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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가리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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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년도: 1556년 또는 1558년경

장소: 가리시 마을(현 테트리츠칼로)

결과: 카르틀리의 피로스의 승리

교전국: 카르틀리 왕국 VS 페르시아

병력/사상자-카르틀리군 6천명, 3000명이 죽거나 부상당함.

              -사파비군 키질바시 기병 2만 5천명, 10000명이 죽거나 부상당함.

지휘관-카르틀리: 루사라브 1세, 시므온

        -사파비: 샤베르디 칸 지야도글루 카자르

 

 가리시 전투(გარისის ბრძოლა)는 1556년 또는 1558년경 가리시 마을에서 카르틀리왕국과 사파비 파르스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그 결과는 카르틀리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후 전개되는 사건들 -오스만제국과 사파비조의 카프카스 쟁탈전- 과 아마샤 평화조약으로 인해 형성된 카프카스의 새로운 질서¹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1555년 오스만제국과 사파비 파르스가 아마샤 평화조약을 체결한 결과 여러 충돌이 발생했다. 평화조약이 체결된 후 사카르트벨로 왕국은 두 세력권 -오스만/사파비- 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 카헤티, 카르틀리 왕국과 삼츠헤공국 동부는 사파비조에 할당되었고, 그 즉시 파르스는 사카르트벨로의 중심지인 트빌리시에 수비병을 주둔시켰다. 이는 사카르트벨로 제국諸國, 특히 파르스와 인접해있고 트빌리시를 수도로 한 카르틀리에겐 좌시할수 없는 행태로 다가왔다. 

 

 카르틀리의 루사라브 1세는 아마샤 평화조약의 조항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지속적으로 트빌리시를 공격했다. 이는 사파비조가 사카르트벨로에 대한 원정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사파비군은 카라바흐의 베일러베이, 샤베르디 칸 지야도글루 카자르Shāhverdī Khān Ziyādoghlū Qājār의 지휘하에 샤 타흐마스프 1세에 의해 징발된 키질바시 기병 2만 5천을 이끌고 1556년 또는 1558년에 카르틀리를 휩쓸었다. 루사라브와 그의 아들 시므온은 가리시에서 침략군과 조우했다. 가리시의 회전에서 카르틀리 왕국은 파르스의 키질바시 대군을 간신히 격퇴하였으나 군대를 이끌던 루사라브는 전투 도중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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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샤 평화조약 이후 카헤티, 카르틀리, 삼츠헤 동부는 사파비조의 영향 아래로, 이메레티, 구리아, 밍그렐리아, 삼츠헤 서부, 스바네티는 오스만제국의 영향권 안에 편입되었다. 즉 파르스랑 오스만제국이 영향권을 나누어 가진 카프카스 지역은 이들의 속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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