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channel>
<title>마루 밑 다락방 &amp;gt; 역사 &amp;gt; 역사일반</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역사일반 (2021-06-03 15:44:43)</description>

<item>
<title>삼국시대 회의제도</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81</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answer_contents" style="font-size:15px;font-family:'바탕체';background-color:rgb(255,255,255);"><strong>1.신라의 화백회의</strong><br /><br /><strong>신라 화백회의는 진골귀족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대등(大等)들로 구성되었으며,<br />그 의장인 상대등(上大等)은 법흥왕 18년(531)에 처음 설치되었다</strong> . 화백회의는 상대등의<br />주관으로 '네 곳의 신령한 땅'이라는 의미의 사령지(四靈地)에서 돌아가면서 개최되었다.<br />청송산·오지산·피전·금강산이 그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평소 국가의 중대사를<br /><strong>만장일치로 의결하는 것이 원칙이었고</strong>, 왕위 계승권자가 애매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br />비상시에는 <strong>왕위 계승권자를 선출하기도</strong> 하였다.<br /><br /><br /><strong>2.백제의 정사암회의</strong><br /><br />정사암은 국정을 논하거나 재상을 선출할 때에 이용하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br />사비(부여) 부근의 <strong>호암사(虎巖寺)에 정사암이란 바위가</strong> 있어, 이 곳에서 국정을 논하는 회의와<br />특히 재상을 선정할 때 당선 자격자 3, 4명의 이름을 봉함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br />펴 보아 이름 위에 인적(印跡)이 있는 자를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br />이렇듯 <strong>유독 바위 위에서 회의를 하거나 재상을 선출했다는 점은 당시의 사회가 신의를<br />중시했다는 일면을 추측할 수 있다</strong>.<br /><br /><br /><strong>3.고구려의 제가회의</strong><br /><br />고구려의 귀족들이 모여 국사를 논의하던 최고의 귀족회의체이다. 5부체제가 유지되던<br />고구려 초기에는 왕권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각 부의 책임자인 가(加)들이 모여<br /><strong>제가회의를 구성해서 왕위계승·대외전쟁·외교문제, 그밖의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결정했다</strong>.<br />초기에는 <strong>국왕이 제가회의의 의장 역할을 했으나, 점차 국상(國相)이 이를 대신했다</strong><div class="autosourcing-stub-saved"><p style="margin-top:11px;margin-bottom:7px;font-family:Dotum;font-size:12px;"><strong style="padding:0px 7px 0px 0px;"></strong></p></div></div><p style="font-family:'바탕체';background-color:rgb(255,255,255);">삼국은 귀족연합적인 정치 성격때문에 고유의 회의제도를 갖고 있었는데,</p><p style="font-family:'바탕체';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color:rgb(58,50,195);">신라는 화백(和白)제도, 백제는 정사암(政事巖), 고구려는 제가회의(諸加會議)를 두고 있었다.</span></p><p style="font-family:'바탕체';background-color:rgb(255,255,255);">삼국시대 회의제도들은 부족연맹시대 씨족 또는 족장회의가 발전한 형태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국가가 성립된 뒤 국왕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함께 모여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는 회의기구로 발전하게 되었다.<br /><br />먼저, 신라의 화랑 제도는 왕권의 강화와 군사력 증대를 위한 통치 도구였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하고나서 전쟁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신라는 내부적으로 왕실의 권위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이란 시급한 과제에 직면하였다.<br /><br /><span style="color:rgb(58,50,195);">화백제도의 경우, 귀족들의 단결심과 집단체제의 강화를 위해서, 또한 왕권과 귀족간의 권력균형을 위해서 만장일치 제도가 이용되었다.<br /><br />귀족들의 힘이 왕권보다 강하면 이러한 회의에서의 결정은 왕권을 무력화시켰다. 분점된 권력이냐 집중된 권력이냐에 따라서 회의의 성격이 달랐다.<br /><br /><br />그러나 백제의 정사암(政事巖), 고구려는 제가회의(諸加會議)는 기록이없어 만장일치제인지는 확인할수 없는데 화백회의 처럼 만장일치제가 아닌가 추측만 할뿐입니다</span>.</p>]]></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21-06-03T15:44:43+09:00</dc:date>
</item>


