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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마루 밑 다락방 &amp;gt; 역사 &amp;gt; 세계사</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세계사 (2019-09-19 15:26:5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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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T.S 엘리엇의 생애</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18</link>
<description><![CDATA[<p><b><img src="http://maru.or.kr/data/editor/1909/33896895f8f1ca5c57f395f8b7572cfd_1568874348_0635.jpg" title="33896895f8f1ca5c57f395f8b7572cfd_1568874348_0635.jpg" alt="33896895f8f1ca5c57f395f8b7572cfd_1568874348_0635.jpg" /><br style="clear:both;" /> </b></p><p><b>토마스 스턴스 엘리엇. </b></p><p><br /></p><p>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서사시 '황무지'로 유명한 영국의 시인으로 본래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으로 귀화한 사람이다.</p><p><br /></p><p>극작가, 시인, 문학평론계 등 문학계를 주름 잡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의 대표 시 작품인 황무지는 발표를 하고 나서 영미 문학계에 큰 변화를 안겨다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p><p><br /></p><p>엘리엇은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엘리엇의 아버지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벽돌 회사의 사장으로 꽤 풍족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아머니는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였다고 한다.</p><p><br /></p><p>그가 문학을 접하게 된 시기는 14세때로 이때 이미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오마르 하이얌의 작품을 번역한 루바이야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p><p><br /></p><p>1898년 부터 1905년까지 스미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스미스에서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스미스 아카데미에서 졸업한 후 밀턴 아카데미를 다녔다. 그가 10대때 쓴 시는, 후예 하버드 대학교의 학생 잡지 &lt;The Harvard Advocate&gt; 에 실렸다고 한다. 하버즈 학생잡지에 실릴 정도면 시를 어지간히 잘 쓰긴 잘 썼나 보다. 또, 밀턴 아카데미 재학 시절 황무지를 출간하게 될 스코필드 세이어를 이때 만났다.</p><p><br /></p><p>1906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고 철학을 공부했다.</p><p><br /></p><p>1909년 3년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p><p><br /></p><p>1917년 시집 &lt;프루프록  및 그 밖의 관찰&gt;,  </p><p><br /></p><p>1922년 시 &lt;황무지&gt;를 발표했다. </p><p><br /></p><p>1927년 영국에 귀화하여 유니테리언에서 성공회로 개종했다. </p><p><br /></p><p>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p><p><br /></p><p>T.S 엘리엇은 스스로 문학은 고전주의, 정치는 왕당파, 종교는 앵글로 가톨릭 노선의 성공회라고 말했다. 엘리엇이 황무지를 발표했을 때 젊은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p><p><br /></p><p>1965년 향년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p>]]></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9-09-19T15:26:5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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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호경</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17</link>
<description><![CDATA[<p>성호경은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님과 하느님을 향해 기도할 때 십자 성호를 그으면서 외우는 기도문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기도하며 자신의 바램을 하느님과 예수님께 바친다.</p><p>짧은 기도문이지만 이 기도문에 담긴 말은 천주교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이다.</p><p>성호경을 하나씩 해석해 보자면,</p><p>성부는 성삼위 가운데 제1위격이며, 세상 만물의 창조자인 하느님을 뜻하고,</p><p>성자는 하느님의 제2위격이자, 하느님의 자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p><p>성령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3위격이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파견되어서 인간을 성부께서 이끄시는 하느님의 영을 말한다.</p><p>여기서 성삼위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거룩한 세 위격인데, 이것은 곧 성호경에 나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의미한다.</p><p>또한, 삼위일체라 함은 천주교의 4대 교리중에 하나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뜻으로 세 위격이 완전하게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한 신성을 이룬다는 뜻이다. </p><p> </p>
<div class="content_move">[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9-09-19 11:13:00 한국사에서 이동 됨]</div>]]></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6-10-26T10:21:3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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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의미</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16</link>
<description><![CDATA[<p>보통 사람들에게 불교하면 떠오르는 것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거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많이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주문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p><p>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인도어로 &lt;돌아가다&gt; 라는 뜻으로 나무아미타불은 즉, 아미타불에게 돌아가다 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좀더 쉽게 말하면 어려운 일이 있거나 마음이 몹시 힘들 때 아미타불에게 가서는 아미타불에게 의지한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p><p>그리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원하고 나면 관세음보살이라고 염원하며 주문이 끝이 나는데 이 관세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불교의 보살으로서 본레 산스크리트로 아바로키테슈바라 라고 불리며 중국에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관세음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져 내려왔고 관음보살이라는 약칭으로도 불리기도 하다.</p><p>&lt;법화경&gt;의 보문품을 읽어보면 '관음'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해탈시켜 준다 라고 적혀 있어서</p><p>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가면 몹시 힘든 마음도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 그 힘듦을 보살피고 중생이 의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p><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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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6-10-26T10:15:1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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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전도서</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15</link>
<description><![CDATA[<p>전도서는 구약 성서라고 한다. 보통 구약 성서는 유대교의 경전 (타나크) 이다.</p><p>구약 성서의 종류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는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등으로 성문서에서는 두루마리 5권으로 또 나뉜다.</p><p> </p><p>일부에서는 전도서를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말하기도 하다. 매우 난해한 내용이기도 하면서 뭔소리인지 모르고 읽으면 이해가 안될 내용이기도 하다. 사실 필자도 전도서는 잘 모른다.</p><p> </p><p>하지만 전도서 구절 중에서 3장 1절 부터 8절과 1장 4절을 읽어보면 시대를 초월하여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희망과 위안이 되어 주는 내용이 있다. 무려 2천여 년 전에 씌어진 내용이지만, 탄생의 경이로움 부터 죽음의 심오함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도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글들이 적혀 있다.</p><p> </p><p>이 구절에는 예로부터 결혼식, 장례식, 졸업식, 생일, 잔치, 종교 의식에서 수없이 인용되었고,</p><p>노래와 책과 연극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였다.</p><p> </p><p>저자는 솔로몬이라고 하나, 사실 누가 썼고 편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p><p> </p><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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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6-07-04T20:50:1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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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링크 스크랩] 브라질 인사법</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14</link>
