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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철학] 아리우스 : Ar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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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 살던 젊은 목수, 예수에 의해 창시된 기독교는 온갖 고난과 박해를 견디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마침내 로마 제국을 정복하는 기염을 토하였나,,제국의 국교로서 위엄을 떨치기도 전에 교리 논쟁의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는데,

이는 기독교의 논리가 유달리 허접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들이 가지는 일반 특성일 것이다.

예수는 처녀 생식으로 출산하였고 대천사가 친히 수태고지를 하였으며 살면서 온갖 이적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활까지 하였으므로,

기독교의 신도들은 예수를 하나님인 야훼와 동일시하여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동일한 신을 숭배하는 유태교나 이슬람교와 가장 많은 차이가 나는 점일 것이다.

결국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근본 교리였던 셈이지만 정립된 이론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알쏭달쏭하기 그지없으므로 일단 믿고 영적 체험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하는 교리였다.

믿는 자들에게는 영감이 샘솟는 신비의 원천으로서 박해받던 시기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 조직의 차별성과 조직원들의 충성심을 이끌어 내는 긍정적인 면이 많았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허무맹랑한 말장난과 다름 없었는데,

지하 묘지나 뒷골목에서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칠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주류가 되어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되자 

이 골치 아픈 교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가지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원래부터 적대적이었을 이교도들은 물론이고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 중에서도 그 논리의 취약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교도들과 종교 논쟁이라도 붙으면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궤변으로 맞서거나 일단 믿어보면 안다는 식으로 때우는 동료들이 안타까웠는지는 알수 없으나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제직에 종사하던 아리우스는 교리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고자 하였다.


그는 `예수 즉 성자는 태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므로 

창조능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세상 만물들처럼 피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 라고 주장하였다.

이슬람의 마호메드에 대한 개념과도 비슷하긴 하지만 어쨌든 모호한 삼위일체론보다는 진일보한 논리로서 훨씬 이해하기 쉬웠으나

이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아주 민감한 내용이었으므로 당장에 직속 상관인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에게 불려가 박살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달변가였다는 아리우스는 학자로서의 자존심도 센 인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굳세게 밀고 나가 수 많은 동조자를 모으게 되었다.

당시 로마는 동부와 서부가 경제적 수준이나 문화 등이 서로 달랐는데, 동부가 더 부유하였고 황제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뭐든 말로 설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지식인들도 동부에 더 많았는지 아리우스 지지자들은 주로 동부에 몰려있었다 한다.

왜 그랬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기독교를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교회의 분열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누구의 편을 들어야할지 몰랐던 그는 정치가답게 주교들 전체 회의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덕분에 제국의 전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공회의라는 새로운 제도가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325년 니케아에서 개최된 사상 첫 공회의는 삼위일체론을 올바른 교리로 확정하였으며 니케아 신조라는 것에 삽입하였는데,

교리에 대한 인식이 초라했을 게 뻔한 콘스탄티누스는 이로서 교회의 분열이 치유되고 제국의 통합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안도했을지는 모르지만,

이제 시작인 공회의의 권위는 별 볼일 없어서 아리우스의 지지율은 여전히 높았으며 통합은 요원하였다.

또한 아리우스는 황제를 설득하여 직속상관 아타나시우스를 갈리아로 추방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는데,

황제가 지조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지만, 동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제국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콘스탄티누스 입장에서는 

교리야 산으로 가든 강으로 가든 자신의 권력 기반인 동부에서 위세를 떨치는 아리우스파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사는데 여러모로 편했을 것이다..

 

336년과 337년에 아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가 잇달아 죽었으나 동부에서 아리우스의 이론은 더욱 기승을 부렸고,

교리 선생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콘스타니누스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우스 2세도 아리우스파였다고 하는데,

이 새로운 황제도 교회의 분열상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는지 공회의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서부의 중심 밀라노에서 주교들을 소집한 그는 황제의 권위를 이용하여 아리우스파의 손을 들어주려하였으나,

근본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서부의 주교들은 황제의 협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교리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

이 갈등은 결국 테오도시우스 치세에 해결되었는데,

신앙심이 각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던 테오도시우스는 

삼위일체론에 대해 강렬한 수호의지를 보이며 순교도 불사하겠다며 으르렁거리는 서부를 설득하느니,

그나마 황제에게 고분고분한 동부의 주교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쉽다고 판단했는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회의를 개최하여 니케아 공회의 결정을 재확인하였다.

지극히 정치적인 해결이었다.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의 합의는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삼위일체론을 확고한 진리로 만들었으며

이후 기독교와 기독교도들의 신앙은 물론 속인들의 역사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리고 아리우스의  이론은 배척되었다.

 

아리우스...

나름대로 교리에 합리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북아프리카 출신의 걸출한 신학자로서

졸지에 사탄의 주구가 되어 이후 역사에서 평생 그가 헌신했던 기독교와 그 신도들의 저주의 대상이 된 인물.

지옥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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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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