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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下)-전세역전과 전쟁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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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상황을 그린 지도.


 밀란의 개인적 야욕과 불가리아의 팽창을 막기 위한 명목이 어우러져 1885년 11월 14일(구력 11월 2일), 세르비아군이 국경을 넘어 불가리아 영내로 진격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불가리아인들이 세르비아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세르비아군은 불가리아 영내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한편 전쟁이 일어나자 오스만제국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이는 전쟁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 슬리브니차(Slivnitsa)시의 중심부. 이 지역은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의 주요 격전지였으며, 이곳에서 일어났던 슬리브니차 전투는 전세를 바꾼 중요한 전투라 할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오스만제국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남동부에 주둔한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북부의 전장으로 신속히 이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르비아군의 소피아 방면으로의 진격을 막기 위해 불가리아공(公) 알렉산드로 1세 바텐베르크는 소피아 인근 슬리브니차에서 세르비아군과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알렉산드로 1세 바텐베르크는 Guuchev 소령이 지휘하는 9개 대대와 2000명의 지원병, 그리고 32개의 포가 배치된 방어 진지를 보기 위해 16일 저녁에 도착했다. 그 진지는 슬리브니차 마을의 전방에 위치한 산마루의 주요 도로 양측에 4km 가량의 참호와 포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자의 우측은 가파른 산악 지형인 반면에 좌익은 Breznik 쪽을 향해 있는 고지였다. 불가리아군은 산악지대에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남동부의 주력군도 신속히 이동하여 슬리브니차에 위치한 불가리아군의 진지에 도착하였다. 소피아 방면으로 진격해오던 세르비아군도 같은 날에 슬리브니차에 당도하였다. 곧 전세를 바꿀 전투가 시작될 터였다.

슬리브니차 전투를 지휘하는 불가리아공(公) 바텐베르크의 알렉산드로

 

 11월 17일 아침에 세르비아군이 불가리아군을 공격하면서 전쟁의 전세를 바꿀 슬리브니차 전투(1885.11.17-11.19)가 시작되었다. 같은 날 오전 10시, 불가리아공(公)알렉산드로 세르비아군의 공세에 대한 일환으로, 우안의 3개 대대를 재편성하여 세르비아군 1개 사단을 공격하였다. 세르비아군도 이에 맞서 중앙에서로부터 공격을 시도하였고, 불가리아군이 점유하던 우안의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군의 공격으로 인해 불가리아군은 1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불가리아군의 반격으로 인해 고지를 다시 빼았기고 말았다.

 

 11월 17일에 일어난 세르비아군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세르비아군은 11월 18일 새벽, 슬리브니차에 있는 불가리아군 진지에서 취약한 부분이였던 왼쪽 측면 공격했다. 시간에 프레슬라프 연대 중 2개 대대 왼쪽 측면을 보강하려 도착하였다. 이것이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어 결국 11월 18일에 벌어진 세르비아군의 공세는 불가리아군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세르비아 영내로 진격하는 불가리아군(좌), 피로트(Pirot)를 점령한 불가리아군(우)

 

 2차례에 걸친 공세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군은 11월 19일, 모라바 사단과 합세하여 Karnul 근처에 주둔해 있던 불가리아군을 공격하려 시도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세르비아군의 3차례에 걸친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소피아 방면으로 진격하려 했던 세르비아군은 수세에 몰려 11월 24일, 자국으로 후퇴하였다. 반대로 전쟁의 주도권을 잡게 된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영내로 진격하여 11월 27일에 피로트(Pirot)를 점령하였다.

 수세에 몰린 세르비아군은 불가리아에 점령된 피로트를 포기하고 니시(Niš )로 후퇴하였다. 불가리아군이 점점 세르비아 영내로 진격해오자 오-헝 제국이 불가리아에게 세르비아 영내에서 군대를 물리지 않으면 세르비아 쪽에 붙어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압박하였다. 오-헝 제국의 압력으로 인해 불가리아군은 자국으로 철수하였다.(11월 28일) 한편, 비딘 방면의 세르비아군은 11월 29일까지 비딘을 포위하다 고국으로 철수하였다. 

 11월 29일 후에 전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은1886년 3월 3일, 브레자보 마을과 동루멜리아 지역에 대한 불가리아의 귀속을 골자로 한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은 개인적인 야욕과 명분이 어우러져 일어난 전쟁이다. 전쟁이 종결되었더라도 발칸의 국가들은 이러한 형태의 전쟁을 계속 반복하였다. 그 결과는 참혹했음이 자명했으며, 그로 인한 후유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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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에서 발생한 사망자&사상자

 세르비아군

 불가리아군

 사망자

 771명

 746명

 부상자

 4232명

 4570명

*위 글은 MAY와 마루밑다락방 사이트와의 교류협정에 의거해 작성되는 게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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