<description><![CDATA[<p><a href="http://music.naver.com/musicianLeague/contents/index.nhn?contentId=23073" rel="nofollow"><span style="line-height:1.5;"></span>http://music.naver.com/musicianLeague/contents/index.nhn?contentId=23073<span style="line-height:1.5;">​</span></a></p><p><span style="line-height:1.5;"> </span></p><p>네이버 메인은 잘 보지는 않는데, 할게 없어서 끄적끄적이나 하고 있을 때, 브라질 뽀뽀 인사법이라면서 올라와가지고.. 한번 봤는데 재미있는 인사법 같아요! </p><p>별 다르게 글 쓸거는 없는거 같고.. 뽀뽀 인사라고 해서 입술을 대고 키스하는게 아니고.. 양쪽 볼에 서로가 대고 뽀뽀할때 '쪽쪽' 소리만 내는거라네요. 되게 재미있어서 링크 스크랩 해왔습니다.</p><p><span style="line-height:1.5;">​</span></p><p>브라질 언어로 인사하는 방법도 있는거 같은데 익숙하지 않아서 벌써 다 까먹음 @.@;</p><p> </p>
<div class="content_move">[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9-09-19 11:11:59 세계사자료에서 이동 됨]</div>]]></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6-02-22T17:09:5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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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몬테네그로-오스만 전쟁</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13</link>
<description><![CDATA[<p><a class="image" href="https://sr.wikipedia.org/wiki/%D0%94%D0%B0%D1%82%D0%BE%D1%82%D0%B5%D0%BA%D0%B0:Vucji_Do_flag.jpg"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tyle="width:300px;height:264px;" alt="Vucji Do flag"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a/Vucji_Do_flag.jpg" /></a></p><p><strong>전쟁 당시 츠르나고라군의 군기</strong> </p><p> </p><p> 츠르나 고라-오스만 전쟁(<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Црногорско-турски рат)은 1876~78년 오스만제국과 몬테네그로 공국 사이에 발발한 전쟁으로 츠르나 고라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다. 크게 보면 대 오스만 전쟁(1876~1878)의 일부라 할 수 있다.¹</span></span></p><p><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span></span></p><p><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 헤르체고비나에서 오스만제국에 대항하는 반란과 봉기들이 연달아 발생하자,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야는 1876년 6월 18일 대오스만 선전포고에 합의했고 전쟁은 시작되었다. 츠르나 고라는 헤르체고비나인들과 동맹을 맺어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하였다. 니콜라 공의 몬테네그로군은 부치도 전투를 기점으로 1877년 알바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접경지역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큰 규모의 전투를 치루었다. 그 해 말부터 반격에 나선 몬테네그로는 바르, 닉시치 등을 비롯한 인근 지역을 공략하였다.</span></span></p><p><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span></span> </p><p><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 1878년 1월 30일 에디르네 조약과 같은해 3월의 산 스테파노 조약은 전쟁의 종결을 뜻했다. 산 스테파노 조약의 결과,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세르비아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비록 베를린 조약(1878.7)에서 영토와 세력의 변화가 있었지만, 몬테네그로의 영토는 기존의4,405km²에서 9,475km²로 늘어났으며, 해안지대와 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하였다. </span></span></p><p><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span></span></p><p><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 2년을 끌어온 전쟁은 몬테네그로 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주교군주정 때²부터 갈망했던-사바를 제외한 블라디카들은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위해 유럽 각국에 지지를 요청하며 오스만 중앙에 반기를 들지 않았던가- 독립이 이루어졌다. 둘째, 고토인 해안부를 수복함으로써 바다와 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5세기 중엽 몬테네그로 지역을 지배한 츠르노예비치 가문이 오스만제국에 항전하고자 해안에서 산중의 체티네로 피란하였다. 이후 해안은 오스만의 영토였는데, 3~400년 만에 몬테네그로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span></span></p><p> </p><p>--------------------------------------------------------</p><p><span style="font-size:7pt;">1.</span><span style="font-size:7pt;"> 1876년~78년 사이의 '전쟁'을 대 오스만 전쟁이라 칭하였다.  전쟁에서 러시아라는 외세의 간섭이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 이면 속에 1876년부터 시작된 발칸 제 민족(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의 독립투쟁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러시아만이 전쟁의 주인공이 아니며, 기존의 러시아-투르크 전쟁이란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7pt;">​</span></p><p><span style="font-size:7pt;">2. 1696년 몬테네그로인, 정확히 말해 현 몬테네그로 지역에 살고 있었던 여러 부족들이 대투르크 전쟁으로 오스만의 힘이 소진된 사이 반란을 일으켜 다닐로 1세를 수반으로 한 주교군주정을 수립했다. 하지만, 말이 주교군주정이지 그 형태를 만든 주체가 부족들이었기 때문에 주교공(주교군주정의 최고 수반)의 권력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제정일치의 주교군주 체제라 해서 주교공이 모든 권한을 진다 함은 착각이다.</span></p>
<div class="content_move">[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9-09-19 11:11:59 세계사자료에서 이동 됨]</div>]]></description>
<dc:creator>피아스트</dc:creator>
<dc:date>2015-12-01T17:47:5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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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드라마] 중국판 퍼시픽 《중국원정군(中國遠征軍)》</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1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size:11pt;color:rgb(102,102,102);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line-height:2;">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말레이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로 진격합니다. 그나마 필리핀에서 맥아더의 미국-필리핀 연합군이 어느 정도 효과적인 지연 작전을 펼쳤을 뿐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변변한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연전연패의 연속이었습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사실 이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가면 일본은 이미 독일과 추축동맹을 체결한데다 1941년 초부터 미국과 극심한 갈등을 빚는 등, 연합군의 입장에서 일본과의 전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일본의 공격이 시작되자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 호주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루즈벨트와 마셜, 스팀슨 등 최고 참모들에게 돌려야 할 것입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개전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필리핀, 괌, 웨이크 등 최일선에 대한 방어선을 전반적으로 강화하지도, 그렇다고 이 지역을 과감하게 포기하지도 않은 채 전략적으로 애매모호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span><span style="font-size:11pt;">대비는 게을리하였습니다. 또한 </span><span style="font-size:11pt;">태평양에서 연합군간의 상호 협력 체계를 구축하지도 않았으며 이른바 "오렌지 계획(War Plan Orange)"으로 불린 미국의 전쟁 계획은 20여년 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오렌지 계획에서 태평양함대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지만 일본 해군에 의해 파괴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대비책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은 19세기 이래 뿌리깊은 유색 인종에 대한 멸시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일본의 군사역량과 모험심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격이 시작되자 태평양의 연합군은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전의를 상실하였고 태반이 싸우지도 않고 백기를 들었습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이미 일본과 5년 째 전쟁 중이었던 <span style="font-size:11pt;">중국은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는 훌륭한 동맹국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절실히 원하는 무기와 군수품을 대량으로 제공하여 공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왔다면 전황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당장의 국내 여론과 의회 내 고립주의자들에 지나치게 신경쓴 나머지, 플라잉 타이거스의 창설과 100여대의 구식 전투기를 우회적으로 지원한 것이 전부였고 진주만 기습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분명 </span></span><span style="font-size:11pt;">루즈벨트는 강력한 리더쉽과 추진력을 갖추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정치가였지만 막상 국가 전략의 세부 방침에서는 우유부단하고 근시안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이 점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적이 단지 나치 독일에서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 냉전을 열게 한 후에도 </span><span style="font-size:11pt;">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상황은 지난 6월에 출간된 에드워드 밀러의 《오렌지전쟁계획》이 훌륭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말레이를 손쉽게 점령한 일본은 다음 목표로 영국령 미얀마를 노립니다. 