<item>
<title>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80</link>
<description><![CDATA[<p><strong style="font-family:'바탕체';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font-size:13.5pt;color:rgb(33,107,156);">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br /> </span></strong></p><div style="font-size:15px;font-family:'바탕체';background-color:rgb(255,255,255);margin-top:4px;margin-right:9px;margin-left:9px;"><div align="justify"><span><span><span style="color:#00008B;"><strong>‘우리 민족’ 개념을 고대사에 투영해 ‘통일신라’를 부정하는 남과 북… 당시 정세에서 동족은 누구고 외세는 누구였는가</strong></span></span></span><p>▣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 한국학</p><p>남북한이 분단돼 서로 많이 이질화됐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고대사를 보는 시선에서는 오히려 서로 가까워지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 통일’ 내지 ‘통일신라’와 같은 용어에 대한 입장이 그렇다. 분단 초기에는 지리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북한과, 영남의 경제·정치적 역량을 고려해 신라 계승을 암묵적으로 주장한 남한이 각자 신라 통일의 문제를 자기 쪽에 유리한 방식으로 다르게 설명했다.</p><p><b>1980년대 좌파 민족주의의 영향</b></p><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10" align="right" style="margin:0px;padding:0px;"><tbody><tr><td rowspan="5" width="7" style="margin:0px;padding:0px;"><img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img.hani.co.kr%2Fsection-image%2Fblank.gif%22&amp;type=cafe_wa740" class="article_img ATTACH_IMAGE" width="7" height="1" alt="" style="border:0px;vertical-align:bottom;" /></td><td style="margin:0px;padding:0px;"><img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img.hani.co.kr%2Fsection-kisa%2F2008%2F07%2F16%2F02116300012008071657_1.jpg%22&amp;type=cafe_wa740" class="article_img ATTACH_IMAGE" alt="" style="border:0px;vertical-align:bottom;" /><br /><p style="margin-top:10px;"><span style="color:rgb(33,105,156);">△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영정. 백제가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외세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상황에서 김춘추가 당나라와의 동맹에 올인한 것을 비난만 해야 할까. (사진/ 선현의 표준영정)<br clear="all" /></span> </p></td></tr></tbody></table><p>북한에서는 이미 1956년판 &lt;조선통사&gt;에서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의 정복”이라고 서술했다. 그때만 해도 적어도 정복 이후 신라가 거느린 삼국 인민의 “당나라 침략자를 반대한 투쟁”을 좋게 봐주는 등 신라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대접’을 해주었지만, 1970년대 이후 ‘신라 통치배’들을 보는 시선이 싸늘해졌다. 1991년판 &lt;조선통사&gt;는 “저들의 영토 야욕을 채우려고 외래 침략세력을 끌어들인 신라 봉건 통치배”들을 엄준히 필주(筆誅)하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강성대국 발해의 정통성”을 강조할 뿐이다. “반민족적 신라 통치배”를 비난하는 이 목소리는 물론 남한이 미국이란 외세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북한의 비난과 맞닿아 있지만, 실제로 남한에서도 신라 통일에 대한 시선은 가면 갈수록 부정적인 쪽으로 바뀌어가기만 한다.</p><p>1950년대에야 이선근(1905∼83) 같은 관학자들이 “삼국을 통일시킨 화랑정신”과 “김유신 장군의 위업”을 찬양하고 이병도(1896∼1989) 같은 학계 원로도 “고구려 영토 대부분의 상실”을 ‘유감’으로 처리하되 “우리 민족이 대동강 이남에서 단일 정부 밑의 단일 국민이 된 것이 다행”(&lt;한국사 고대편&gt;, 1959)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견해는 특히 좌파 민족주의가 힘을 얻었던 1980년대에 비판을 받아 통념으로서의 위치를 잃었다. 소장파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한국역사연구회의 &lt;한국역사&gt;(1992)는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긴 하되 그 통일의 불완전함과 ‘남북국 시대’라는 그 다음 시대의 성격을 강조했다. 그 뒤를 이어 좌파 민족주의적 경향의 중진 학자인 김영하 교수(성균관대)는 당나라의 한반도 경략에 발맞추어 외세와의 공조로 백제만을 겨우 정복한 신라에는 “통일을 완수할 힘도 의도도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고 ‘통일신라 시대’ 대신에 ‘신라와 발해’ 내지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의 사용을 적극 주장했다(1993).</p><p>이 영향으로 한영우 교수(서울대)와 같은 보수적 원로도 ‘통일신라’ 대신 ‘후기 신라’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등(&lt;다시 찾은 우리 역사&gt;, 1997) 남한에서도 통일신라론은 용도폐기의 위기에 빠졌다. 특히 2000년 이후 고구려·발해에 대한 의식을 첨예화시킨 중국과의 ‘역사 전쟁’ 속에서 신라의 “반민족적 외세 끌어들이기”와 “만주 영토의 상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일반화됐다. 즉, 고조선사나 근·현대사에서는 남북한 사이의 공동된 역사 인식 만들기가 아직도 요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김유신·김춘추에 대한 비판과 을지문덕, 연개소문, 대조영 등에 대한 찬양에는 남북한 가릴 것 없이 대다수 한반도 주민들이 의견을 같이할 듯하다.</p><p>남북한을 초월한 이와 같은 ‘합의’가 왜 가능하게 됐는가? 여기엔 남북한이 공유하는 종족적 민족주의의 모태라 할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 사학의 시각이 뒷받침됐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김춘추”를 가리켜 “역사의 죄인”이라 단죄하고, “단군 이후로는 우리 민족의 모든 영토를 제대로 통일시킨 사람은 아직 없없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러한 결론을 내린 이유는, 무엇보다 “만주라는 우리의 고토(故土)와 한반도”를 모두 한 나라로 만든 국왕이 단군 왕조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의식 때문이었다(&lt;독사신론&gt;, 1908).</p><p>안확 등 신라에 후한 점수를 주려는 민족주의적 사학자도 있었지만, 단재와 같은 유형의 김춘추 비판을 계속 이어나간 학자들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예컨대 한국 민속학의 원조이기도 한 손진태(1900∼50)는 김유신이나 김춘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민족과 연맹하는 것이 민족적으로 최대의 죄악이다. 신라가 그렇게 한 것은 귀족 국가의 비민족적 본질 때문이다”라며 “외세와 손잡은 신라”를 비난했다(&lt;한국민족사개론&gt;, 1948).</p><p><b>당나라와의 동맹이 없었다면…</b></p><p>신라 지배자들의 ‘반민족적 행동’을 통렬히 비판하는 신채호나 손진태의 목소리는, 친일파에 대한 비판으로 현재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친일파에 대한 비판이야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동질화된 한인(韓人)이라는 종족적 집단의 모습을 1500년 전 과거로 투영해 삼국의 싸움을 ‘동족상잔’으로, 그리고 당나라와의 연합을 꾀했던 신라의 행동을 ‘형제에 대한 배신’으로 각각 이해하려는 태도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p><p>사실 수나라나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신라를 반민족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전근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근대적인 시각이다. 신라 본위주의적으로 쓰인 &lt;삼국사기&gt;는 물론이고 &lt;삼국유사&gt;와 같은 야사에서도, 주색에 빠지고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던 백제의 의자왕(재위 641~660)을 ‘토벌’한 김춘추가 ‘성인’(聖人)으로, 그리고 그 재위 기간은 ‘성대’(聖代)로 찬양됐다. 사대(事大), 즉 중국 위주의 동아시아적 국제 질서가 당연시됐던 시절에 중국의 도움을 얻어 백제와 고구려를 친 신라는 삼국 중에서 “제일 도덕적인 국가”로 인식됐다. 조선 전기의 &lt;동국통감&gt;(1484)은 삼국 통일로 고통스러운 전쟁을 중단시키고 장기적 평화를 가져다준 신라의 “인심(人心)의 순박함”을 극찬했는가 하면, 조선 후기의 &lt;동사강목&gt;(1778)은 마한의 멸망 이후 삼국시대를 “정통이 없었던 시대”로 보면서도 통일신라만큼은 ‘정통’이라고 평했다. &lt;동사강목&gt;은 수나라 침략을 막은 고구려를 호평하지만, “외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승리”라고 찬양하기보다는 “도덕성이 부족한 단명의 수나라에 본때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전통시대 사학에서는 신라의 승리가 “도덕적 우월성에 의한 천명(天命)”으로 이해되고,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동아시아 전체를 한국사 전개의 기본적 테두리로 설정하는 이상 신라와 수·당나라의 동맹관계는 반민족적 행위라기보다는 일종의 국제연대로 인식됐다.</p><p>물론 이런 인식을 오늘날의 (암묵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사대주의라고 몰아붙이기 쉽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잦은 교류로 풍요로워진 신라의 문화가 삼국 간 전쟁의 종식과 함께 660년대 이후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황금기를 맞은 것만큼은 사실이 아닌가?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에 수반되는 빈번한 교류가 없었다면 당나라의 불교를 섭취해 독자적인 교학의 세계를 연 원효나 의상, 원측, 태현 등 7~8세기 신라 고승의 출현이 가능했겠는가? 당나라 병력을 한반도 남부에서 쫓아내느라고 기력이 쇠진된 신라는 과연 당나라와의 치명적 충돌을 빚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고구려 옛 영토의 전부를 경략할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신라에 대한 전통시대 사학의 옹호는 도덕주의적 수사(신라의 순박한 인심의 승리 등)로 치장돼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7세기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 현실적 역학관계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태도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싶다.</p><p>이와 같은 기존 사학의 논의는, 20세기 초 ‘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면서 근본부터 흔들렸다. 단재의 민족주의적 논리대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다 똑같이 ‘신성한 부여족’, 즉 ‘우리 한민족의 형제’라면 고구려가 아닌 중국과 손을 잡아 고구려와 백제를 친 신라는 “도둑을 도와 자기 형제를 친 부끄러움을 남긴” 나라가 되는 것이다(&lt;독사신론&gt;). “계속 자강(自强)을 하여” 다행히 나중에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라도 할 수 있었던 신라에 대해선 단재가 약간의 호감을 보이지만, 민족의 힘만을 최고의 가치로 봤던 그에게 핵심적 관심사는 강대국인 고구려였다. 이와 같은 논리는 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상식이 됐다. 오죽하면 민족주의보다 기독교적 사관을 추구했던 젊은 날의 함석헌(1901∼89) 선생까지도 “조선민족 전체의 테두리를 지켜온 우리의 수비병인 고구려의 패망은 우리 역사 전체의 최대 비극”이라 보고 그 패망으로 “만주가 상실되고 반도의 약국이 탄생된 것”을 한탄스럽게 여겼겠는가? 그는 ‘신라의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긴 썼지만 ‘빈약한 통일’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중국 모방이라는 독충에 걸린” 통일신라의 문화를 별로 좋게 보지는 않았다(&lt;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gt;, 1934).</p><p>북한 사학이 신라 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한반도 북반부 국가로서 고구려·발해 계승 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근저에 흐르는 심성은 단재나 함석헌이 표현했던 고구려에 대한 민족주의적 긍지와 신라의 ‘외세 끌어들이기’에 대한 민족주의적 불만이다. 이 민족주의적 심성을 남한 지식 계층의 상당 부분, 특히 1970~80년대식의 좌파 민족주의 이념가들이 공유하고 있기에 신라 통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최근에 남한에서도 거의 헤게모니를 잡은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사에 대한 단재의 기본 관념은 남북한 양쪽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p><p><b>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협하는 인식</b></p><p>만약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비판의 목적이 한-미 동맹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면 필자도 그 목적에는 동의한다. “한-미 동맹은 냉전의 산물”이라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훈계한 중국 정부 쪽의 이야기는 외교적 결례일지라도 내용상 틀리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과 본질적으로 달랐던 1500년 전의 상황에 오늘날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중국인들이 보기에야 신라, 고구려, 백제가 서로 풍속이 비슷한 ‘삼한의 후예’였지만(&lt;구당서&gt;), 실제로는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를 동족으로 보지 않았다. 세 나라 지배층 사이에 신화나 제사 체계는 물론 언어라든가 행정 체계 등이 서로 다른데다 누적된 적대감까지 가미돼 동족이 아닌 경쟁세력일 뿐이었다. 5세기 후반부터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서로 가까워졌으나 540~550년대에 이르러 한강 유역과 가야를 둘러싼 갈등이 계기가 되어 다시 적대자가 되고, 554년에 신라와의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재위 523~554)이 전사하자 불구대천의 적이 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642년의 김춘추와 연개소문 사이 교섭의 결렬이 보여주듯이, 신라가 죽령 바깥으로 손을 뻗지 말아야 하고 오늘날 영남 지역만을 차지하는 약소국으로 남아야 한다는 고구려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한강유역을 잃고서는 패망을 면할 수 없다는 신라 지배자들의 인식이 타협의 여지 없이 상충됐다.</p><p>적에 둘러싸여 궁지에 몰린 신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기보다는 수나라의 수치스러운 패배를 복수하여 천하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어차피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을 복속시키기로 마음먹은 당나라 태종(재위 626-649)의 대외 정책에 편승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는 ‘만주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영토를 확충시킨 신라 문화의 전례 없는 융성과 고구려의 계통을 이은 발해의 등장이었다. 서로 종족적으로 이질적이고 정치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신라와 발해는 나중에 각각 고려·조선과 금나라 계통으로 이어져 한반도와 요동 문화의 요람이 됐다. 백제 정복으로 그 영토가 확충된 신라가 후대의 한반도 통일국가(고려, 조선)의 태반이 됐다는 의미에서는, 이미 7세기 말에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일통’ ‘통일’ 같은 용어를 계속 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듯하다.</p><p>또 한가지, 만주 상실을 전제로 한 통일이 불완전했다고?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에 한반도 남부와 중부에서 그 종족적 틀이 공고화된 ‘조선인’ ‘한인’(韓人)이라는 종족 집단은 만주를 ‘상실’했을 리가 만무하다. 만주를 차지한 일이 애당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훨씬 후대에 형성된 ‘우리 민족’을 고대에 투영해 고구려를 높이고 신라를 낮추고 만주의 상실을 애통하게 여기는 ‘역사 정치’는 학술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남북한 사이의 동질감을 높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김춘추의 민족적 배신’에 대한 비난과 만주 상실 타령은 한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을 부추겨 한-미, 한-일, 북-중 동맹을 대신할 동아시아적 공동 질서의 확립을 정서적인 측면에서 원천 봉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동아시아적 공동체가 출현하지 않으면 과연 우리의 근본적 염원인 남북한의 통일이 가능하겠는가? 민족주의적 배타성을 벗어난 지역적 시각이야말로 남북한 통일을 위한 가장 긴요한 준비가 아닌가 싶다.</p><p><span style="color:rgb(193,45,132);"><b>참고 문헌</b></span></p><p>1. ‘통일신라 호칭 문제’ &lt;통일신라의 대외관계와 사상연구&gt;, 백산자료원, 2000, 1∼27쪽<br />2. ‘신라 삼국통일론은 타당한가’ 김영하, &lt;역사비평&gt; 20호, 1993<br />3. ‘연개소문과 김춘추’ 노태돈, &lt;한국사 시민강좌&gt; 제5집, 1989, 14∼39쪽<br />4. &lt;한국사학사의 연구&gt; 한국사연구회 편, 을유문화사, 1985, 67∼187쪽</p></div></div><p><a href="http://h21.hani.co.kr/section-021163000/2008/07/021163000200807160719009.html" target="_blank" style="font-family:'바탕체';background-color:rgb(255,255,255);"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http://h21.hani.co.kr/section-021163000/2008/07/021163000200807160719009.html</a></p><div class="autosourcing-stub" style="font-size:15px;"><a href="http://h21.hani.co.kr/section-021163000/2008/07/021163000200807160719009.html" target="_blank" style="font-family:'바탕체';font-size:1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br />[출처] </a><a href="https://cafe.naver.com/01033258637/2984"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역사단체 ‘우역바’)</a> | 작성자 <a href="https://cafe.naver.com/01033258637.cafe?iframe_url=%2FCafeMemberNetworkView.nhn%3Fm%3Dview%26memberid%3Dtongjoo"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역사</a></div>]]></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20-08-26T14:34:24+09:00</dc:date>
</item>


