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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들라크루아 :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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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은 십자가의 이름 아래 모여서 같은 기독교인을 공격한, 오욕으로 점철된 사건이었다. 

당시 기독교의 중심지이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이들은 3일 동안 잔혹한 약탈과 학살을 행한 뒤 불까지 질렀다. 

그림은 십자군이 침입한 후 대대적인 학살을 행하는 모습. 들라크루아, 1840년.



십 자군 원정 중에서도 말썽 많은 원정으로 악명 높았던 것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이다. 1198년 교황에 오른 인노켄티우스 3세는 1202년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참여를 유도하여 이집트 공략에 나서려는 교황의 의도와는 달리 고작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만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들은 놀라운 일을 계속 벌여 또다시 교황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사 실인즉 베네치아에 집결해서 원정에 나서려던 이들은 예상보다 훨씬 적은 병력이 모였고 게다가 베네치아에 지불해야 할 수송비도 조달하지 못했다. 원정에 나서지 못하는 사이 이들이 지게 된 빚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원정대에게 베네치아 당국이 기발한 제안을 했다. 그 무렵 헝가리가 점유하고 있던 ‘자라’라는 기독교 도시를 탈환해 주면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미 종교적 열의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중시하던 이들은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고, 1202년 1월 자라를 점령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교황은 격노했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일이었고, 헝가리 왕 또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주인데 그를 공격했으니 말이다. 그는 즉시 십자군 전체를 파문하는 놀라운 결정을 내리게 되니 십자군이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연이어 벌어진다. 그 무렵 동로마제국에서 추방당해 유럽에 머물고 있던 이사악 2세가 파문자들에게 또 다른 제안을 한 것이다.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자신을 황제에 오르게 해주면 이집트 원정에 필요한 재정 지원은 물론 베네치아에 진 빚도 갚아 주고 동로마 교회들마저 로마 교황청으로 귀속시키겠다는 등이 주 내용이었다. 어차피 파문당한 몸, 이들이 못할 짓이 무엇이겠는가? 이들은 즉시 말머리를 콘스탄티노플로 돌려 또 다른 기독교 국가를 향해 달렸다. 결국 이사악 2세를 황제 자리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수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1204년 4월 12일, 콘스탄티노플은 이들에게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십 자군들과 이들의 후원자이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승리의 전리품을 나누어 가진 후 콘스탄티노플 자체도 분할 통치하기로 했다. 이때 동로마제국에서는 플랑드르 백작인 보드앵이 황제로 추대되면서 라틴제국(1204~1261)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그리스정교는 가톨릭교와 합쳐지니, 이것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이 거둔 유일한 성과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 와중에도 자신들을 파면한 교황을 잊지 않고 교황을 위해 성물(聖物)과 보물을 바치자, 교황은 이들을 용서했다.


한 편 라틴제국은 비잔틴인들의 지속적인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1261년 비잔틴 성직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부활한 니케아제국과 투르크 족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니 그나마 거두었다고 자부하던 성과도 얼마 가지 못해 사라지고 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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