중국 동부 해안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일본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미얀마는 중국의 마지막 남은 대외 원조 통로였기에 미얀마를 점령한다면 중국은 완전히 외부로부터 고립될 판이었습니다. 서쪽은 티베트 고원이, 북쪽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사막이 가로막고 있었고 철도도 없는데다 교통도 너무 불편하여 원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일본은 </span><span style="font-size:11pt;">중립국이었던 태국을 협박하여 군사통행권을 획득하고 추축동맹에 강제로 가입시킨 다음 일본군 제15군이 1942년 1월 16일 본격적으로 미얀마를 침공합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연합군은 중국-미얀마-인도를 묶어서 중국전구로 편성하고 장제스를 최고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또한 영국과 협의하여 미얀마를 공동으로 방위하는 &lt;전면(滇緬, 윈난성-미얀마) 공동방어 협정&gt;를 1941년 12월 23일 체결합니다. </span><span style="font-size:11pt;">하지만 이는 형식적일 뿐, 평소 중국인을 철저하게 멸시했던 처칠은 실질적인 협력을 거부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미얀마를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며 인도로 철수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는 명백한 협정 위반이죠.</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영국의 비협조 아래에서도 장제스는 미얀마 방위​를 돕기 위해 파병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중국 근대 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인 중국 원정군이었습니다. 병력은 3개군 9개 사단 10만명에 달했고 중국군 유일의 기계화 보병사단인 제200사단과 신편 22사단, 신편 38사단 등 최정예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칠의 비협조로 이들은 적절한 시기에 들어가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처칠은 일본군이 랭군까지 밀고 들어온 뒤에야 마지못해 중국군의 미얀마 진입을 허용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영국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고 있었고 일본의 후원을 받는 미얀마의 독립 세력들은 도처에서 봉기하고 있었습니다. 중국군은 익숙치 못한 기후와 정글과 싸우면서 식량과 연료도 부족한 상태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합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1942년 3월 19일 미얀마 남부의 작은 마을 타웅우(Toungoo)에서 제200사단은 일본군 선발부대 1개 대대를 전멸시켜 첫 승리를 거두었고 30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제55사단에게 큰 타격을 입히며 질서있게 퇴각하였습니다. 중국쪽 자료에 따르면, 12일에 걸친 전투에서 중국군 손실은 2천여명에 일본군의 사상자는 5천여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과장된 느낌이기는 하나, 중국군이 상당히 선전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span><span style="font-size:11pt;">또한 신편 제38사단도 예난자웅(Yenangyaung)에서 일본군 제33사단에게 포위된 영국군 버마 제1군단을 구원하여 인도까지 성공적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연합군 사령부와 서방 언론들도 태평양전쟁 초반 막강한 일본군의 공세 앞에 연전연패하는 상황에서 중국군이 가장 잘 싸웠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하지만 제1차 미얀마 원정에서 중국은 전 병력의 70%를 상실하고 제200사단장 다이안란(戴安瀾)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귀환에 실패한 병사들의 유골이 길을 하얗게 뒤덮었다. 많은 곳을 글자 그대로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현지에서 총지휘를 맡았던 스틸웰 역시 극소수의 참모들만 데리고 적의 추격을 피해 정글을 헤치며 인도로 후퇴했고 기자들 앞에서 "지옥에서의 탈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땅에 떨어진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미얀마 탈환 작전을 추진하여 인도에서 중국군을 재편성한 후 1943년 10월부터 반격에 나섭니다. 하지만 일본군 제18사단의 저항에 막혀 지지부진하고 무다구치의 제15군이 인도 임팔을 침공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자,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윈난성 쿤밍에서 훈련중이던 중국군 제11집단군과 제20집단군 등 15개 사단을 미얀마로 투입합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웨이리황이 지휘하는 제2차 중국원정군은 1944년 5월 11일 전서(滇西) 반격 작전을 발동하여 노강(怒江)을 건너 일본군 제2사단과 제49사단, 제56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span><span style="font-size:11pt;">결국 일본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1945년 1월 27일 망우(芒友)에서 주인도 중국군(中國駐印軍, X군)과 중국원정군(Y군)이 만나면서 미얀마 전역에서 승리합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미얀마 전역에서 일본군은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방어전을 펼쳤으며 연합군은 우세한 전력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일본이 미얀마를 정복하는데는 고작 3개월이 걸렸지만 연합군이 완전히 탈환하는데는 거의 2년이 걸렸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영국이 미국, 중국과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방어전을 펼쳤다면 미얀마 전역의 향방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며 중국 전선의 상황 또한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 style="font-size:11pt;"><span style="font-size:11pt;"><img src="http://blogfiles.naver.net/20151028_101/atena02_1446011169586WfgF1_JPEG/6195378_orig.jpg" style="border:none rgb(0,0,0);width:550px;height:527px;" alt="6195378_orig.jpg" /></span></span> </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중국원정군》은 2011년에 미얀마 작전 70주년 기념으로 중국에서 제작하여 장시TV에서 방영한 총 45편짜리 대하 전쟁 드라마입니다. 임시수도였던 충칭과 윈난성 남부 마을 텅총(騰沖), 미얀마를 무대로 </span><span style="font-size:11pt;">1942년 처음 미얀마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시작하여 1945년까지 태평양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역 중의 하나였던 미얀마 전역을 중국인의 관점에서 재조명합니다. 주인공 한소공(황즈중 분)은 제200사단 상교(대령) 참모로, 그 외에도 </span><span style="font-size:11pt;">장제스와 스틸웰과 같은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며 미얀마 전역에서 벌어진 주요 역사적 전투를 다룹니다.</span></p><p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16.8px;"><span style="font-size:11pt;"></span><span style="font-size:11pt;"></span> </p><p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16.8px;"> </p><p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내용을 질질 끄는 듯한 느낌에다, 주인공의 일상과 멜로까지 다루다보니 다소 지루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전투 장면은 밴드오브브라더스나 퍼시픽만큼은 아니라도 중국 드라마치고는 비교적 사실적이며 고증도 상당히 훌륭합니다. 또한 당시의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 상황이나 연합군의 알력 다툼에 대해서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고증 개무시에 엉터리 저예산 전쟁 드라마보다 훨씬 낫다는. 돈 아낀다고 아예 중요한 전투 장면을 스킵하는 것이 보통이고...--;;; 또는 전쟁을 가장한 멜로물이라거나.<font size="2"> </font></span></p><p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16.8px;"> </p><p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미얀마에 처음 들어온 중국군 병사들이 맨발에 짚신을 신고 있는 것을 영국군이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자신들의 군화를 주지만 이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평생 가죽 군화를 신어본 적이 없는 그들로서는 오히려 짚신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폼은 나지 않지만. 사실 일본군도 청일전쟁에서 서구식의 가죽 군화를 보급하지만 발이 맞지 않아 심한 고생을 했고 이 때문에 일부 군의관들은 도로 짚신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span></p><p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 style="font-size:11pt;"></span></span> </p><p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그러나 인도에서 재편되면서 중국군도 후반부에서는 독일제 철모 대신, 미군이나 영국군의 철모를 쓰고 짚신 대신 가죽 군화를 신고 싸웁니다. 