<item>
<title>신기전</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79</link>
<description><![CDATA[<p>신기전을 아시나요? 바로 조선 시대 때 사용된 로켓 추진 화살인데요..</p><p><img style="width:400px;height:300px;" src="http://cafefiles.naver.net/20110717_71/jua01005_1310855275627tVO3K_jpg/imtfe_defendants_jua01005.jpg" alt="imtfe_defendants_jua01005.jpg" /></p><p>&lt;사진: 두산동아&gt;</p><p> </p><p>'조선왕조실록'에 여진족으로부터 옛 땅을 회복하는데 이 신기전이 한 몫 했답니다.고려 최무선이 만들었던 주화를 개량해 만든게 신기전이지요. 폭탄에 해당되는 방화통을 약통 위에 올려 놓고, 약통에 화약을 채우고 바닥에 구멍을 뚫어 화약이 연소되며 가스를 분출시켜 로켓처럼 날아갈 수 있게 만들었죠.  당시 신기전의 위력은, 적이 숨어 있을 만한 곳에 신기전을 들이대면 적이 겁에 질려 스스로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당시 파괴력도 상상을 초월했다 하더군요.^^</p><p><a href="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732"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732</a></p><p> </p>
<div class="content_move">[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9-09-25 11:24:01 한국사 연대기에서 이동 됨]</div>]]></description>
<dc:creator>역지학매니저</dc:creator>
<dc:date>2015-07-05T19:57:02+09:00</dc:date>
</item>


<item>
<title>병인양요</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7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size:11pt;"> </span></p><p><span style="font-size:11pt;">1. 병인양요의 배경</span></p><p><span style="font-size:11pt;"> 1866년 9월 18일, 프랑스 극동함대 로즈 제독이 군함 3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나 강화 해협을 중심으로 인천에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고 서울 양화진까지 올라와 지세를 세밀히 정찰하여 지도 3장을 만들고, 그해 10월 11일 군함 7척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 최인서, 심순녀를 대동하여 조선 원정에 나섰다. 당시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행사했던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 명령을 내려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를 학살하였는데, 이때 화를 면한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이를 알리면서 이에 대한 보복 원정을 촉구하게 되었고, 이에 로즈가 함대에 수로 안내원과 통역관으로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 최인서, 심순녀를 태워 조선을 침략하여 이로써 조선-프랑스 간 군사 충돌이 발생하였다. </span></p><p><span style="font-size:11pt;">  이전에도 조선-프랑스 간 군사 긴장이 있기는 있었다. 1831년 로마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교구로 설정하여 양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를 파견하여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고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되자 이에 조선 임금 헌종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 사이에 권력 쟁탈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척사 윤음을 내리고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박해를 가하였는데, 이때 프랑스 천주교 신부 3명이 처형 당하였다(기해박해). 이를 계기로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세실 해군 소령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서해안에 나타나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 조정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화답을 받고자 이듬해에 다시 오리라 통고하고 돌아갔다. 이듬해 그들의 말대로 라파에르 해군 대령을 중심으로 군함 2척을 거느리고 다시 왔으나 강풍에 파선되는 바람에 영국 선박의 도움을 얻어 그냥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span></p><p><span style="font-size:11pt;"> 사실 처음부터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6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이 전해지고, 제정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압박을 가하자 오히려 그는 천주교의 협력을 얻어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던 것이다(또 개인적으로도 천주교는 자신의 부인 여흥 대부인 민씨의 종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베르뇌 주교는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나 홍봉주, 남종상 등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조선-프랑스 동맹 체결을 조정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북경에서 양인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를 반대하던 조정 대신들이 천주교와의 교섭을 비난하고 나아가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의 체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천주교를 외교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을 바꾼 대원군은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병인박해)</span></p><p><span style="font-size:11pt;"></span> </p><p align="center"><img width="417" height="614" style="width:417px;height:614px;" src="http://cafefiles.naver.net/20150705_130/jua01005_1436025936204q52bQ_PNG/%B1%B8%BD%BA%C5%BE%B7%CE%C1%EE%C1%A6%B5%B6.PNG" alt="%B1%B8%BD%BA%C5%BE%B7%CE%C1%EE%C1%A6%B5%B6.PNG" /></p><div align="left"> </div><p> </p><p> </p><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1pt;">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span></p><p align="center"> </p><p align="left"><span style="font-size:11pt;"> 2. 병인양요의 경과 및 결과</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size:11pt;">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갑곶에 육전대를 상륙시키고 한강 입구를 봉쇄하여 강화부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을 접한 조선 조정은 순무영을 설치하고 대장에 이경하, 중군에 이용희, 천총(千總)에 제주목사 양헌수를 임명했다. 이때 양헌수는 통진부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꾀하였다. 이후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을 공격하였는데, 그들의 화력에 강화도의 관리, 군인, 백성이 모두 피난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의 손아귀에 강화도는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통진에 입성한 이용희는 로즈 제독에게 격문을 보내어 프랑스의 조선 침략이 부당하다며 항의하였고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로즈제독은 이용희에게 동일자로 화답하면서 조선 조정의 프랑스 선교사 살해를 문책하며 그 주모자를 엄벌하고 전권대사를 보내 조약의 초안 작성을 요구하였다.</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size:11pt;"> 한편, 김포 문수산성을 수비하던 한성근은  그 일대를 정찰하던 군사 70명을 이끌고 때마침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병력 부족으로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에 양헌수는 화력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어융박략(禦戎方略: 매복, 기습, 육박전, 경계강화 등의 전술이 어우러진 일종의 게릴라 전법)'을 구상하여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는 549명의 부대를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야간 도하 작전을 전개하고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탈환하였다. 그는 정족진을 결성하고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이 지휘하는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 이렴이 지휘하는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 이대흥이 지휘하는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하고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한편,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점거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 제독은 올리비에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윽고 프랑스군은 분견대 160명을 이끌고 야포 없이 경무장하고서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동문과 서문으로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조선군은 일제히 포격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에서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접전 벌인 끝에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을 내었다. 0</span></p><p align="left"><span style="font-size:11pt;">  프랑스군은 강화도 상륙 이래 1달동안 강화도를 점령하였지만, 정신적, 육체적 피로에 곧 닥쳐올 추위로 염하가 얼어붙어 보급로 차단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지만 결국 철수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들은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약탈해갔으며, 이때 외규장각문서도 가져갔다. 이후 로즈 제독은 조선의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 응징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에 주둔한 외교관들은 고개를 저었다. 프랑스와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협상조차 벌이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 정족산성에서 패전한 직후에 곧바로 함대를 철수했다는 것, 조선 원정의 빌미였던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은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그들과 다르게 이 원정을 성공으로 간주하였는데, 그것은 미국 정부가 이듬해 3월 제너럴셔먼호사건, 프랑스는 병인박해로 인해 조선으로부터 피해를 보았으니 대 조선 미불 공동 원정을 제의하자 당시 프랑스 정부가 이미 로즈 제독의 조선 원정을 통해 응징 보복을 행했으므로 새삼스레 그럴 필요는 없다고 거절한 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span></p><p align="left"> </p><p align="center"><img width="568" height="349" style="width:568px;height:349px;" src="http://cafefiles.naver.net/20150705_266/jua01005_1436092873257GVYJo_PNG/%C4%B8%C3%B3.PNG" alt="%C4%B8%C3%B3.PNG" /></p><p align="left"> </p><p align="center">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함대</p><p align="center"> </p><p align="left">*참고자료</p><p align="lef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p><p align="left">가톨릭사전</p><p align="left">위키백과사전</p><p align="left">뉴스천지</p><p align="left"> </p><p> </p>
<div class="content_move">[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9-09-25 11:24:01 한국사 연대기에서 이동 됨]</div>]]></description>
<dc:creator>역지학매니저</dc:creator>
<dc:date>2015-07-05T19:55:51+09:00</dc:date>
</item>


