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일반

을묘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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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과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 정부에서 왜인들의 통제를 강화하고 교역규모를 줄이자
이에 불만을 품고 왜인들이 1555년 명종 10년에 배 70여척을 동원하여 전라남도 연안지방을 습격한사건으로 
먼저 영암과 진도의 보루를 불태우고 노략질과 약탈을 자행하였고 곧이어 장흥, 강진에도 침입하였다.
이때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은 침입한 왜적에 비해 심각한 열세였는 바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원적(元積)은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영암 달량포로 출전했으나
오히려 왜구에게 포위되어 원적과 한온은 항복했다가 피살되고 이덕견은 항복하는 척 하다 탈출했다.
전라우수영의 조선수군도 기습공격에 허둥거리다가 수사이하 약 30여척의 전함과 1천명이 넘는 수군이 수장되고 나머지 군사는 놀라서 흩어졌다.
 급히 전라좌수영 수군이 출발했으나 함선의 수요와 병력면에서 절대 열세를 보여 내륙의 약탈을 방관해야 했다.
전라도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군사가 붕괴하자 침입한 왜구의 횡행을 막을 수 없었다.
전라병사와 장흥부사를 사살한 왜구는 5월 하순까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어란포, 완도, 장흥(長興)·강진, 진도 등을 약탈,
주민을 사살하고 민가를 방화하면서 약탈하다가 다시 영암으로 침입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금군(禁軍) 등 서울의 정예군사를 동원함과 아울러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공사노(公私奴)·승도(僧徒) 등을 강제 징집하였다
또한 부산포에 있는 일본인들도 전부 내보내 삼포 왜인의 준동을 방지하고 침입한 왜구의 진공을 막도록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각각 장수를 파견했다.
후원군이 도착하자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이 군사를 이끌고 영암으로 가서 남치훈군사와 합세하여
5월 25일 영암 해변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왜구는 퇴각하는 길에 녹도(鹿島)를 습격한 데 이어
6월 27일 제주도를 습격했으나,
상륙한 왜구를 목사
김수문(金秀文)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그해 10월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宗義調)는 이들 전라남도 해안가를 습격한 왜구의 목을 잘라 보내어
죄를 사과하고 세견선의 증가를 호소해 왔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승낙, 세견선 5척을 증가시켜 교린책을 폈다. 
일부에서는 을묘왜변을 임진왜란의 전조로 보며
조선 정부도 이 사건을 계기로 비변사를 상설기관으로 하고 왜구와의 싸움에서 취약점을 보인 맹선을 판옥선으로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재정의 부족으로 맹선의 대치는 지지 부진하여 30여년이 걸렸다.
다행히 임진왜란 전에 완료하여 이순신 장군이 활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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