철수하는 영국군과 교체하여 진지에 중국의 청천백일 깃발을 올리면서 조국을 대표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이역만리에 싸우러 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 영국군과 미군과의 갈등 등 어차피 남의 나라 역사인지라 우리에게 그대로 감정이입 되기는 어렵지만 꽤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span></p><p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 style="font-size:11pt;"></span></span> </p><p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16.8px;"> </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 style="font-size:11pt;"><img src="http://blogfiles.naver.net/20151028_103/atena02_1446011048564nyjcp_JPEG/imagesCAVRHFSQ.jpg" style="border:1px solid rgb(0,0,0);width:400px;height:266px;" alt="imagesCAVRHFSQ.jpg" /></span></span><span style="font-size:11pt;"><br style="clear:both;" /><br style="clear:both;" /><img src="http://blogfiles.naver.net/20151028_23/atena02_1446011170505tBPH9_JPEG/201121311835552.jpg" style="border:1px solid rgb(0,0,0);width:600px;height:392px;" alt="201121311835552.jpg" /><br style="clear:both;" /><br style="clear:both;" /><img src="http://blogfiles.naver.net/20151028_188/atena02_14460111707249IWtD_JPEG/2011021216000797373932.jpg" style="border:1px solid rgb(0,0,0);width:500px;height:332px;" alt="2011021216000797373932.jpg" />​</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얼마 전 중국 정부는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전승절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하면서 팔로군만이 아니라 그동안 박해당했던 국민정부군 투항병 출신 노병들을 초청하고 롄잔 국민당 전총재가 개인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span><span style="font-size:11pt;">양안의 해빙 무드와 중일전쟁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기존의 팔로군 중심 항일 투쟁만을 강조하고 국민정부군은 패주하기 급급했다는 식의 편향되고 일방적인</span><span style="font-size:11pt;"> 대륙 사관에서 점차 벗어나 국민정부군의 정면 항전을 재조명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추세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중국원정군》은 그들에게는 의미있는 역사 드라마이며, 방영 당시 1980년대 이후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높은 시청률을 누리기도 했습니다.</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보시기 바랍니다. </span><span style="font-size:11pt;">그런데 이제 한 4편 정도 봤는데 45편을 언제 다 볼라나...</span></p><p align="left" style="list-style:non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color:rgb(102,102,102);line-height:2;"><span style="font-size:11pt;">​</span></p><p><span style="font-size:11pt;color:rgb(102,102,102);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line-height:2;">중국원정군 보기 </span></p><p><font color="#666666" face="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span style="font-size:14.6667px;line-height:29.3333px;">[https://youtu.be/N5pNMi3X9mI</span></font><span style="font-size:14.6667px;line-height:29.3333px;color:rgb(102,102,102);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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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5-10-31T11:01:4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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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공유]사르 쉴레이만 파샤(Sarı Süleyman Paşa)</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10</link>
<description><![CDATA[<p> 사르 쉴레이만 파샤(세르보크로아트어:<span lang="sh" xml:lang="sh">Sari Sulejman-pasa; ?~1687.10.14)는 1685년 11월 18일부터 1687년 9월 18일까지 오스만제국의 재상을 지냈다. 그는 모하치 전투(1687)에서 오스만제국군을 패배시켜서 사형당했다. 참고로 터키어이자 그의 별칭이기도 한 'Sarı(<em>사르)</em>'는 '금발의'라는 뜻이다.</span></p><p><span lang="sh" xml:lang="sh"> </span></p><p><span lang="sh" xml:lang="sh"><strong>유년시절</strong></span></p><p><span lang="sh" xml:lang="sh"> 그는 보스니아 에야레트의 타쉴르카(현 세르비아 프리예폴례)에서 태어났다. 오스만제국의 대재상 아흐메드 쾨프륄뤼(Ahmed Koprulu)파샤 밑에 있었고 이후 술탄의 거마(車馬)관리인이 되었다.</span></p><p><span lang="sh" xml:lang="sh"> </span></p><p><span lang="sh" xml:lang="sh"><strong>오스만 제국의 재상</strong></span></p><p><span lang="sh" xml:lang="sh"> 사르 쉴레이만 파샤가 오스만제국의 재상에 임명된 뒤(1685), 그는 즉각 크림한국의 칸과 티마쇼아라, 세케슈페헤르바르와 오시예크의 파샤에게 심한 피해를 입은 헝가리의 오스만제국 군대를 재편성하고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는 부다 전투(1686) 중의 일이었다. 사르 쉴레이만 파샤는 부다의 포위를 풀기 위해 몇번의 시도를 했지만 부다는 결국 로렌 공작, 샤를 5세에게 함락되었다. 이후 오스만제국은 헝가리 중부에 위치한 세케슈페헤르바르도 상실했다.</span></p><p><span lang="sh" xml:lang="sh"> </span></p><p><span lang="sh" xml:lang="sh"> 상황이 그렇게 되자 쉴레이만 파샤는 잔존한 그의 군대를 유지하도록 지시했으며, 메흐메트 아가로 하여금 구텐타크(<span lang="de" xml:lang="de">Guttentag)의 요한 헤이슬러와 함께 평화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span></span></p><p><span lang="sh" xml:lang="sh"><span lang="de" xml:lang="de"><br /></span></span><span lang="sh" xml:lang="sh"><span lang="de" xml:lang="de"> 1687년 9월,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배하자 군대는 재상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쉴레이만 파샤는 반란을 두려워해 자신이 죽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그는 베오그라드를 거쳐 이스탄불로 달아났다. 소식을 들은 메흐메트 4세는 사르 쉴레이만을 파면하고 아바자 시야부슈 파샤를 군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직에 앉혔으며 그는 결국 새로이 재상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르 쉴레이만 파샤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로부터 2달 후, 술탄 메흐메트 4세는 모하치 전투의 패배를 이유로 폐위되었으며 황위는 그의 형제인 무스타파 2세가 차지하게 되었다.</span></span></p><p><span lang="sh" xml:lang="sh"><span lang="de" xml:lang="de">----------------------------------------------</span></span></p><p><span lang="sh" xml:lang="sh"><span lang="de" xml:lang="de">결론:대투르크 전쟁 도중에 오스만제국의 재상으로 임명되었지만 잇다른 전투(1686년 부다, 1687년 모하치)에서의 패배로 카라 무스타파처럼 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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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피아스트</dc:creator>
<dc:date>2015-08-18T16:42: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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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공유]쉬코드라 파샬루크(Pashalik of Shkodra)</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9</link>