<item>
<title>1881년(고종 18년)2월 26일 조선왕조실록 기사</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75</link>
<description><![CDATA[경상도(慶尙道)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 만 명이 올린 연명 상소의 대략에,“방금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가지고 온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1권의 책이 유포된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렸으며 이어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단(異端)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 자에 대한 처벌은 왕법(王法)에 나타나 있고 그 무리에 가담한 자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춘추(春秋)》에 실려 있으니, 이것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이와 반대로 하면 혼란해진다는 사실은 영원히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생각건대 우리 왕조는 역대 임금들이 계승하면서 유도(儒道)를 높이고 중시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3대(三代) 이후로 유도가 이처럼 융성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악한 예수교라는 것이 해외의 오랑캐 종족들에게 나와서 예의나 염치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윤리와 강상(綱常)이 일체 없어져버리니 다만 하나의 짐승이나 하나의 개, 돼지가 되어버렸습니다.우리 정종(正宗), 순조(純祖)로부터 헌종(憲宗)에 이르기까지 선대 임금들이 이루어 놓은 법을 후세의 임금이 계승하여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았으며 잘못을 저지른 자는 작은 죄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요망한 난적(亂賊)들이 모두 주륙되었습니다.우리 전하가 즉위하자 선대 임금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병인년(1866) 강화도(江華島)의 변란 때에 크게 토벌하니 추악한 무리들이 놀라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10년도 되기 전에 흉악하고 너절한 말이 한창 무성하게 퍼져서 이전에는 은밀히 서로 꾀던 자들이 지금은 방자하게 책을 쓰기까지 하고 이전에는 사적으로 서로 전습(傳習)하던 것을 지금은 버젓이 드러내놓고 우리에게 주면서 그것은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말씀보다 낫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구(文句)와 같다고 하니, 어찌 이리도 성현(聖賢)을 모욕하고 어찌 이리도 나라를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그런데도 임금 앞에 나가서 이것에 대해 아뢰려는 자도 있고 등대(登對)하여 전파시키려는 자도 있으니, 아! 예로부터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임금이 주는 밥을 먹으며 선비의 의관을 차리고 사신의 임무를 받고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욕되게 하는 글을 가지고 와서 전하에게 아뢰고 성인을 모욕하는 말을 은밀히 조정에 퍼뜨리며 적의 세력을 장황하게 설명하여 임금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여러 나라 사이에 균형을 지킨다는 설(說)을 빙자하여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더구나 선대 임금은 그처럼 엄하게 배척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용납해서 받아들이며 병인년에는 그처럼 엄정하게 토벌하였는데 오늘날에는 너그럽게 받아들이니, 신은 전하께서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선대 임금께 우러러 아뢰며 후세에 할 말이 있으실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이른바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책을 가지고 조목조목 따져 보겠습니다.그 말에 의하면, ‘조선의 오늘날 급선무는 러시아를 방어하는 것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없는데, 러시아를 방어하는 대책으로는 중국과 친교를 맺고 일본과 결속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중국으로 말하면 우리가 번국(藩國)으로 자처해 왔고 신의(信義)로 교류한 지 거의 200년의 오랜 시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황제(皇帝)’요, ‘짐(朕)’이요 하면서 두 존칭(尊稱)을 태연하게 사양하지 않고 받으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을 용납하고 그런 사람의 글을 받아두었다가 만일 중국에서 이것을 가지고 따지면서 시끄럽게 떠든다면 무슨 말로 해명하겠습니까?일본으로 말하면 우리가 견제해야 할 나라입니다. 국경 요새지의 험준하고 평탄한 지형을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으며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를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터에 우리의 대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 함부로 돌격한다면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미국으로 말하면 우리가 원래 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공공연히 그의 부추김을 받아 우리 스스로 끌어들여서 바다를 건너고 험한 길로 미국에 가서 우리 신료들을 지치게 하고 우리나라의 재물을 썼는데도 만일 그들이 우리나라의 헛점을 알고서 우리가 힘이 약한 것을 업신여겨 따르기 어려운 청으로 강요하고 댈 수 없는 비용을 떠맡긴다면 장차 어떻게 응대하겠습니까?러시아로 말하면 우리와는 본래 아무런 혐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연히 남의 이간술에 빠져 우리의 위업을 손상시키면서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 나라를 도발하게 하는 전도된 행동을 하다가 헛소문이 먼저 퍼져 이것을 빌미로 삼아서 병란의 단서를 찾는다면 장차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또 게다가 러시아나 미국, 일본은 모두 같은 오랑캐들이니 후하고 박한 차이를 두기가 어렵고, 러시아는 두만강(豆滿江) 한 줄기로 국경이 맞닿아 있는데 이미 실시한 일본과의 규례를 따르고 새로 맺을 미국과의 조약을 끌어대면서 와서 거주할 땅을 요구하고 물화를 교역하기를 요청하면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또 더구나 세상에는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각 나라들이 서로 이 일을 본보기로 하여 땅을 요구하고 화친을 청하기를 일본과 같이 한다면 또한 어떻게 막겠습니까? 허락하지 않는다면 지난날의 성과는 다 없어지고 원수가 되며 여러 나라의 원망이 몰려들어 적이 되어버리는 것이 러시아 한 나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허락한다면 세계의 한 모퉁이인 청구(靑邱)에 장차 수용할 땅이 없게 될 것입니다.진실로 황준헌의 말처럼 러시아가 정말 우리를 집어삼킬 만한 힘이 있고 우리를 침략할 뜻이 있다고 해도 만 리 밖의 구원을 앉아 기다리면서 혼자서 가까이 있는 오랑캐 무리들과 싸우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이해관계가 뚜렷한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일을 굳이 해서 러시아 오랑캐에게는 본래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생각하도록 만들고 미국에서는 원래 계책으로 삼지도 않은 일을 계책을 삼게 하여 병란을 초래하여 오랑캐를 불러들이게 합니까?그는 또 말하기를, ‘서학(西學)에 종사하고 재물 모으기에 힘쓰고 농사를 장려하는 데 힘쓰며 상공업에 힘써야 한다.’ 하였습니다.대체로 재물과 농공(農工)은 선왕(先王)의 좋은 제도와 아름다운 규범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위로하여 모여들게 하면서 덕을 베풀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고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항상 편안할 것입니다. 절약하는 것으로 제도를 삼아 먹는 것을 적게 하고 쓰는 것을 남게 한다면 재물은 항상 풍족할 것입니다. 무익한 일을 해서 유익한 일에 손해를 주지 않으며 다른 나라의 기이한 물건 때문에 본국의 재화를 천시하지 않는다면 공인(工人)들은 언제나 고무될 것입니다.당요(唐堯), 우순(禹舜) 때에는 집집마다 어진 사람이 살았고 성주(成周)에서는 집에는 식량을 쌓아두고 여행할 때면 전대를 걸머지고 다녔으며 한(漢) 나라에서는 창고에 곡식이 붉게 썩어갈 정도이며 돈꿰미는 썩어났으니, 이것으로 하여 백성들은 용감하면서도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선왕의 도리를 버리고 다른 묘책에 힘을 쓰겠습니까? 더욱 분통스런 것은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도 일본에서 연사(演士)로 행세하고 예수를 믿어 자진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앞잡이가 되고 짐승과 같은 무리가 되어 버렸으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혹시 지난날에 법망을 빠져나간 큰 괴수가 강화도의 실패에 분격해서 병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요행수로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려는 욕심을 부려서 점차로 우리를 물들이려는 간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달콤한 말로 유인하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고 위태로운 말로 위협하는 것에 힘을 다하였는데 또 무엇 때문에 ‘예수교를 전교(傳敎)하는 것이 해롭지 않다.’는 말을 끝머리에 붙이겠습니까? 그 심보를 알 만합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우선 쫓아버리고 그 책은 물이나 불 속에 집어던져 호오(好惡)를 명백히 보이며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해서 온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전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주공과 공자,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 사람들이 모두 임금을 위하여 죽을 각오를 가지게 하며 백성들의 마음으로 성(城)을 삼아서 더럽고 요사스런 무리들이 간계를 부릴 여지가 없게 한다면 우리나라의 예절 있는 풍속을 장차 만대에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간사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키는 일에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다른 나라 사람의 《사의조선책략》의 글은 애당초 깊이 파고들 것도 없지만 그대들도 또 잘못 보고 지적함이 있도다. 만약 이것에 빙자하여 또다시 번거롭게 상소하면 이는 조정을 비방하는 것이니, 어찌 선비로 대우하여 엄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이 점을 잘 알고 물러가도록 하라.”하였다.--------위 내용은 1881년 영남만인소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이만손이 유생 만명의 서명을 얻고 왕에게 상소한 '영남만인소'의 내용을 대충 보면 청나라의 하급 외교관 황준헌의 [시의조선책략] 에 반대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황준헌의 시의조선책략에서는 조선은 중국(청)에 의지하고 미국과 일본과 화친하며,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의조선책략]과 대조되는 영남만인소는 위에 나온 것처럼, 서양의 여러 국가들과 일본은 의지할수 없고 신뢰도가 떨어지니 수교해서는 안되며 청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영남만인소는 고종에게 올려졌습니다. 그러자 대사헌 한경원이 이만손의 영남만인소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양사와 홍문관도 이에 동의하자, 고종은 동년 5월 18일, 이만손을 유배했습니다. 그 뒤로 이만손에 대해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으나, 앞에서 말한 유배형으로 인해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영남만인소 사건에서 1년이 지난 후, 조선은 [시의조선책략]의 내용대로 미국과 수교를 맺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에게 준 혜택을 우리한테도 주라는' 이른바 최혜국 대우가 포함되었지요.p.s) 영남만인소 사건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많이 있으나, 사건의 원인이 위의 기사에 있기에, 그 내용을 올려보았습니다.[본 게시물은 MAY랑 마루밑다락방 사이트 간에 맺어진 교류협정에 의거하여 올려지는 글입니다.]* 역사학 자료실-고려사 게시판에다가 올려놓았는데, 게시물을 이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div class="content_move">[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9-09-25 11:24:01 한국사 연대기에서 이동 됨]</div>]]></description>
<dc:creator>피아스트</dc:creator>
<dc:date>2015-04-19T08:49:28+09:00</dc:date>
</item>


<item>
<title>고추의 역사와 효능</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68</link>
<description><![CDATA[<p>고추는 4명중 1명의 한국인이 매일 먹는 것이라고 추산되는 국민 채소 중에 하나로 고추의 가장 큰 특징은 매운 맛이 입안을 감싸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한국인이 매일 먹는 것이라고 추산하는 고추는 사실 국내 토종 채소는 아니였다. 고추의 원산지는 볼리비아에서 당시의 남미 지역에서 6,000년 전 부터 재배하였고 과거 남아메리카의 잉카인들은 이 채소를 아히라고 불렀으며 멕시코의 아스텍인들은 칠리라고 바꿔 불렀다. </p><p> </p><p>세계에 막 퍼지기 시작한 건 15세기 말에 후추를 대체할 수 있는 향신료를 찾던 서유럽 사람들에 의해서 유럽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 사람들은 붉은 후추라는 이름으로 red pepper 이라고 붙였다. 그러나 후추에 비해서 너무 맵기도 매우면서 분말로 만들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어서 향신료로서는 이용되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전해지게 된 것은 포르투칼의 무역 상인들이 남아시아를 거쳐서 중국에 전해지고 한국의 경우는 중국에 전해진 이후 일본 규수에 고추가 전해지고 다음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당시 조선에 전해지게 되었다. </p><p> </p><p>그러나, 조선에 전해진 고추는 처음부터 오늘날 처럼 환영받지는 못했다. 고추가 일본에서 온 것이라고 하여 왜개자라고 불렀다.</p><p>오늘날 처럼 본격적으로 김치부터 고추를 양념으로 사용하던 시기는 18세기 이후 부터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김치도 18세기 이전에는 백김치로 만들어 먹었다.</p><p><br /></p><p>대한민국에 이르러서는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이 먹는 고추 1일 섭취량은 고춧가루를 포함하여 1998년 5.2g에서 2005년에는 7.2g으로 40% 증가했고 매운맛으로 유명한 태국의 경우에는 하루 섭취량 5g 안팎이므로 대한민국의 평균 고추 소비량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p><p> </p><p>특히 고추에서 가장 많은 성분인 캡사이신이 대한민국의 대표 고추 라고 할 수 있는 청양고추가 일반 고추의 6~7배나 들어 있으며 한국식품연구원의 2007년 조사에 따라 0.6~0.8mg이였던 캡사이신의 용도가 2~3배 증가한 2.0mg~3.0mg으로 증가했다니 그동안의 김치 보다 더 매워진 것으로 산정했다. </p><p>고추가 가지는 매운맛은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성을 가지고 심리학자들은 고추의 중독은 담배의 중독과 원리가 흡사하다고 말한다. 우리 사람의 뇌가 몸에 상처를 입었다고 판단하여 이때 분비되는 엔도르핀에 의해 더 매운 고추를 먹게 되고 이때 고추의 매운맛으로 야기되는 통증에 대응하여 엔도르핀을 더 방출하고 사람은 은근한 도취감과 황홀함, 기분 좋은 고추 맛을 느끼게 된다.</p><p> </p><p>캡사이신이 콜레스테롤과 관절염, 당뇨병, 근육통 등을 감소시킨다는 연구 발표도 있고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는 혈전 생성을 예방한다는 주장도 발표했다. 또, 울혈을 해소하고 점액을 감소시킴과 동시에 감기 증세도 완화한다고 한다. </p><p> </p>]]></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6-10-19T14:23:01+09:00</dc:date>
</item>


