다스려할 땅은 넓고, 다스려야 할 사람도 많고, 지들 문화역량은 보잘 것 없고,..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징기스칸과 후손들은 유럽에서 고려까지의 유라시아 지역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왔다.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의 평화와 질서 속에서 동서양의 교류와 무역이 꽃피었다. ...한 삼십년 되나?
몽골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으나 사실은 사실이다.

몽골의 대단한 성세는 그 빠른 시작처럼 그 소멸도 빨랐다.
징기스칸의 이상주의는 징기스칸의 당대에나 가능한 이상이었다.
징기스칸의 사후, 자식들의 권력투쟁으로 쿠릴타이는 무력해졌고... 이는 더 이상 몽골이 하나가 아님을 의미했다.
몽케와 쿠빌라이를 거치며 몽골은 분열되었고 각자의 상황에 따라 분화해 갔으며 
결국 적국이 되어 서로 싸워 힘을 소진시키고 각각의 적에게 패하여 
짧은 생을 마감하고 각각 초원의 목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족적은 엄청났으며 이후 몽골의 후예를 자처하는 또 다른 정복자가 나타나는 토양이 되었다.

우리 나라는 몽골 침략기와 지배기에 전국적으로 거의 인종 물갈이 수준의 겁탈을 당했으므로 
우리의 부계 혈통은 몽골의 피가 많이 섞여있다.
임진왜란이 없었으면? 몽골하고 동일 민족이라는 소리가 나올 뻔했다...에휴...
짜증나지만 그런 의미에서 몽골도 형제국이다...쩝...
몽골놈들이나 왜놈들이 산악지역은 그나마 많이 건드리지 못했다하는데...강원도와 함경도의 산악지역은 비교적 원래의 혈통을 잘 유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지역은 원래 말갈의 땅이었다...음...
한반도의 한민족은 말갈과 몽골 그리고 왜놈의 할아버지와 드라비다 할머니의 자손들인 셈이다...
민족은 혈통적 분류가 아닌 문화공동체적 분류라는 말이 백번 지당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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