<description><![CDATA[<p><strong><span style="font-size:11pt;">개요</span></strong></p><p>현 슈치퍼리아와 츠르나 고라의 일부로 쉬코드라 도시 주변부에 위치했고, 슈치퍼리아계 부샤티 가문이 이전의 산자크(sanjak,군)였던 쉬코드라를 쉬블림포르트에 대해 반독립적인 파샬리크(속주), 즉 파샤가 관할하는 지역으로 변형하였다. 전성기에 해당되는 카라 마흐무드 파샤 시기의 쉬코드라 파샬리크는 알바니아와 코소보의 대부분과 서(西)마케도니아, 평지 츠르나고라까지 관할 하에 두고 있었다.</p><p> </p><p><a title="Flag of Scutari" class="image" href="https://en.wikipedia.org/wiki/File:Flag_of_Mahmut_pasha_Bushatli_-_1796.png"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tyle="width:125px;height:124px;"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0/04/Flag_of_Mahmut_pasha_Bushatli_-_1796.png/125px-Flag_of_Mahmut_pasha_Bushatli_-_1796.png" alt="125px-Flag_of_Mahmut_pasha_Bushatli_-_1796.png" /></a></p><p><strong>쉬코드라 파샬루크의 문장, 확실히 문장만 봐도 반독립적이라는 것이 몰씬 느껴진다.</strong></p><p> </p><p><strong><span style="font-size:11pt;">배경</span></strong></p><p> 16세기 이후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온 오스만제국의 중앙 권력의 약화와 티마르(timar, 군사봉토)제도는 슈치퍼리아 지역의 무정부 상태를 잉태했다. 18세기 중후반 즈음엔 쉬코드라의 부샤티 가문과 요안니나의 알리 파샤로 대표되는-두 세력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필요에 따라 협력하면서 쉬블림포르트<span style="font-size:8pt;">⑴</span>에 대항하였다.</p><p> </p><p><strong><span style="font-size:11pt;">역사</span></strong></p><p> 1757년 메흐메트 부샤티는 두 경쟁 가문과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을 숙청한 뒤 쉬코드라의 파샤라 칭하였으며, 1479년 오스마니예에 의해 신설된 쉬코드라 산자크를 반독립적인 파샬루크로 변형하였다. 베네치아 선박을 통해 아랍과 베르베르 해적을 진압한 그는 이스탄불 정부의 인정을 받았다. </p><p> </p><p><a class="image" href="https://sq.wikipedia.org/w/index.php?title=Skeda:Simon_Rrota_Portret_i_Kara_Mahmut_Pash%C3%ABs.jpg&amp;filetimestamp=20101016115143&amp;"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tyle="width:216px;height:300px;"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sq/e/e3/Simon_Rrota_Portret_i_Kara_Mahmut_Pash%C3%ABs.jpg" alt="Simon_Rrota_Portret_i_Kara_Mahmut_Pash%C3%ABs.jpg" /></a></p><p><strong> 쉬코드라 파샬루크의 3번째 파샤,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 권모술수에 능했으며 군사적 재능이 있었던 듯 하다.</strong></p><p> </p><p> 메흐메트 부샤티의 자식이며 쉬코드라의 3번째 파샤인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는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슈치퍼리아 남부와 코소보까지 세를 확장하였다. 또한 츠르나 고라에 대한 두차례의 군사원정(1785, 1796)과 베네치아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시도하였으며, 간혹 쉬코드라의 독자행동을 견제하려 한 오스마니예의 진압군을 잇다라 격퇴하였다. 베네치아의 토지는 그에게 공물-하라즈(haraj)를, 1785년 이후 츠르나고라의 부족들 역시 공물을 바쳤다. 카라 파샤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쉬블림포르트와 동맹을 맺는 대가로 그 자신을 전 슈치퍼리아의 지배자로 인식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 스스로 이러한 게 향후 불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던지 충성의 표시로 합스부르크가 보낸 밀사의 목을 오스마니예 술탄에게 바쳤으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카라 파샤는 오스만제국에 의해 쉬코드라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p><p> </p><p>  1796년 카라 마흐무드 파샤는 츠르나 고라에 대해 두번째 원정을 실시했지만 되려 체티네 인근 크루시에서 츠르나 고라와 알바니아 가톨릭 부족들에 패배하였으며 전투에서 사망한 그의 두개골은 체티네 거리에 전시되었다. 카라 파샤의 사후 쉬코드라 파샬리크의 자율성은 감소되었고, 후계자 이브라힘은 1810년에 사망할 때까지 쉬블림포르트에 협력하였다. 이브라힘 부샤티는 루멜리아에 베일러베이(대군정관)를 임명했으며,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앞장섰다.</p><p> </p><p> 부샤티가(家)의 쉬코드라 파샬리크 통치는 1831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라시드 파샤가 페티흐 성을 포위했고, 쉬코드라의 마지막 파샤, 무스타파 부샤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종결되었다. 이후에도 부샤티 가문의 파샬리크가 누렸던 자율성을 되찾기 위해 쉬코드라에서 1833~1836년 사이에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이들의 자치권 혹은 반독립적 자율권은 더욱 발전되어 1912년 슈치퍼리아의 독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p><p> </p><p><strong><span style="font-size:11pt;">쉬코드라 파샬리크의 역대 파샤</span></strong></p><p>1. 메흐메트 부샤티(1757-1774)</p><p>2. 무스타파 부샤티(1774-1778)</p><p>3.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1778-1796)</p><p>4. 이브라힘 부샤티(1796-1810)</p><p>5. 무스타파 부샤티(1810-1831)</p><p> </p><p>----------------------------------------------------------</p><p><span style="font-size:8pt;">p.s)오스만제국의 행정체계는 에야레트(eyalet, 주)-산자크(sanjak, 군)-카자(kaza, 면)-쾨이(Köy-동)의 서열으로 구분된다. 에야레트와 비슷한 뜻을 지닌 용어로는 파샬리크(속주)와 빌리예트가 있다. 여담으로, 여기에 나와 있는 '츠르나 고라'는 몬테네그로를, '슈치퍼리아'는 알바니아, '오스마니예'는 오스만을 지칭한다. 사실 '제국'을 터키어로 하려 했더니 귀차니즘이 몰려와 그것까진 고유명으로 표기하지 않았다. <strike>이럴때 이로운 귀차니즘</strike></span></p><p><span style="font-size:8pt;"> </span></p><p><span style="font-size:8pt;">1. 쉬블림포르트(<font size="2"><span style="font-size:8pt;">Sublime Porte)</span></font>는 보통 오스만 제국정부를 지칭한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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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피아스트</dc:creator>
<dc:date>2015-07-27T17:19:2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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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공유]다닐로 1세(Данило I Шћепчевић)</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8</link>
<description><![CDATA[<p><br /><a class="image" href="https://en.wikipedia.org/wiki/File:Danilo_%C5%A0%C4%8Dep%C4%87evi%C4%87,_The_Mountain_Wreath.jpg"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tyle="width:245px;height:314px;" alt="Danilo"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9/Danilo_%C5%A0%C4%8Dep%C4%87evi%C4%87%2C_The_Mountain_Wreath.jpg/250px-Danilo_%C5%A0%C4%8Dep%C4%87evi%C4%87%2C_The_Mountain_Wreath.jpg" /></a></p><p> 다닐로 스체브체비치(스르비야 키릴문자:<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Данило Шћепчевић, </span></span>1670~1735. 1. 11)는 1696년부터 1735년 사망할 때까지 체티네의 대주교로 있었으며, '세르비아의 통치자<em>(vojevodič srpskoj zemlji)</em>' 로 불리어진다.</p><p> </p><p><strong>유년시절</strong></p><p> 다닐로 스체브체비치는 녜고쉬(njegos) 마을에서 헤라코비치족 출신인 부친 스테판과 모친 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성씨는 스체브체비치(Шћепчевић)였지만, 만년에 접어들면서 페트로비치(Петровић)를 썼었다고 한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다닐로가 출생한 녜고슈 마을과 그가 말년에 쓰던 성씨 '페트로비치'가 결합되어 '페트로비치-네고슈(petrovic-njegos)가 된 듯 싶다. 이 페트로비치-네고슈 가문은 1696년부터 1918년까지 츠르나 고라를 통치하였다.</p><p> </p><p> <strong>주교군주로 등극하다.</strong></p><p> 1696년 대투르크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이 벽지 몬테네그로에 신경쓸 여럭이 사라지자, 몬테네그로의 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성공하여 부족들은 회의에서 다닐로 스체브체비치를 체티네 대주교 겸 세속의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이후 다닐로 본인이 '페트로비치 가문 출신이 정치/교회의 수장을 맏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주교군주정의 틀이 형성되었다. 주교군주(vladika, <em>블라디카</em>) 직은 페트로비치-네고슈 가문이 1852년 폐지될 때까지 맡게 된다. </p><p> </p><p> 그가 츠르나 고라의 주교군주로 등극했을 시기에 세르비아 정교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일찍이 페치의 총대주교 아르센니예 3세가 대규모의 세르비아인들을 이끌고 합스부르크 군주국령 카를로비츠로 망명하였다. 이후 총대주교직은 칼리니크 1세가 이어받는데, 그렇게 되자 세르비아 정교회에 속해 있던 체티네 대주교구는 곧 '망명교회' 쪽으로 기울었다. 1700년에 다닐로 1세는 페치의 종교회의에 불참한 대신 합스부르크 군주국령 헝가리 남부 카를로비츠의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새로이 세르비아 교회의 중심지가 된 카를로프치의 아르센니예 3세(<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Арсеније III)</span></span>에게 츠르나 고라 지역의 대주교로 공식 인정받았다.  </p><p> </p><p> <strong>재위기간</strong></p><p> 주교군주로 즉위한 다닐로의 치세 초기에 특기할 만할 사건이 170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닐로가 자신의 위협세력인 츠르나고라 내의 이슬람교도를 학살한 사건이다(몬테네그로 저녁예배사건). 이 외에도 부족사회에 근접했던 츠르나고라 내부의 분쟁을 해결했으며, 오스만 제국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였다. 1711년 헤르체고비나인과 제휴한 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오스만은 츠르나 고라 영내로 침략했으나, 1712년 차레블라츠에서 패전을 면치 못했다. 오스만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츠르나 고라에 침략하여 1714년 수도 체티네(Цетиње)까지 함락시키는 등의 기염을 토해냈다. 이때 체티네의 수도원들이 전소되는 참화를 겪었다.</p><p> </p><p> 1715년 다닐로는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를 만나 처음으로 몬테네그로-러시아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후 그는 오스만 제국에게서 제타를 회복했고, 이전의 침략으로 인해 파괴된 체티네의 수도원을 복구하였다. 또한 자신의 여름 별장인 부드바의 포도스토로그-포마이네 수도원(1630년에 건축됨)을 요새화하였다. 