<item>
<title>조선 비운의 왕, 단종의 묘소 장릉에 가다</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67</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textbox" style="font-family:none;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어떤 나라던지 건국 초반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 빈발한다. 그중에는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비참한 운명을 겪고 간 왕이 있었다, 그는 바로 6대 왕 단종이다. <br /><br /></div><div class="imagebox" style="font-family:none;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div class="c_image"><div class="photo"><img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0907/IE002017335_STD.JPG" alt="IE002017335_STD.JPG" style="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auto;" /></div><div class="desc" style="width:600px;">▲ <strong>장릉</strong>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사적 제196호.ⓒ 김동주</div></div></div><div class="imagebox" style="font-family:none;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div class="c_image"><div class="photo"><img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0907/IE002017337_STD.JPG" alt="IE002017337_STD.JPG" style="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auto;" /></div><div class="desc" style="width:600px;">▲ <strong>장릉</strong>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사적 제196호, 왼쪽편에서 찍은 사진ⓒ 김동주</div></div></div><div class="imagebox" style="font-family:none;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div class="c_image"><div class="photo"><img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0907/IE002017338_STD.JPG" alt="IE002017338_STD.JPG" style="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auto;" /></div><div class="desc" style="width:600px;">▲ <strong>장릉</strong>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사적 제196호, 오른편에서 찍은 사진ⓒ 김동주</div><div class="desc" style="width:600px;"><br /></div></div></div><div class="textbox" style="font-family:none;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단종은 1441년 (세종 23) 7월 23일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홍위이다. <br />객관적으로만 바라본다면 부왕 문종도 적장자였고, 자신도 적장자였기 때문에 단종이 조선 역사상 비참한 운명을 살다간 왕이라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단종은 왕위에 오르기 까지 순조로운 과정을 거쳤다. 세종조에는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문종이 즉위하자 즉시 왕세자로 봉해졌다. <br /><br />그러나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면서 단종에게는 인생의 큰 위기가 찾아왔다. <br />우선 단종은 너무 어렸다. 즉위 당시 나이는 11세였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한 숙부들이 가장 정력적인 시점에 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가진 능력과 커다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br /><br />수양대군이 종친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의 최측근으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비밀리에 측근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야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계유정난이였다. 이때 수양대군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이후 수양대군은 장악원 제조 등을 역임하며 권력기반을 다지게 된다. <br /><br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영풍군, 정종 등은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 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였던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이어 1454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을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 1등관에 서훈하였다. 결국은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단종은 이름뿐인 왕이 되어 버렸다.<br /><br />1454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옆을 지키던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최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를 통과했다.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 권람 등에게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br /><br />1456년 음력 6월에 성감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이라 불리는 이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다,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하여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br />그 바람에 1457년 세조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유배 보냈다. <br />1457년 금성대군도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워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도 같이 사약을 내렸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br /><br />단종이 죽음에 이르렀을 당시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어떤 누구에게도 매장하지 말라 명하였다. 그러나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매장하였고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 중종조에 봉분을 갖추게 되었고 숙종조에 이르러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게 되었다. <br /><br />11세의 어린 나이에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였지만 그의 안타까운 사연에 후대에 비로소 복권되어 제자리를 찾았고 지금은 노산군이 아니라 조선의 6대 왕 단종이라 불리고 있다. <br /><br /></div><div class="imagebox" style="font-family:none;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div class="c_image"><div class="photo"><img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0907/IE002017365_STD.JPG" alt="IE002017365_STD.JPG" style="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auto;" /></div><div class="desc" style="width:600px;">▲ <strong>단종비각</strong> 영조9년 (1733)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릉비와 비각이 건립되었다. 빗걱 앞면에는 조선국단롱대왕장릉이라는 글이 윤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 김동주</div></div></div><div class="imagebox" style="font-family:none;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div class="c_image"><div class="photo"><img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0907/IE002017367_STD.JPG" alt="IE002017367_STD.JPG" style="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auto;" /></div><div class="desc" style="width:600px;">▲ <strong>수복실</strong> 이 건물은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 숙종 25년에 정자각과 함께 세운 것이다.ⓒ 김동주</div></div></div><div class="imagebox" style="font-family:none;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div class="c_image"><div class="photo"><img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0907/IE002017370_STD.JPG" alt="IE002017370_STD.JPG" style="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auto;" /></div><div class="desc" style="width:600px;">▲ <strong>장판옥</strong> 이 건물은 정조때 건립한 것으로 단종과 관련된 268인 충신들의 위패를 봉한한 곳이다.ⓒ 김동주</div></div></div><div class="imagebox" style="font-family:none;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div class="c_image"><div class="photo"><img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0907/IE002017371_STD.JPG" alt="IE002017371_STD.JPG" style="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auto;" /></div><div class="desc" style="width:600px;">▲ <strong>배식단</strong> 이곳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김동주</div></div></div>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6-10-05 11:28:42 역사 스페셜에서 이동 됨]]]></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6-09-07T15:46:18+09:00</dc:date>
</item>


<item>
<title>정도전</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66</link>
<description><![CDATA[<p>조선건국의 개국공신 중에 한명.</p><p>후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제 1차 왕자의 난에 의해 단죄되어 죽지만 그가 없었다면, 조선도 없었고 이성계라는 인물도 없었으므로, 역사에 한획을 그은 대단한 인물.</p><p> </p><p>본래는 1342년 (충혜왕 복위 3년)~ 1398년 (태조 7년) 고려말과 조선초의 학자이자 정치인이다.</p><p>본관은 봉화, 자는 종지, 호는 삼봉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이다. 그는 태어날때 서자로 태어났다. 물론 당시에는 서자로 태어난 자식도 정치에 입문 할수 있었고, 서자 차별이 없었다. 본격적인 서자 차별은 조선 태종조에 이르러서 서자차별법이 이루어졌다. </p><p><span style="line-height:1.5;">아버지와 이곡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서 그는 이곡의 아들, 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정몽주 등과 교유하였다. 문장이 왕양혼후하여 동료 사우의 추앙을 받았다. 1360년 (공민왕 9년)에 성균관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 전교주부, 통례문지후를 역임하였다.</span></p><p> </p><p>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을 때에는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 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을 관장했다. 1375년 우왕 1년에는 권신 이인임, 경복흥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권하의 거평부곡에 유배되었다. </p><p>유배 중 1377년에 풀려나 그는 4년간 고향이 있었고 삼각산 밑에 초려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니 향인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라는 재상이 별업을 만들기 위해 재옥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와 유량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의 함주 막사로 찾아가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p><p> </p><p>1384년 전교부령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 지제교, 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했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p><p>1389년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페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삼사우사, 지경연사를 지냈다. 그 뒤 정당문학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 이초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p><p> </p><p>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 김진양, 서견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의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이유는 가풍이 부정하고 파계가 불명하다. 든가 천지에서 기신 해 당사의 자리를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 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p><p> </p><p>그러나, 반전은 있었다. 이성계 다섯째 아들, 이방원 일파에 의해서 선지교 (현 선죽교) 정몽주가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 조준, 남은 등 50여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했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사, 겸판상서사사, 보문각대학사, 지경연예문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p><p> </p><p>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 태조 2년 문덕곡, 몽금척, 수보록 등 3편의 악사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 안무사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p><p>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로서 경상, 전라, 양광삼도도총제사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고 이 해 심기리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p><p> </p><p>1395년 정총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을 저술해 전라도 관찰사 이무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을 저술해 재상, 대간, 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 문제로 명나라에서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 확보, 진법훈련,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했다. </p><p> </p><p>1397년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군도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를 획정하고 성보를 수선하여 참호를 설치하였다. 1398년 권근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들에게 경사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을 저술해 배불숭유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p><p> </p><p>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고, 죄명은 세자 방석에 당부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이를 공소난, 무인난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이방원이 일으킨 유명한 사건이다.</p><p> </p><p> </p><p> </p>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6-10-05 11:28:42 역사 스페셜에서 이동 됨]]]></description>
<dc:creator>운영자</dc:creator>
<dc:date>2016-01-31T09:40:20+09:00</dc:date>
</item>


