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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제 11 대 문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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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휘

문종은 김 은부의 둘째 딸 원혜 왕후의 소생인데,

원혜 왕후는 언니와 함께 현종에게 시집갔으나, 결혼한 지 10여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만 비운의 여인이었다.

현종은 왕자를 둘씩이나 생산한 아내가 사망하자, 아들을 더 낳고 싶은 욕심인지 아니면 남겨진 어린 자식들에 대한 배려인지,

아직 시집 안 간 처제를 마저 입궁시켜 세 자매를 모두 취하는, 

당시로는 일반적이었으나,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변태적인 남자의 로망을 실현하였는데,

김은부의 딸들은 이상하게도 명이 짧아 남편이 죽기 전에 모두 사망하였고,

현종마저도 그간의 고생이 무색하게 불과 40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들의 자식들은 어린 나이에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아버지의 팔자를 그대로 이어받게 되어,

정치 상황에 따라서는 아버지처럼 목숨부지하기에 급급한, 가련한 신세가 될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당대에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아버지의 전우들 중에는 별다른 야심가가 없었는지,

문종의 형들은 비록 상징적인 역할에 불과했을 것이나,  각각, 16, 17 세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초창기 로마 원로원처럼 모범적인 귀족정이 구현된 시기였던 셈인데,

당대 귀족들의 인품이나 식견이 다른 시대와 다르게 유달리 뛰어났던 덕분은 ..... 아닐 것이고....

현종기 거란의 침입과 격퇴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고, 이후 지속된 거란의 위협에 대처하면서 유지 강화된 당시의 건강한 정치 문화가,

연속된 소년왕의 등극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발생할 수도 있었던 혼란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정종은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복동생에게 양위를 하였는데,

현대적 관점이라면 나라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당연한 조치로서 그렇게 안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만,

혈통을 중시하던 당시 왕가의 관행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는 남다른 형제애와 핏덩이가 등극함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염려한 정종의 우국충정이었을 수도 있고

당시 고려의 주인 격이었던 문벌 귀족들의 의지였을 수도 있으나,

뭐가 되었건 고려의 정치적 환경이 절대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하겠다.

 

어려서 부터 활쏘기와 학문을 좋아했으며, 이복형인 정종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왕실의 출납을 담당하는 내사령의 지위에 있었던 문종은

1046년, 28살이라는 딱 좋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리둥절한 얼굴로 귀족 할아버지들의 눈치만 봐야 했던 형들의 처지에 비하면,

남자로서의 신체적 능력이 최고조에 달하고, 세상 물정에 대한 식견도 상당히 갖출 수 있는 나이에 즉위하여

조정의 한 축으로 바로 기능할 수 있었으므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행운을 바탕으로 귀족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이상을 펼치게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평화기의 특권층들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죄의식 없이 전횡을 부리는 것이 일상인 바,

그동안 왕권이 미약했던 고려는 차츰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이러한 독버섯들이 자라기 좋은 토양이 되었으므로

고려의 특권층들도 예외 없이 사회에 상당한 해악을 끼치고 있었다.

따라서 의식 있는 신왕의 시선이  이들에게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 첫 번째 회초리를 맞은 것은 윤경회였다.

윤경회는 불경을 서로 돌려가며 읽는 의식으로 이게 무슨 문제일까 싶지만,

무릇 모든 행사에는 돈이 들고, 그 재원의 조달과 집행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기 쉬운 법인데,

당시에는 전국의 각 주,,,현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윤경회를 성대하게 치르는 바람에,

이 행사는 비리의 온상이자 백성들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어 있었다.

이에 왕은 윤경회 자체를 손대지는 않았지만 놀이화는 엄격히 금하였으며,

내친 김에 최 충에게 명하여 율령과 출판 그리고 결제 시스템을 손보게 하였는데,

금지의 명분은 사치와 낭비로 백성들의 부담이 크니 근검절약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라는 것이었다.

나무랄데 없는 명분이요 적절한 조치였으나, 그건 단물을 빨리던 백성들의 입장이었을 뿐이고,

꿀단지를 뺏긴 쪽에서는 아무래도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문종은​ 솔선수범하여 몸소 검소한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이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정치가 뭔 지를 아는 양반이었다.​

이듬해에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모순된 율령들을 손보았으며,

사형수들은 세 번의 심사를 거치게 하는 삼복제를 시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공정함을 추구하는 형벌 개념은, 나중에 죄수 심문 시 3명의 형관을 입회하게 하는 삼원신수법을 낳았고, 

고려를 선진적인 사법체계를 가진 나라로 만들었다.

이렇게 귀족들에게 견제구를 날림과 동시에 애민하는 왕으로서의 이미지까지 구축한 문종은

역대 ​​고려왕들의 숙원인 지방제도를 본격적으로 손보았는데,

기존 12, 절도사 제도를 폐지하고 5도호부 75도로 나누어 안무사를 배치했으며

이후 4도호부 856지주 56군사 18진장 20현령으로 다시 개편하여 지방 지배력을 높였다.

이렇게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의 권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자연스레 왕의 권위를 높이는 전략은,

왕권의 강화가 당면의 목표인 고려 왕으로서는, 탁월한 수순이요 최선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으나,

역대 언제나 왕권의 대척점에 서있던 문벌 귀족들에게는 적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문종은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하는 공음전시과를 시행하여 이들의 의구심을 달래주었는데,

공음전시과는 나중에 경정전시과로 개정되어 고려 멸망시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관리들의 봉급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이렇게 귀족들에게 당근을 물린 문종은 본격적인 애민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재면법과 답험손실법을 제정하여 천재지변 등으로 손실을 입은 농민들의 시름을 덜어주었고,

땅의 등급에 따라 세금의 차등을 두는 전품제를 도입하여 농민들의 세부담을 현격하게 줄여주었다.

온 백성들이 임금님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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