여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조 역시 한몫하였고(체티네 재건), 그 대신 베네치아는 코트르 만의 사용권과 포교권의 자유를 획득하였다(1718.5) </p><p> </p><p> 츠르나고라 주교군주국은 세습제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부자세습이 아닌 친척세습(親戚世襲)의 형태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페트로비치 가문이 정치와 교회의 수장을 맡지만, 주교군주(主敎君主)는 결혼이 불가능하며 자식을 가질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닐로 1세 페트로비치-네고슈는 자신의 후계자로 바실리예와 사바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최종적으로 사바를 자신의 후계자로 채택했다. 다닐로는 사바에게 주교군주로써의 덕목을 갖추도록 하였고, 1735년 그의 여름 별장인 포드마이네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뒤를 이어 사바 페트로비치(<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Сава Петровић)가 주교군주로 등극하였다. <strike>.</strike></span></span></p><p><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strike></strike></span></span> </p><p><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span></span></p><p><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 style="font-size:8pt;">P,S) 츠르나고라는 1696년-1878년까지 반독립 자치 상태로 있었으며 1852년까지 신정체제, 그 이후는 세속화된 체제라 할 수 있다.</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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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피아스트</dc:creator>
<dc:date>2015-07-24T17:45:2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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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공유]유튜브 동영상: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7</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oIRCitmvZT4" alt="oIRCitmvZT4" /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p> </p><p>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1878년 베를린조약 때문이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의 국경을 그들 스스로가 맺게 하는 것이 아닌, 열강이 발칸의 국경선을 확정했으니, 발칸 제국(諸國)의 불만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심했던 데가 불가리아로,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인해 얻은 마케도니아, 동루멜리아 일대를 손에 넣었으나 베를린조약으로 인해 오스만제국에 할양해야 했다. 이러한 국경선의 변동은 향후 일어날 전쟁을 잉태하고 있었다.</p><p> </p><p> 1885년 9월 오스만제국의 자치령 동루멜리아에서 대다수를 점하는 불가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9월 16일 동루멜리아는 불가리아에 합병되었다. 오-헝 제국의 사주를 받은 세르비아의 국왕, 밀란 1세는 이런 불가리아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지나친 친오정책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 있자 이를 만회할 목적으로 11월 14일 불가리아 내로 침략하였다. 세르비아군 6만 명은 비딘 방면과 소피아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각지에서 빠른 기동력을 살려 북쪽의 전장으로 올라온 불가리아군의 완강한 방어와 유격전이 세르비아의 발목을 잡았으며, 11월 17일부터 19일까지 일어난 슬리브니차 전투는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세 차례에 걸친 세르비아군의 공세는 실패로 끝났으며, 많은 손실을 입은 세르비아군은 본국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방면으로 진격하여 11월 28일 세르비아의 국경도시, 피로트를 점령하였으며 세르비아군은 피로트에서 좀 더 위쪽에 있는 니시로 퇴각하였다. 이때 오-헝제국이 불가리아에게 세르비아 영내로 깊숙히 진격할 시 개입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로 있다가 다음해 3월 3일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p><p> </p><p>--------------</p><p><span style="font-size:8pt;">1</span><span style="font-size:8pt;"><span style="font-size:8pt;">. </span>실질적인 전쟁 기간(11.14-11.28)동안 비딘 방면의 세르비아군은 불가리아군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span></p><p><span style="font-size:8pt;">2. 참고로 전쟁 당시 불가리아는 제정러시아의 간섭 하에 있었다. 당시 불가리아공(公) 바텐부르크의 알렉산다르는 이를 견제하려 했으나 되려 러시아의 사주를 받은 친러파에 의해 1886년 공위(公位)에서 쫒겨남.</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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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피아스트</dc:creator>
<dc:date>2015-07-24T14:42:0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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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공유]오스만제국 지배기 세르비아 정교회</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6</link>
<description><![CDATA[<p><br />1459년 세르비아 전제공국이 멸망한 이후 세르비아의 지배자로 떠오른 오스만제국은 세르비아 지역을 파샬루크(pashaluk, 속주)로 개편하였다. 이 시기에 일부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지배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본연의 신앙-정교회을 고수하였다. 그에 반면, 신앙을 장려하고 유지시켜나가야 할 세르비아 정교회는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2세가 사망한 이후 후계자가 선출되지 않았다.사실상 세르비아 정교회의 맥은 끊겼으며 오스만제국 내의 정교회들을 관장하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종속되었다.</p><p> </p><p><a class="image" href="https://en.wikipedia.org/wiki/File:Patriarchate_of_Pe%C4%87_in_the_16th_and_17th_century.png"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tyle="width:200px;height:236px;"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0/04/Patriarchate_of_Pe%C4%87_in_the_16th_and_17th_century.png/200px-Patriarchate_of_Pe%C4%87_in_the_16th_and_17th_century.png" alt="200px-Patriarchate_of_Pe%C4%87_in_the_16th_and_17th_century.png" /></a></p><p><strong>16-17세기 당시 세르비아 총대주교구의 관할구역</strong></p><p> </p><p>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에 종속된 세르비아 정교회는 1557년 메흐메트 파샤 소콜로비치의 중재로, 술레이만 대제에 의해 독립적 교회로 복원되었다. 총대주교는 이전처럼 페치(Peć)에 기거했으며, 복원된 세르비아 정교회의 초대 총대주교는 소콜로비치의 인척관계인 마카리예 소콜로비치(<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Макарије Соколовић)</span></span>가 선출되었다. 세르비아 총대주교의 복원은 이후 제국 내의 세르비아인들의 정신적 통일을 촉진하였다.</p><p> </p><p> 하지만 오스만제국 정부는 교회가 잇다른 세르비아인의 봉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1766년 페치의 총대주교구를 폐지하였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구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후 세르비아 정교회는 1879년 세르비아가 독립한 이듬해에야 독립자치교회가 될 수 있었다. 1766년 이후 세르비아 정교회는 세르비아인들의 영적 지도자로써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으며, 그리스계 파나리오트들이 주요 요직을 독점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strike>두나브 공국의 파나리오트들도 그렇고, 세르비아의 파나리오트들도 그렇고..이들 중 대다수는 탐욕에 어두운 존재다.</strike></p><p> </p><p><a class="image" href="https://en.wikipedia.org/wiki/File:Serbmigra.jpg"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tyle="width:250px;height:167px;"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en/thumb/4/48/Serbmigra.jpg/250px-Serbmigra.jpg" alt="250px-Serbmigra.jpg" /></a></p><p><strong>17세기 말~18세기 초반에 일어난 '세르비아인들의 대이동' 당시 합스부르크 군주국으로 망명하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아르세니예 3세(<span lang="sr" xml:lang="sr"><span class="Unicode">Арсеније III)</span></span></strong></p><p> </p><p>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발칸반도의 크리스트교인들은 오스만제국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돌아오는 것은 가혹한 처우 뿐이었으며, 그를 피하고자 이들은 이슬람(순니)교로 개종하였다. 일련의 세르비아인들은 그러한 처우를 피하고자 합스부르크 군주국(Habsburgermonarchie)으로 망명하였고 자연스레 세르비아 정교회의 중심은 페치에서 합스부르크 군주국 남부의 카를로프치(<span class="hps atn">Karlovci)</span>로 이동하였다. 카를로프치ⅰ의 세르비아 교회는 나름의 자율성을 구가하였으며, 그 결실로 1848년에 대주교구가 신설되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정교회의 분열은 여전히 극복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정교회로 나누어져 있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었다. </p><p>--------------------------</p><p><span style="font-size:8pt;">1. 카를로프치의 독일어는 카를로비츠(Karlowitz)이며, 1699년 대투르크 전쟁을 끝낸 카를로비츠 조약(Treaty of Karlowitz)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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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피아스트</dc:creator>