<item>
<title>염라대왕과 시왕신앙</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65</link>
<description><![CDATA[<p align="left" style="text-align:left;"><img title="e8b1d5cd019ba36b1d4098d9ad5473b2_1446878190_3981.jpg" src="http://www.hisking.com/data/editor/1511/e8b1d5cd019ba36b1d4098d9ad5473b2_1446878190_3981.jpg" alt="e8b1d5cd019ba36b1d4098d9ad5473b2_1446878"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auto;" /></p><p style="text-align:center;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장윤정의 어머니 육씨가 장윤정과 손주를 위해 천도재를 지냈다는 소식을 듣고 관련 여러 뉴스를 읽던 중 한 기사의 댓글에서 염라대왕은 도교에만 나오는 인물이 아니냐라는 의문을 가진 누리꾼을 보아, 꽤 흥미로운 질문인 것 같아 글로 써보기로 하였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우선, 본론에 앞서, 염라대왕에 대한 정의를 보면, 저승에서,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지은 생전의 선악을 심판하는 왕을 말한다.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지옥에 살며 십팔 장관과 팔만 옥졸을 거느리고 저승을 다스린다. 불상과 비슷하고 왼손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깃발을 들고 물소를 탄 모습이였으나, <span style="line-height:1.5;">뒤에 중국 옷을 입고 노기를 띤 모습으로 바뀌었다. </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염라 대왕에 대한 정의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서술해 보자면····.</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염라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다섯 번째의 왕인데, 여기서 명부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한다.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곳이 지장보살과 시왕인데, 시왕은 한자의 의미로만 본다면 '열명의 왕'이라는 단순한 뜻에 지나지 않지만, 불교와 도교에서는 특별히 명부에서 죽은 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열 명의 대왕, 즉 진광왕, 초강왕, 송제왕, 오관왕, 염라대왕, 변성왕, 태산왕, 평등왕, 도시왕, 전륜대왕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특히 필자가 이번 글에서 말하는 염라대왕은 명부에서 죽은자가 다섯번째 맞이하는 칠일간의 일을 관장하는 관리이다. 염라대왕을 다른 말로는 야마, 염마 등으로도 부르며, 원래 인도지역에서는 천상의 교주라고도 하나, 지옥신왕이 발달하면서 지하 지옥의 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염라대왕을 만나러 가는 모습은 몇몇 경전에서 많이 묘사되었으나, 본 글에서는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고 몇가지 경전만 들겠다. 우선, '시왕생칠경'과 '시왕찬탄초' 등이 있다. 궁금하면 관련 글이나 직접 경전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그런데 한가지 재미 있는 것은 염라대왕을 만나는 장면중 '시왕찬탄초'를 읽어보면, 전보다 죄인의 고통이 더욱 심해지고 염라대왕은 호통을 치며 [네가 여기에 온 것이 옛부터 몇 천만인지 그 수를 모르겠다. 생전에 착한 일을 하여 다시 이 악에 닿지 않는 말만 하는구나]하고 도깨비와 함께 죄인의 조서를 읽고 죄인의 양손을 되찾아서 아홉면을 가진 업경 앞에 이 죄인을 두니, 하나하나의 거울에 한평생 동안 지었던 죄업이 남김없이 비친다. 옥졸이 머리카락을 잡아채고 얼굴을 잡아당겨 거울에 들이대며 보라고 나무랄 뿐만 아니라, 방망이로 두들겨 패면 처음에는 소리를 내서 울부짖지만 나중에는 숨도 다 끊어지고 몸이 티끌처럼 부서진다고 한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염라대왕과 같은 것을 시왕신앙이라고 부르는데, 시앙신왕의명칭이나 지옥에서의 심판 광경 등은 불교경전인 '예수시왕생칠경'에 근거하여 정립되었다. 일본의 '발심인연시왕생칠경', '시왕찬탄초', '정토견문집' 등에도 시왕이 명부에서 행하는 심판광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시왕은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 널리 믿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불설예수시왕칠경'에 보면, 사람들은 죽어서 명부로 갈 때 처음 7일에는 제1 진광대왕, 두 번째 7일에는 제2 초강대왕, 세 번째 7일에는 제3송제대왕, 네 번째 7일에는 제4 오관대왕, 다섯 번째 7일에는 제5 염라대왕, 여섯 번째 7일에는 제6 변성대왕, 일곱 번째 7일에는 제7 태산대왕, 백일에는 제8 평등대왕, 일년째에는 제9 도시대왕, 3년째에는 제10 전륜대왕 등 차례대로 열명의 왕 앞을 지나며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육체만 없어질 뿐 생전에 행한 선행과 악행에 따라 앞으로 어디에 태어날지가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각에서 사후심판을 받는다는 시왕 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불교의 사후심판에 대한 생각은 장생불사를 믿는 옛 도교에서 현 불교의 경전 내용대로 존재되어 왔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여기서, 뒤에 가서 필자가 얘기 하겠지만, 불교가 도교의 경전 등을 뺏었는지 생각이 들겠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필자가 장담할수 있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이어, 시왕신앙에 대한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히 사람들 사이에서 성행되어 널리 믿어졌고, 도교에서도 불교의 명칭보다는 독자적인 명칭을 사용하며 여러 책에서도 도교의 시왕신앙을 찾아볼수 있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여기까지가 불교와 도교의 염라대왕과 염라대왕에 속한 이야기고, 중국의 중심이라면 이제는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하겠다.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우리나라에 시앙신앙이 들어왔다는 것은 언제인지는 기록이 없어 불확실하지만, 삼국통일을 전후한 때쯤에는 명부에 관한 생각이 전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에 보면 망덕사의 승려 선율이 돈을 시주하여 불경을 만들려다가 아직 다 이루기도 전에 갑자기 저승에 잡혀가 지옥에 이르렀으나, 곧 다시 풀려나 열흘만에 소생하게 되었는데 스님이 명부에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인을 만나 부모의 죄로 인해 자신이 지옥고에 받고 있으니 이를 청산해 줄 것을 부탁하여 그 소원을 들어주니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은 즉, 죄를 받으면 고통을 받는다는 지옥사상과 함께 경전을 쓴 공덕으로 명부에서 환생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다만, 삼국통일 전후로 하여 통일신라시대 때에는 기록 외에 시왕에 대한 자료나 유물이 존재하지는 않다. 시왕신앙은 통일신라 그리고 후삼국을 넘어 고려로 넘어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된다.</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고려시대에 이르면, 시왕에 관해 사람들은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믿게 되었다. '고려사'에는 궁성의 서북쪽 모퉁이에 시왕사라는 절을 세웠는데 그곳에 있었던 시왕도의 모양이 기괴하여 이루 형용하기 어려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삼국통일 무렵에 명부에 대한 생각이 전해져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시왕이 점점 신앙하게 되고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이미 시왕을 모시는 사찰이 건립될 정도로 성행됐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대표적으로는 1102년 흥복사에 시왕당이 건립되어, 황제와 황후, 태자가 그곳을 축하하러 갔다든가, 1146년 황제의 병이 위독하여 시왕사에서 기도를 올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이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왕의 심판모습을 그림으로도 그리는 것과 더불어 합천 해인사에는 고려시대 작품이라 생각되는 '예수시왕생칠경'의 목판그림이 있는데, 그 중에는 시왕이 탁자에 앉아 심판하고 있고 그 옆에 동자.판관.옥졸 등이 서 있으며, 아래에는 죄인들이 심판받고 있는 광경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다. 또 지장보살을 그린 고려불화 속에도 지장보살 옆에 원유관을 쓴 모습을 한 시왕들이 늘어서 있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그리고,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에 조선 초기에는 불교탄압정책으로 불교가 압력을 받게 되면서 앞 시대의 귀족적인 신앙형태에서 벗어나 민간신앙적인 면모를 갖게 되면서 한국적인 불교로 변화했다. 사찰내에는 산신각이나 칠성각 등 민간신앙적 성격의 전각이 건립되고 이와 함께 죽은 자를 좋은 곳으로 가게 빌어주는 명부전 역시 많이 만들어졌다.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 불안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열망과 지옥고를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죽고 난 후뿐 아니라 생전에 미리 좋은 일을 하고 재를 지내둠으로써 사후에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을 면하려는 생각에서 명부의 구주인 지장보살과 시왕에 대한 신앙이 더욱 크게 성행했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처럼 시왕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 </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염라대왕은 도교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서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불교가 중국, 한국 등에 정착을 하면서 당시 민간신앙을 흡수하고 세월이 흘러 불교로 동화가 되면서, 도교 역시도 다른 민간신앙과 함께 불교에 흡수되고 동화되지 않았나 생각한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그러기에 도교에서 나오던 염라대왕 등의 신들도 불교의 신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1. 고려시대 파트에서 왕이나 세자가 아닌 황제, 황후, 태자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 고려가 황제국이라고 지칭하였기에 그렇게 표현 한 것임을 밝힌다.</p><p><span style="line-height:1.5;font-family:'돋움';font-size:13.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span> </p>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6-10-05 11:28:42 역사 스페셜에서 이동 됨]]]></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5-12-03T16:13:35+09:00</dc:date>
</item>


<item>
<title>계족산성</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63</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 align="center"><img src="http://www.hisking.com/data/editor/1511/e09d540e1a49acd5f270b8a2788c1f79_1446713863_7746.jpg" title="e09d540e1a49acd5f270b8a2788c1f79_1446713863_7746.jpg" alt="e09d540e1a49acd5f270b8a2788c1f79_1446713863_7746.jpg" /><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p><p align="center"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background-color:rgb(255,255,255);">(사진=회원 대전댁님)</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span><span style="font-family:'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2px;line-height:1.5;">[공동기획=회원 대전댁님, 마루밑다락방]</span><span style="line-height:1.5;font-size:13.2px;">​</span><span style="line-height:1.5;font-size:13.2px;">계족산성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광역시인 대전광역시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일깨워준 중요한 문화재이다. </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 </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위치는 대전시 장동 계족산에 위치되어 있으며, (해발 420m) 정상에 능선에 따라 테뫼식으로 축조되었다. 이 산성은 본래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 99년도 약 1년에 거친 발굴에서 백제가 아닌 신라가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 </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산성의 높이는 7~ 10m 가량 정도 되며, 동.서.남 쪽에 문터를 만들었다. 성안에는 삼국시대에 만든 우물터와 고려시대 기와편과 조선시대 자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고려.조선 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사료 되온다.</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line-height:1.5;"> </span></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발굴 과정 속에서 성을 쌓는 방법은 신라시대에 삼년산성을 쌓았던 방법처럼 쌓았다고 밝혀졌고,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중에서는 백제는 소수계로 밝혀졌고, 가장 오래된 유물은 6세기 중.후반의 신라시대 토기임으로 알려졌다. 한때 백제가 점령한 지역이기는 하나, 대부분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산성으로 발굴과정에서 밝혀졌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오늘날 산성의 주변은 인근 주민들이 등산로로 이용하거나,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계족산성은 98~ 99년 약 1년을 걸쳐 새로운 발굴성과를 통해 신라시대의 유물임으로 밝혀졌지만,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따라서, 계족산성으로 하여금, 대전지역이 당시 전략적 요충지임을 보여준다.</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div style="text-align:center;" align="center"><img src="http://www.hisking.com/data/editor/1511/e09d540e1a49acd5f270b8a2788c1f79_1446713888_4539.jpg" title="e09d540e1a49acd5f270b8a2788c1f79_1446713888_4539.jpg" style="font-size:13.2px;" alt="e09d540e1a49acd5f270b8a2788c1f79_1446713888_4539.jpg" /></div> <p> </p><p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 </p><p align="right"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right;background-color:rgb(255,255,255);">작성 : 마루밑다락방(김동주)</p><p align="right"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작성일자 : 2015년 10월 31일</span><span style="line-height:1.5;">​</span></p>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6-10-05 11:28:42 역사 스페셜에서 이동 됨]]]></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5-10-31T10:56:59+09:00</dc:date>
</item>


