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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의 쇠망에 관해: 1386~1490년 사이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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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아 왕국의 쇠망은 13세기 초반 호라즘과 몽골의 침략으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몽골의 봉신이 된 조지아는 지배층 간의 입장 차이로 동서로 갈라지고, 기타 봉신들 역시 독자적으로 행동하게 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록 기오르기 5세가 일칸국의 혼란을 틈타 분열된 나라를 재건하고, 신속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에 역할을 했지만 영토와 통치력은 예전만큼 비할 바가 아니였다. 봉건 군주정 체제인 조지아 왕국의 특성상 혼란이 찾아오면 가신들은 제 갈길을 찾을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1386년 금장한국의 토크타미시 한과 연대해 반티무르 정책을 펼쳤던 조지아 왕국은 티무르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으며, 수도 트빌리시는 적의 군홧발에 짓눌렸다. 이는 기오르기 대왕이 세워논 제 2의 황금기의 종식을 뜻했으며 왕국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봉신이었던 서조지아의 이메레티는 왕국으로 재독립하였고 기타 봉신들도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희망은 없지 않았다. 단, 변화가 없으면 사라질 것이 운명이었다.

 

 중국 원정 중에 사망한 티무르 사후에 시작된 티무르조의 쇠퇴는 왕국을 전란의 상처에서 회복시켜 주는 데에 일조했으며, 1414년 국왕 알렉산드레 1세(제위:1412~1442)가 봉건 제후들을 굴복시키고 제 3의 통합을 이루면서 다시 희망이 찾아오는 듯 했고, 조지아 정교회와 함께 외침으로 황폐화된 나라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티무르조가 쇠락한 틈을 타 등장한 카라 코윤루는 왕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1431년과 같은-산발적으로 일어난 양국의 충돌은, 왕국의 공물 지불 요구 거절을 구실삼은 카라 코윤루의 침략으로 커졌다. 자한 샤(제위:1420~1468)의 지휘 아래 파죽지세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카라 코윤루의 진격에 수도 트빌리시가 함락되어 약탈을 겪어야 했다. 국왕의 권위는 실추되었으며, 알렉산드레 1세는 왕위에 물러나 '아타나시우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원에 은거하였다.

 

  일찍이 타마르 여왕(제위:1184~1213) 시대의 황금기부터 영지 소유를 비롯한 국내 봉건귀족들의 권한은 대대로 세습되었으며, 13세기 중후반 호라즘과 몽골의 연이은 침략으로 왕국이 쇠약해지자, 이들은 점차 왕국으로부터 일탈을 꿈꾸었다. 몽골과의 관계에 대해 지배층들끼리 반목한 결과 이메레티가 분립했고, 기타 봉신들 역시 그러했다. 일례로 삼츠헤 공국의 사르기스 자켈리가 몽골의 봉신이 된 것을 들 수 있겠다. 제 2의 전성기가 끝난 뒤에도 이러한 행태는 반복되었으며 봉건적 주종관계는 점점 해체되어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위 문단에서 언급한 카라 코윤루의 침략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왕국에겐 기사회생이란 없었다. 카프카스 지역 강대국으로써의 위상을 되찾기 힘들어졌고, 신강군약이 찾아온 것이다.

 

  신강군약의 분위기 가운데, 국외의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1461년 트레비존드 제국이 오스만에 넘어갔다. 특히, 트레비존드 제국을 세울 때 조지아가 깊숙히 관여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조지아는 내부 사정으로 인해 트레비존드를 도우지 못했다' 고 나온다. 무슨 의미일까, 왕이 국외 원정에 나서면 본국의 귀족들이 모반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고, 적수가 한둘이 아니라 a국을 원정 중에 b국이 본국을 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동방의 기독교 국가가 이슬람의 수중에 떨어짐은, 기독교를 믿는 조지아가 주변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했다. 카라 코윤루나 악코윤루, 오스만제국이 이슬람 국가였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서방은 십자군을 일으키면 조지아군 10만이 참여하리라 예상했지만, 카리스마로 귀족들을 제압하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다비트 4세 시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화약고에 불이 붙으면 곧 터질 것만 같던 분위기라 해야 할까. 1463년 기오르기 8세가 바그라트의 토지를 침탈하자, 평소 국왕의 정통성을 의심해온 귀족들은 이를 구실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삼츠헤 공작 큐바르큐바레 3세를 비롯한 서조지아의 유력한 귀족들까지 가세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기오르기 8세는 서조지아 제후들이 주축이 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치호리 들판에서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과정이 어찌 진행되었는지 자세히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전투에서 기오르기 8세의 국왕군이 패배했고, 왕 자신은 세력이 약화되어 2년 후 왕위를 찬탈당한 것이다. 일종의 사형선고가 내려진 셈이랄까, 이후 왕국은 명목상 존재했고 구심점은 사라졌으며, 혼란을 틈탄 카라 코윤루와 뒤이은 악코윤루의 침입은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1490년 왕국은 조그마한 봉건 제국(諸國)으로 파편화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통일된 왕국의 멸망은 단지 제압하기만 했지 일정한 틀을 바꾸지 못했고, 강력한 권력을 지닌 기득권 지배층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내전을 일으키며 국가를 8개로 조각낸 것, 티무르의 침략이 끝난 지 얼마 않 되어 찾아온 투르크멘계 정치체들의 침입의 조합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내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외부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때 강력했던 왕국의 종말을 다룬 기록을 눈으로 보고 공부하는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엔 냉소감과 애석한 감정이 남는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15세기 조지아를 타산지석삼아 기득권이 나라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 결과는 비록 전개과정이 다를지라도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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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첫째, 인물이 무엇을 했다는 식의 서술을 지양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글을 쓰고자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움에 남는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인가 생각해본다. 둘째, 글에서 봉건 군주정에서 전제 군주정으로 가야지만 조지아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제군주정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왜 1461년 오스만의 트레비존드 침략 때 조지아가 도우지 못했는가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 봉건제의 결함을 살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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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피아스트님의 댓글

아아, 한가지 간과한 사실로 인해 제 지식의 부족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티무르에 이어 조지아 왕국은 1502년까지 이어지는 이민족-투르크멘 족(자세히 말하면 투르크멘 부족연합 국가로, 카라 코윤루와 악코윤루가 있다)의 침략으로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18세기 다게스탄족(레키아노바)처럼 번경지대만 약탈하고 돌아간다면야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왕국의 수도 트빌리시까지 포위공격, 약탈 및 파괴(1444, 1488)를 일삼았을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일국의 수도까지 위협한 정도면 봉건 사회인 조지아 왕국 내에 일정 영향을 주기 마련이지요. '트빌리시 정부'가 잇다른 침략을 막지 못해 권한이 약해지자, 이미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화되있던 귀족들은 분리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 1490년 왕국의 해체에 일조합니다. 결과적으로 왕국의 해체는 국내외적 트러블이 주된 이유라는 겁니다. 투르크멘족의 조지아 침략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가면서, 지난 2월 본 글을 쓰면서 외적 트러블을 소훌히 다뤘다는 생각이 들어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저에게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 글을 수정 및 보완해 보다 더 좋은 글을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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