<dc:date>2015-07-23T14:49:0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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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정안국</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5</link>
<description><![CDATA[<p>정안국은 938년 서경압록부를 수도로 발해 귀족 출신 열만화를 주도로 세운 국가이다.</p><p> </p><p>원래 정안국에 세워지기 전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동란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워 발해 유민들을 통치했다. </p><p>(그런데 동란국이라는 괴뢰국가가 거란의 내부 사정으로 랴오양으로 옮겨가니, 발해의 옛 지역은 발해의 태자인 대광현에 의해 다스려 지게 되었는데, 남경 남해부 출신의 발해 귀죽이였던 열만화는 대광현의 삼촌이자 발해의 마지막 왕이였던 대인선의 동생을 도와 발해 태자 대광현을 몰아내고 후발해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934년에는 발해 태자 대광현이 무리 수 만 명을 이끌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순하였다는데 이때 후발해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p><p>아무튼 어쨌든  938년, 열만화라는 인물이 나타나, (건국 시점이 애매모호한게 928년이라는 말이 있고 935년이라는 말도 있다.) </p><p>서경압록부 (상경 용천부라는 설도 있다.) 근처에 정안국이라는 국가를 건국하고 거란에 맞서 발해를 부흥하고자 하였다. 또한 제 2대 왕인 오현명은 원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오현명 왕 때에 이르러 정안국은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두 차례에 걸친 거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멸망 시점은 대체적으로 986년으로 보고 있으나, 이후 발해 유민들의 저항과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지속되었다.</p><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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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5-07-22T17:41:0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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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공유]권재일 氏의 '체코.슬로바키아사'</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4</link>
<description><![CDATA[<p> </p><p><a class="N=a:bil.image,i:98000001_00000000000000000087A865" target="_blank" rel="noreferrer noopener"><img style="border-color:rgb(0,0,0);width:129px;height:190px;" alt="체코" src="http://bookthumb.phinf.naver.net/cover/088/904/08890469.jpg?type=m140&amp;udate=20150716" /></a></p><p>(표지출처:네이버북스)</p><p>저자: 권재일</p><p>출판사: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p><p> </p><div class="review_point2"> 나는 동유럽을 좋아하고, 그곳 역사/문화 역시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부족한 것이 많다. 사실 체코와 슬로바키아 민족의 역사에 문외한이라 다름없는 나는 해당 지역(혹은 국가)에 대해 입문하고, 일종의 '지식'을 쌓고자 1주일동안 틈틈히 시간을 내어 책을 열심히 읽었고, 어렵게나마 그 내용을 습득할수 있었다.</div><p> </p><p> 권재일 氏가 출판한 '체코.슬로바키아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국가의 역사/문화 등의 전반적인 것들을 한 권으로 모아 총정리한 책이다. 한국외대에서 동유럽 관련 분야를 전공하셨고, 지금도 그와 관련하여 연구 중이라고 하신다. 그러한 동유럽 전공자의 책을 읽으니 어려움이 많다고 해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국가의 역사랑 문화, 각 시대별 사회 모습들을 어느 정도 감을 잡게 해주어서 입문하는 데에 있어 도움이 되었다. </p><p> </p><p> 하지만 이 책이 주는 단점은 없잖아 있다. 지금은 책을 어느정도 읽었다고 말할수 있겠지만, 읽을 때만 해도 두 국가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담어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대(大)모라비아 제국 이후로 서로의 문화/역사 등을 교류했던 체코와 슬로바키아 역사를 개별적으로 구분하였고, 세부적으로 고대/중세/근대 시기와 비슷히 구분하여 혼동하기가 쉬었다. 인명과 지명은 몇몇 들어본 단어(스메타나,얀 후스, 얀 지슈카 등등)가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들이다. 그에 대한 예시로 '인드르지흐, 쿠트나호라, 메토뎨이, 포뎨브라디..'등을 들 수 있는데, 이 부족한 글을 읽고 나서 책을 구매해 읽어 보신다 한다면 생소해서 처음에 뭐가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다. </p><p> </p><p>이 외에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각 시대별 문화를 읽는 데에도 역시 어려움이 컷다. 그 중에도 당대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빛낸 위인들이 저술하고 만든 잡지/책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냥 한번에 정리하여 'A라는 위인은 슬라브 언어학의 창시자이고 향후 체코 민족에 어떠어떠한 영향을 주었다' 라는 식으로 서술했으면 이해하기 보다 쉬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한국은 아직 동유럽에 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고, 관련 연구가 아직까진 부족한 편이기에 간략서술을 우선시하고 그 다음엔 '구체서술'단계로 진입하여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으면 더욱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p><p> </p><p> 마지막으로, 이 책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국가의 전반적 배경을 한 권으로 담아내었고 적어도 1주일동안 열심히 읽어본다면 어렵게라도 그에 해당하는 지식(?)을 어느정도 습득할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두 국가의 전반적 양식을 한국 내에서 최초로 다루어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동유럽의 전반적 형태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기를 바라며, 일반 대중에게 동유럽 국가들이 친숙히 다가갈수 있게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p><p> </p><table class="tag_n_id tag_list_area" cellspacing="0"><tbody><tr><td class="tagarea"><div class="tag m-tcol-c"><div><a class="tag_item m-tcol-t" href="http://cafe.naver.com/CafeTagArticleList.nhn?search.clubId=27638815&amp;search.tagName=%C3%BC%C4%DA" rel="nofollow"><span><font color="#ffffff">#</font></span><font color="#ffffff">체코<span class="bg_tx"></span></font></a>  <a class="tag_item m-tcol-t" href="http://cafe.naver.com/CafeTagArticleList.nhn?search.clubId=27638815&amp;search.tagName=%BD%BD%B7%CE%B9%D9%C5%B0%BE%C6" rel="nofollow"><span><font color="#ffffff">#</font></span><font color="#ffffff">슬로바키아<span class="bg_tx"></span></font></a>  <a class="tag_item m-tcol-t" href="http://cafe.naver.com/CafeTagArticleList.nhn?search.clubId=27638815&amp;search.tagName=%B4%EB%B8%F0%B6%F3%BA%F1%BE%C6" rel="nofollow"><span><font color="#ffffff">#</font></span><font color="#ffffff">대모라비아<span class="bg_tx"></span></font></a>  <a class="tag_item m-tcol-t" href="http://cafe.naver.com/CafeTagArticleList.nhn?search.clubId=27638815&amp;search.tagName=%C7%D1%B1%B9%BF%DC%B4%EB" rel="nofollow"></a></div></div></td></tr></tbody></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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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피아스트</dc:creator>
<dc:date>2015-07-22T07:33:0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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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유리, 인류의 문명과 과학을 이끌다</title>