<item>
<title>저희나라와 우리나라의 표현 차이</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62</link>
<description><![CDATA[[특집기획=마루밑다락방] <span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필자는 그제 14일, 여의도의 63빌딩에 위치한 컨벤션센터에서 '동아시아 뉴미디어 포럼'을 듣던 중, 강연자가 대한민국을 지칭할때 우리나라가 아닌, 저희나라라는 표현을 쓰였다. 순간 발끈 하여 따지려 들뻔 했지만, 강연의 흐름을 깨뜨릴까 감히 따질수가 없었다.</span>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그런데 필자의 이러한 행동에 저희나라라는 표현이 뭐길래 필자가 이리도 발끈하나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희나라라고 쓰면 안되는 이유를 설명드리고자 한다.</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br /></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우선, 우리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두가지가 있는데, (1)번이 첫번째 표현이며, (2)번이 두번째 표현 이다.</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1999998092651px;line-height:22px;">(1) 우리 동네에는 슈퍼마켓이 매우 많다. 너희 동네도 그러니?</span><br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1999998092651px;line-height:22px;" /><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1999998092651px;line-height:22px;">(2) 우리 그만 놀고 집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걱정하시겠다.</span></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font face="돋움"><span style="font-size:13.1999998092651px;line-height:22px;">여기서, </span></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1999998092651px;line-height:22px;">'우리'는 화자가 청자를 포함하지 않고 자신과 그 주위의 사람을 집단적으로 가리키는 경우에만 '저희'라는 겸양어가 있습니다. 화자가 자신과 자신의 집단을 낮춰 말할 수 있으나 청자를 포함하는 집단을 낮춰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span></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위와 같이 저희가 쓰인 잘못된 표현 이다.</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1999998092651px;line-height:22px;">(1) 저희 동네에는 슈퍼마켓이 매우 많습니다. 선생님 동네도 그렇습니까?</span><br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1999998092651px;line-height:22px;" /><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1999998092651px;line-height:22px;">(2) *저희도 이제 집에 들어가시지요. 어른들께서 걱정하시겠습니다.</span></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br /></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즉, 따라서 <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1999998092651px;line-height:22px;">'우리'는 청자를 포함하지 않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때의 '우리나라'도 '저희 나라'로 낮추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나 '민족'과 같은 집단은 비록 청자가 포함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구성원이 낮추어 말하기에는 너무 클뿐더러 또한 다른 집단과 다른 어떤 절대성(그리하여 겸양을 허용치 않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span></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br /></div>
<div style="font-family:'957317_10';font-size:13.3333330154419px;line-height:20px;">간단히 말해, 나라는 어떠한 이유라도 우리라고 표현해야 하며, 그 이유로는 나라만큼 큰 존재가 없기 때문이니, 만약에 저희나라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면, 팔푼이거나, 이완용같은 매국노들이니 조심하도록 하자.</div>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6-10-05 11:28:42 역사 스페셜에서 이동 됨]]]></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5-10-16T21:26:16+09:00</dc:date>
</item>


<item>
<title>정지장군</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61</link>
<description><![CDATA[<p>고려시대, 왜구를 물리친 인물이라 하면은 최영 장군과 조선의 건국자인 이성계 장군을 알고 있고,</p><p>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뒤로 숨겨진 인물이 한명 있었으니···.</p><p> </p><p>그는 바로 본관은 하동이요. 첫 이름은 정준제, 나주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려서 부터 풍채가 좋고 성격이 관대하며,</p><p>포부가 큰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평소 독서하기를 좋아했고 대의에 통탈하였다고 한다. 그는 해설을 들으면 눈앞에 훤하게 터지는듯 하였으며,</p><p>그리고 들어 오나 나가나 손에서는 책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p><p> </p><p>충숙왕 원년(1314)에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문화성에서 중서주서의 벼슬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38세가 되는 해인 충숙왕 9년 (1322)에 아들 정이를 출생하였는데,</p><p>37세 때인 공민왕 7년 (1358)에 음사 (부모의 공으로 특채되어 관리가 됨을 음사라 한다.) 로 군기사에 근무하다가 공민와 11년 (1362)10월 41세로 과거에 급제하여</p><p>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하였다.</p><p> </p><p>사실 그는 다른 당시 인물들과 비교하면 나이가 어린 축에 꼽혔다. 당시 유명세를 떨치었던 정몽주는 10세 위, 이성계는 1세 위, 최문선은 22세 위, 최영 장군은 31세 위이였다.</p><p>그리고 정몽주와 최무선과의 친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알려져 있다.</p><p> </p><p>무엇보다 그는 고려의 가장 우환이였던 왜구로부터 나라를 수호함으로써 고려 해군의 위용을 드러낸 바다의 영웅이다.</p><p>하지만 말년에는 중상모략으로 고려 우왕의 복위사건 등에 연루되어 청주로 유배하기로 하였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석방된 뒤 공양왕 3년 4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였다.</p><p> </p><p>그를 고려사로 기록하기를 정지의 초명은 준제니 나주인으로 용모가 괴위하고 성품이 관후하였다. 어려서 큰 뜻이 있어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대의를 통하여</p><p>사람들과 더불어 해설함이 활달하였으며 출입에 항상 서적을 가지고 다니는 일은 아마 고려국이 생긴 이래 처음있는 일이요.</p><p>앞으로도 처음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지금은 보통으로 칭찬하지만 역사에 기록되어 준제의 이름이 빛날 것이므로 이 작은 행동 하나만 가지고도 존경 받는 인물로 후세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p><p> </p><p>이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1402년 조선 3대왕인 태종 이방원에 의하여 경렬의 시호가 내려지고 그의 업적이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었으며, 1644년 그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시 동명동 경렬사가 세워지게 되었다.</p><p>참고로 그는 단군왕검을 비롯한 12명의 왕과 재상 8명이 배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업적에 따로 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 이미 당시에 영웅으로 평가해 버렸기 때문이였다.</p><p> </p><p>그의 이름은 "정지 장군"이다. </p>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6-10-05 11:28:42 역사 스페셜에서 이동 됨]]]></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5-10-02T18:42:08+09:00</dc:date>
</item>


<item>
<title>강릉 임영관</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60</link>
<description><![CDATA[<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강릉 임영관은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용강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공민왕 시기 때 세워진 객사이다. 여기서 객사란? 옛날 중앙에서 오는 관리나 내빈을 대접하여 묵게 했던 곳을 말한다. 오늘날 호텔이나 모텔 등 숙박시설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숙박시설에 불과한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이라는 지역이 당시 지방 행정의 중심지 였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목조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강원도 강릉시의 임영관이 유명했던 것이다.</p>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 </p>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임영관의 역사를 조금 둘러보자면, 처음 지어질 당시, 객사의 이름은 임영관이었다. 지금의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객사문은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그 중후미와 구조의 정교함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또한 기둥의 배흘림은 그 어느 건물보다도 심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인상을 주며 장식화 경향이 심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 1308년 건립)보다 건축연대가 앞선 것으로 생각된다.</p>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강릉 임영관은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세워진 목조건물로 그 무게있고 두터워 보이는 아름다움과 섬세한 솜씨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인정되고 있다.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었다.</p>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 </p>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현재에는 노후와 변형으로 완전 해체 보수 하였으며, 공민왕의 친필로 전하는 임영관 현판이 임영관의 철거시 임영관 삼문에 걸었던 것을 2006년 10월 임영관 복원 준공 후 본래의 위치인 전대청에 옮겨 걸었다.</p>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 </p>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사진 | 촬영자 : 마루밑다락방 | 일자 : 2014년 10월 04일]</b></p>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 </p>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img src="http://www.hisking.com/data/editor/1509/20150922121106_vrezzvdy.jpg" alt="IMG_1589.JPG" style="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480px;width:600px;" /></p>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6-10-05 11:28:42 역사 스페셜에서 이동 됨]]]></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5-09-22T12:15:37+09:00</dc:date>
</item>


<item>
<title>관노가면극</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59</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img src="http://hisking.com/data/cheditor4/1410/e42f079cc7cc49975fc158f2e9180153_20141004172104_locnurvh-1.jpg" alt="IMG_0069.JPG" style="margin:0px;padding:0px;border: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height:480px;width:600px;" /></div>
<p style="padding:0px;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br style="font-size:13.2px;" /> </p>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font face="맑은 고딕">[사진 - 마루밑다락방]</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br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강릉 단오제를 보았거나 단오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관노가면극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관노가면극은 매년 5~ 6월달에 열리는 단오때 강릉에서 볼수 있으며 주로 탈놀이로 춤과 동작을 위주로 하는 국내 유일의 무언 가면극이다. 그리고 관노 가면극은 이름그대로 관노라는 특수한 신분계층에서 이루어지는 놀이이다. 우리나라 다른 가면극에서 볼수 있는 양반에 대한 풍자나 저항의식 보다는 단오라는 제의를 중심으로 서낭제 가면놀이의 전통을 충실히 엿볼수 있어 흥미롭다.</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다음과 같은 순서로 관노가면극이 진행된다. 한번 살펴볼까?</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제일 먼저 첫번째 마당</b>은 장자마리의 연희 시작이다. 장자마리가 무엇이냐면... 삼각형 고깔을 쓰고 삼베로 짠 마대자루와 같은 옷을 입고 나와, 타령 장난에 맞추어 한바탕 춤을 추어 들어간다.</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두번째 마당</b>은 양반광대가 꼭지에 호수가 달린 삼각형 고깔을 쓰고, 직령(直領)을 입고 부채와 긴 담뱃대를 손에 쥐고 나온다. 뒤따라 소매 각시가 나온다. 두 사람이 타령 장단에 맞추어 한바탕 춤을 추며 나중에는 굿거리 장단으로 남무를 춘다. 이 과정에서 양반광대가 소매각시에게 구애를 하며,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다.</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세번째 마당</b>은 시시딱딱이가 등장해 양반광대를 놀리고 소매각시를 희롱하는 등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한다. 두명의 시시딲딱이는 얼굴에는 무서운 탈을 쓰고, 손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칼을 들었는데, 염불·타령 장단에 돌단춤을 추며 “쉬, 쉬”하고 나무 칼로 이곳 저곳을 두드리면서 돌아다닌다.</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네번째 마당</b>은 앞 마당에서 시시딱딱이의 희롱으로 억지춤을 추었던 소매각시가 양반광대에게 잘못을 빌지만 양반광대는 소매각시를 질책하며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소매각시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양반광대의 긴 수염에 목을 맨다.</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다섯번째 마당</b>은 소매각시의 자살소동으로 양반광대는 오해를 풀고, 두 사람이 화해한다. 양반광대와 소매각시가 함께 흥겨운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던 악사와 구경하던 관중들도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것으로 연희가 끝난다.</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관노가면극은 한참 보다보면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관노가면극이 흘러 내려온 역사 혹은 구성을 알고 보면 더욱 재밌기 나름이다.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font face="맑은 고딕" size="3">마지막으로 관노가면극와 다른 가면극에 대해서 일곱가지 정도로 특징을 나누어 보았으니 나중에 관노가면극을 보게 된다면 참고 하였으면 한다.</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b>첫번째 </b></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서낭제 계통극으로 팻대라는 신격 상징물을 모시는 연희를 하여 단오제라는 공동부락제 정신을 구현하고 있고 또한 토착 놀이를 시사한다. </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b>두번째 </b></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한국 가면극 중에서 유일한 무언극으로 춤과 몸짓언어 즉 영어로 마임(mime)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묵극양식이다. </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b>세번째 </b></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관민 공동 놀이로서 놀이자가 관노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다. </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b>네번째 </b></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양반 광대의 희화화를 통한 해학성을 나타내며 희극적 요소와 익살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b>다섯번째 </b></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소매각시의 행위를 통하여 규벌성, 도덕성, 정조관을 엿보게 한다. </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b>여섯번째 </b></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장자마리의 모의적 행동에서 풍요를 기원하며 벽사진경의 의미를 찾을수 있다. </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b>일곱번째 </b></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시시딱딱이를 통한 예방주술적 의미와 내용상 갈등 요인을 충실한 극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ne-height:22px;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medium;line-height:24px;">2015년 09월 21일 편집</span></div>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6-10-05 11:28:42 역사 스페셜에서 이동 됨]]]></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5-09-21T17:18:46+09:00</dc:date>
</item>


