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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쫙-문학] 책 : 어느 시인의 아이 시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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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경림

 

 

 

 

한 아이가 있었다.

모처럼 용돈을 받은 아이는 밤새 그 돈을 꼭 쥔 채 잠을 설친다. 어서 날이 밝았으면…… 마침내 아침이 왔다. 아이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달려나간다. 골목을 빠져나가 큰길로 접어들면 저만큼 모퉁이에 이라고 쓴 입간판이 보인다. 아이의 가슴은 콩콩 뛴다. 가게 앞에서 저도 모르게 멈칫했던 아이는 숨을 크게 한번 고르고 나서야 미닫이 유리문을 드르륵 연다. 아이의 코에 확 끼쳐오는 냄새. 책의 냄새. 아찔하다. 아이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르며 몇 번이고 보아두었던 서가 쪽으로 다가간다. 까치발을 하고 높은 데까지 가까스로 손을 뻗는다. 그 순간, 아이의 눈동자가 확 커진다. 벼르고 별렀던 책 좌우로 보이는 더 화려한 책들! 아이는 금세 울상이 되고 만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꼼지락 헤아려본다. 당연히, 어림없다. 아이는 두 눈을 질끔 감는다. 그런 다음 과감하게 책을 뺀다. 셈을 치르고, 아이는 다시 달려나온다. 집으로 오는 길, 아이의 작은 가슴속에는 조금 전 느꼈던 망설임 따위는 없다. 책을 가슴에 꼭 품고 그저 달릴 뿐이다. 아이의 가슴은 이미 책을 읽고 있다. 한 장 한 장, 너무 꽉 잡으면 종이가 바스라질까봐 아이는 조심조심 책장을 넘긴다. 아아, 버들개지처럼 여린 손가락 끝에 닿는 그 무엇……

-- 김남일. . 문학동네. 20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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