<link>https://www.maru.or.kr/worldhistory/1</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font-family:'1003773_9';font-size:9pt;"><p><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오늘날 우리는 많은 유리들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당신은 어쩌면 아침에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을 보며 용모를 단정히 했을 것이고 '유리로 만들어진' 잔에 물을 부어 목을 축였을 것이며, '유리가 있는' 텔레비전 뉴스를 잠시 시청하다가 '유리가 있는' 휴대전화를 보며 출근했을 것이며,  지금 '유리로 만들어진' 창이 무수히 많은 회사에서 '유리로 만들어진' 시계를 보며 퇴근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우리와 유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리에 대하여 다식하다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리의 기원에 관하여 세계 최초의 백과전서로 평가받는,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의 '박물지(博物誌)'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천연소다를 무역하는 페니키아의 상선이 지중해 연안 강 하구에 이르러 식사 때가 되어서 취사 준비를 하고자 했으나 주위는 모래사장이고 솥을 걸 재료가 없었으므로 자기들 배에 적재한 소다덩어리를 받침으로 하여 솥을 걸고 불을 붙여서 취사를 하는데, 불길이 세짐에 따라서 소다가 모래와 융합하여 처음 보는 반투명의 액체가 몇 줄기 흘러내려왔다. 이것이 유리의 기원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그러나 제 1,2차 세계대전 전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시작되면서 유리의 기원에 대해 다시 의문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유리 구슬과 유리 용기 등 매우 많은 유리 유물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현재 가장 오래된 유리는 BC 2500년경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든 유리구슬로 알려져 있으며 BC 2000년 전에는 유리 덩어리를 깎아 만든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유리 그릇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재 아직까지도 유리의 기원설을 두고 메소포타미아 기원설과 이집트 기원설이 첨예한 대립을 세우고 있으나 대개 메소포타미아 기원설에 많이 기울어진 상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 align="center"><img width="433" height="583" style="width:433px;height:583px;" src="http://cafefiles.naver.net/20150720_20/jua01005_1437357886285lcHEQ_PNG/%C5%F5%C5%C1%C4%AB%B8%E0.PNG" alt="%C5%F5%C5%C1%C4%AB%B8%E0.PNG" /></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1922년 이집트 왕가의 계곡 투탕카멘(?~?, 재위기간: BC1361~1352) 무덤에서 발견된 </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칠보 장식 황금 가슴받이-</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여기서 칠보(七寶)는 금속의 산화물을 착색재로 사용하여 투명 또는 불투명한 유리 질의 유약(釉薬)을 구리, 청동, 금, 은, 도자기, 유리 등의 바탕에 구워 붙인 장식물을 뜻한다(네이버 백과사전 참조))</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과 헬레니즘 문화의 도래로 알렉산드리아 유리 제조의 중심지로 부각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장인들은 이른바 모자이크 유리(비잔틴 유리)라고 알려진 기술을 완성했는데, 여러 색깔을 가진 유리 막대기을 가열하여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서 서로 엮어 다양한 장식을 내는 기법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유리와 같은 창이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img width="490" height="490" style="width:490px;height:490px;" src="http://cafefiles.naver.net/20150720_106/jua01005_1437360396869tnvGA_PNG/%B8%F0%C0%DA%C0%CC%C5%A9%B1%B8%BD%BD.PNG" alt="%B8%F0%C0%DA%C0%CC%C5%A9%B1%B8%BD%BD.PNG" /></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모자이크 유리 구슬-</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한편, BC 1세기 무렵 시리아의 장인들은 속이 비어 있는 대롱의 끝자락에 유리를 부풀려 용기를 만드는 방법을 터득했다. 유리 제작 역사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라 불리는, 일명 우리가 대롱 불기 기법이라고 부르는 블로잉 기법의 발견이었다.  이 기법으로 유리의 형태를 자신이 바라는 모양으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기법은 워낙 단순하여 순식간에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 되었고 이 기법으로 이제 유리 용기는 상류층이 사용하는 고급품이 아닌 일반 백성들의 식기나 저장 용기로 상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유리 제조의 중심은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유럽 로마로 옮겨졌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유리 제품을 흔히 '로만 글라스(Roman Glass)라고 부르는데, 전국시대부터 유리 제작을 시작한 중국은 이를 도입하여 유리 공예를 발전시켰다. 즉, 로만 글라스는 동서 무역 교류의 중요한 교역품으로써 광할한 유라시아 전역에 널리 보급된 것이다. </span><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또 로마인들은 두 가지 색상의 유리를 겹쳐 위쪽 유리는 깎고 아랫쪽 유리의 색으로 문양을 내는, 이른바 카메오 유리를 완성했다. </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그런데도 우리는 유리 공예라 말하면 베네치아라는 이탈리아의 도시를 떠올린다.우리가 흔히 베네치아유리(무라노 유리)라고 불리는 유리 제품은 우수한 기술과 신선한 디자인 덕분에 근세 유럽 유리 공예를 주도했기 때문인데, 베네치아 석호로부터 약 1.5km 떨어져있는 무라노라는 섬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유럽에서는 유리 제조 기술이 약 3세기 초반부터 1000년 동안 쇠퇴를 맞이하게 되나 비잔티움제국은 로마제국의 유리 제조 기법을 전승하고 있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게 점령되자 이때 비잔티움제국에 있던 유리 공예 장인들이 베네치아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291년, 유리 제조 공장에 화재가 잦게 발생하자 베네치아 총독은 안전 사고 방지와 함께 유리 산업을 보호, 육성하고 기법 유출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유리 공장과 유리 제조 장인들을 무라노 섬에 강제로 이주시켰던 것이다. 이때 건설된 공장이 무라노 섬에는 아직 남아있다. 이후 무라노 유리 제조인 안젤로 바로비에는 산화칼륨과 망간이 많은 해초를 불에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융해된 유리에 첨가하여 세칭 '크리스탈로'를 발명해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 이 크리스탈로 글라스로 인하여 수출 무역이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16세기에 이르러서는 투명 유리에 색채를 입히는 기법과 유리 원료에 금속 물질로 생긴 원시 유리의 자연적 희부연 색깔을 제거하는 기법도 터득했으며 도금과 에나멜을 입히는 기법까지 알아냈다. 이런 기법은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졌는데, 이것을 어기면 극형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의 유리 공예 장인들은 탈출하여 제노바 인근 알타레에 많이 정착하여 알타레 유리를 만들었고, 이때문에 비밀로 부쳐졌던 비법들이 알려지기 시작해 16세기부터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 네덜란드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베네치아 유리를 모방한 베네치아 풍을 뜻하는 불어 파송 드 베니스를 생산해 냈다. 이후 18세기까지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명성을 계속 누렸지만 보헤미아와의 경쟁에서 밀려 유리 제조의 명성을 어느 정도 잃게 되었다. 사실 베네치아 글라스의 핵심은 투명도에 있었는데 보헤미아 글라스는 베네치아 글라스보더 더욱 투명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이후부터 구형 제품 이외에 별도의 제품은 거의 만들지 않았다.  </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1pt;"><img width="469" height="459" style="width:469px;height:459px;" src="http://cafefiles.naver.net/20150720_49/jua01005_1437365910961xBFol_PNG/%BA%A3%B3%D7%C4%A1%BE%C6%B1%DB%B6%F3%BD%BA.PNG" alt="%BA%A3%B3%D7%C4%A1%BE%C6%B1%DB%B6%F3%BD%BA.PNG" /></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이탈리아의 명물, 베네치아 글라스(출처: 네이버)-</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1pt;"></span><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1pt;"><img width="332" height="502" style="width:332px;height:502px;" src="http://cafefiles.naver.net/20150720_256/jua01005_1437367414071d9AjN_PNG/%C4%B8%C3%B3.PNG" alt="%C4%B8%C3%B3.PNG" /></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보헤미아 글라스(소장: 체코국립박물관)-</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1836년 무렵에 제작한 요세프 융만에게 헌정한 잔으로 보헤미아 글라스 가운데 명품의 하나로 꼽힌다)</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size:11pt;"></span><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span> </p><p align="left"><span style="font-size:11pt;"></span><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한편, 17세기까지  잉글랜드는 베네치아의 전통을 따라 유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1675년 경 조지 레이븐즈크로프트가 베네치아 유리에 산화납을 첨가하면 더욱 단단하고 무거운 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광채와 투명함, 고굴절성을 특징으로 하는 플린트 유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훌륭한 식기용 유리가 되었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일부 유리 제조업자들은 색을 넣거나 깎아서 장식을 한 제품보다 유리 자체가 가진 본래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양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가 창안한 파브릴 유리는 유연한 모양과 빛나는 포면으로 크게 찬사를 받았고, 특히 중부 유럽의 유리 제조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span></p><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1pt;"></span><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size:11pt;"></span><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2pt;"> </span></p></div><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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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태조대왕</dc:creator>
<dc:date>2015-07-21T21:08:5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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