<item>
<title>강릉 건금마을 용물달기 행사</title>
<link>https://www.maru.or.kr/history/258</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text-align:center;"><img src="http://hisking.com/data/cheditor4/1410/e42f079cc7cc49975fc158f2e9180153_20141004180201_anoahkkh-1.jpg" alt="IMG_1616" style="border:0px;width:600px;height:480px;margin:0px;padding:0px;vertical-align:middle;max-width:600px;" /></div>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13.2px;font-family:'돋움';color:#333333;line-height:22px;"><br style="font-size:13.2px;" /> </p>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text-align:center;"><font face="맑은 고딕">[사진 - 마루밑다락방]</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font-size:medium;">필자가 사는 지역에서 용물달기 행사를 하길래, 생전 처음보는 행사라 유심히 보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사진 찍은것과 함께 알아보다 보니 건금마을 용물달기 행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 </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font-size:medium;">우리나라는 절기나 크고 작은 명절들이 많다. 그중에서 필자가 본 건금마을 용물달기 행사는 대표적인 지역 행사이다.</span></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font size="3" face="맑은 고딕">그럼 필자와 함께 건금마을 용물달기 행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font size="3" face="맑은 고딕"><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font size="3" face="맑은 고딕">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군이라하여 금산(琴山)이라 하였다가 후에 강릉김씨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금(琴)'자 대신에 음이 같은 '금(金)'자를 써서 금산리라 한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이 마을 앞에서 넓은 들과 남대천이 있다. 뒤로는 솔봉이 있는데 산줄기가 세 갈래로 뻗어내려 솔밭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font size="3" face="맑은 고딕">강릉시 외곽에 위치한 금산리는 현재 267가구에 558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서 2월 23일 음력 정월대보름을 맞아 '건금마을 용물달기'놀이가 펼쳐졌다.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font size="3" face="맑은 고딕"><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font size="3" face="맑은 고딕">참고로 용물달기는 용수 기원제 형식으로, 예로부터 절월 대보름 전날 저녁 짚으로 수신인 용 모양을 사람 크기로 만들어 마을 동서남북 네 곳 우물에 용을 잠시 담갔다가 자정무렵 꺼낸 다음 임경당 우물로 옮겨 제사를 지냈다. (재)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주관으로 '작은공동체 전통예술잔치' 지원 축제로 행해진 올해 용물달기 놀이는 마을 주민은 물론 지역 주민 및 외부 관광객들이 다함꼐 참여할수 있도록 오후 3시 가량부터 진행되어 일몰 이후 휘영청 달이 뜬 가운데 달집태우기 행사로 끝났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어른 아이 할 것이 없이 이 놀이를 마을 대동제로 흥겹게 즐기는 모습이였다. 처음 이 놀이를 찾은 외부 관광객들 역시도 그 참여인원의 규모와 마을 분위기, 푸짐하게 음식을 만들어 나누는 축제를 즐기며 그야 말로 인심(人心)을 체감할수 있다.</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font size="3" face="맑은 고딕"><br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font size="3" face="맑은 고딕">건금마을 용물달기 행사는 강릉김씨 집안에서 행해지기 시작하여 현재는 건금마을용물달기보존회 주관으로 마을 주민 전체가 동참해 행해지는 정월대보름 축제가 되었다. 용물달기가 행해지는 임경당은 조선시대 중종때 강릉의 12향헌 중 한 사람인 김열의 고택으로,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 46호로 지정되어 있다. </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font size="3" face="맑은 고딕">강릉김씨 집안에서 행해진 정월대보름 행사지만 이곳 우물을 공동으로 사용한 마을 주민들도 동참하며 오늘날까지 지속되어가고 있다. 용물달기는 "용이 물을 달고 온다"는 뜻으로 우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font></div>
<div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13.2px;list-style:none;margin:0px;padding:0px;color:#333333;line-height:22px;">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inherit;font-family:inherit;"><font size="3" face="맑은 고딕">500여년 역사를 가진 건금마을 용물달기 재연이 시작된 때는 오후 3시경이다. 마을회관에서 풍물패를 앞세운 가운데 마을을 돌며 지신밟기를 하는데, 이때 짚으로 만든 용을 수백 명이 양 옆으로 붙잡고 가는 행렬과 풍물패 뒤를 이어 마을 주민들이 저마다 물동이를 하나씩</font></p>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inherit;font-family:inherit;"><font size="3" face="맑은 고딕">이고 지고 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또한 용이 불을 내뿜는 모습을 형상화한 모습이 인상적인데, 용이 내뿜는 연기는 잡귀와 액을 쫓고 마을을 정화하는 의식의 하나로서 세심하게 만들어진다. 용을 만드는 방법은 다양한데, 건금마을에 사는 어임수, 김흥남, 최근우의 고증에 따르면 짚으로 먼저 줄 꼬기를 한 뒤 줄 드리우기, 줄 엮기, 줄 말기 등의 순으로 용을 네댓 개 만든다. 사람이 어깨에 메고 달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 수십 명이 들어 나르거나 암수로 나누어 만드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짚으로 용을 만드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약밥을 시루에 찌고 백설기를 하여 제물을 장만한다.<br />제례는 임경당 우물 안에 넣어두었던 짚용을 꺼내놓고 우물 앞에서 거행하는데, 유교식 축문을 간단하게 읽는다. 신주는 ‘영정용왕지신(靈井龍王之神)’이며 축문 내용은 용왕신에게 물이 잘 용출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제물을 차려 빈다는 것이다. 임경당 뒤, 우물을 들여다보니 꽤 깊이가 된다.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마을 주민과 참관객들은 뒤꼍 담장 안쪽을 에워싸고 건금마을만의 정월대보름 의식을 관람했다. 전통 제례를 경험할 일이 거의 없는 아이들 역시 신기하게 이 제례를 참관했다.<br />제사가 끝나면 사람들이 물 뜰 그릇을 하나씩 들고 용을 새끼줄에 매달아 들고서 “용물달자! 용물달자!” 외치며 동서남북 사방의 샘터로 가 용에게 물을 적시고 끌고 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샘터 물을 용 뒤에 조금씩 뿌리다가 임경당 우물까지 와서 물을 붓는다. 물을 뜨러 나설 때는 나무막대기로 물그릇을 두드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들판을 향해 새 쫓기를 하며 마을의 나쁜 액을 쫓는다. 주민들이 용을 앞세우고 사방 샘터에서 “용아 용아 물달아라”를 외치며 물을 떠다 다시 임경당에 붓는다. 이곳은 가뭄이 시작되기 전 물줄기가 풍부한 샘에서 물을 길어 우물에 부으면 그 또한 물이 풍부해진다는 믿음에 바탕한 세시풍습이다. 이후 마당 앞에서 대나무를 들고 한바탕 흥겹게 춤을 추는데 이 또한 건금마을 용물달기의 독특한 의식으로 마을 공동체의 소속감을 고취시킨다. 모든 행사가 끝나면 우물 옆에 용을 말아 정히 모시고 음복을 한 뒤 약밥 시루를 들고나와 참여한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font></p>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inherit;font-family:inherit;"><font size="3" face="맑은 고딕"><br /></font></p>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inherit;font-family:inherit;"><font size="3" face="맑은 고딕">건금마을 부녀회에서 정성을 들여 넉넉히 준비한 약밥과 소고기무국과 갖은 나물, 갓 절인 김치와 깍두기를 곁들여 떡과 부침, 동동주와 묵 무침 등으로 대보름 음식을 나누어 먹는 가운데, 임경당 마당 한쪽에서는 떡메로 찰떡 만들기 체험을 하는 사람들과 그 곁에서 난로에 구운 고구마와 식혜를 즐기며 그야말로 잔칫집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신명 넘치는 잔치 분위기에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달집태우기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저녁 7시경 해가 넘어가자 달집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이미 대형 달집은 사람들이 달아둔 소원지로 한 가득이다. 풍물패와 함께 마을 주민들이 달집을 둘러싸고 한 해의 무사안녕과 풍년을 빈다. 달집이 선 빈 들이 사람들의 소원으로 꽉 들어찬다. 달집에 불을 놓자 그 꼭대기까지 단번에 불이 솟는다.</font></p>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inherit;font-family:inherit;"><font size="3" face="맑은 고딕"><br /></font></p>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inherit;font-family:inherit;"><font size="3" face="맑은 고딕">임경당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별당 건축물인 임경당은 김광헌의 장자 김열 선생의 아호에서 유래했다. 김열 선생은 이율곡과 동시대 사람이다. 임경당 평면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전면에 퇴청이 있고 대청 2간과 방 1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은 여름을 위한 공간으로 전면에 있는 굽널 네 짝 세상 분합문은 ‘들어열개’에 의해 전면이 개방되어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게 하였다. 대청 바닥은 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놓은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우물 천장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은 대청과 방 사이에 사분합문을 두어 큰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있고, 실내 환기 및 통풍을 위해 전면 벽체에는 개폐 가능한 환기창을 두고 있다. 퇴청에는 난간이 있고 퇴랑은 원호로 아름답게 만들었다. 팔작지붕 형식의 1고주 5량 구조로 된 익공계 양식의 건축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825년 증수한 것으로 몇 차례의 보수 공사가 있었다. 전면 기둥은 둥근 기둥이며 외부로 향하는 창호는 겹 창호로 짜여져있다. 별당 측면에 ‘ㅁ’자 배치의 본 채가 있고 제월루와 사당이 있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전형적인 건축물로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다. </font></p>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inherit;font-family:inherit;"><font size="3" face="맑은 고딕"><br /></font></p>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inherit;font-family:inherit;text-align:right;"><font size="3" face="맑은 고딕">2014년 10월 4일 편집</font></p>
<p style="list-style:none;padding:0px;font-size:inherit;font-family:inherit;text-align:right;"><font size="3" face="맑은 고딕">2015년 09월 21일 편집</font></p></div>

[이 게시물은 마루밑다락방님에 의해 2016-10-05 11:28:42 역사 스페셜에서 이동 됨]]]></description>
<dc:creator>마루밑다락방</dc:creator>
<dc:date>2015-09-21T17:05:38+09:00</dc:date>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