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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제 19 대 명종 : 변란의 시대 (3) : 정 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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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들의 대부로서 정변을 진두지휘 했던 정 중부는 벼슬이 계속 높아졌으나,

칼든 젊은 놈들이 하도 설쳐대는 통에  실권이 없는 속빈 강정 꼴이 되고 말았는데.

기특하게도 아들놈이 그 지독스럽던 이 의방을 잡아주는 덕분에 70이 다 된 나이에 명실상부한 집권자가 될 수 있었다.

살육밖에 모르던 과격한 놈들을 대신하여 원숙한 나이에 새로이 집정이 된 정중부가 국가를 위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안은,

현재 진행 중인 조 위총의 반란과 그로 인해 들떠버린 민심 그리고 피폐해진 민생 등이었을 것이나,

나이만 많았지, 국정 철학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것들은 죽은 젊은 놈들 못지 않게 빈약했던 그는

우선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 하는데 열을 올렸다.

 

조 위총의 난은 정치 투쟁 보다는 묘청의 난 이후 소외되었던 서경 지역의 지역민들이 차별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란의 성격이 강했는데,

이 의방이 개경에 근근이 남아있던 서경 출신들을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도륙하는 바람에 악화된 면이 있었으므로,

명종은 이 의방이 암살 된 것을 조 위총에게 알리고 회유하려 하였으나,

조폭 같은 무신들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허수아비 왕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조 위총은 항거를 계속하였으므로,

별 소득도 없이 임금의 체면만 손상되고 말았다.

 

정 중부는 기왕에 이 의방이 준비한 병력이 있으므로 윤 인첨과 두경승에게 토벌을 명하였고,

무용이 이 의민 못지않았던 두 경승은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때려잡으며 진군하여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양성은 여전히 난공불락이었으로 윤 인첨은 지구전을 펼치게 되었는데,

덕분에 성에 갇혀 줄어드는 창고의 식량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만 봐야했던 조 위총은 항복을 고려한.....것이 아니라,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의종이 신하들에게 시해되었음을 알리고, 원병을 청원하는 등 외교전을 전개하였다.

이는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었고, 금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집어삼킬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셈이었으나,

빠른 성장만큼이나 빠르게 보수화, 문약화 되어 버린 그들은,

남송과 이제 열 살 남짓한 테무진이 뛰어다니는 몽골 초원에 신경쓰느라 고려를 침입할 여력이 없었으므로,

조 위총의 사신을 고려로 압송하고 말았다.

대신에 해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금나라의 배 백여 척이 동해 쪽으로 침입해 노략질을 하였다 한다.

어쨌든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된 상황이었는데, 이 와중에 남쪽에서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다.

    

공주의 명학소에서 숯을 구어 먹고 살던 망이와 망소이는

고려의 신분 질서가 흔들리고 잦은 변란으로 사회의 혼란이 지속되자,

기회라고 생각하였는지 굶주린 무리들을 모아 봉기하였다.

, 소 ,부곡은 그 기원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유구한 전통의 천민집단으로서,

주로 전쟁 포로, 유민, 반역자의 자손들을 모아 살게 한 마을들을 그렇게 불렀고, 반란이 일어났던 지역을 통째로 강등시켜 만들기도 하였다 하므로,

그 주민들은 신분은 양인나, 천민처럼 살아야 하는신세였다.

따라서 두 망망이들이 거지 떼들을 모아 일으킨 반란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에 시달리던 주민들의 호응을 받아,

전통적 요충지 공주를 점령하였고 이어 예산현까지 위협하는 기염을 토하였는데,

조정의 정 중부 일당은 조 위총에게 진을 다 빨려 진압할 능력이 없었는지,

명학소를 말 잘 들으라는 뜻의 충순현으로 승격해주고 수령을 파견하여 회유하였다.

덕분에 얻을 것을 다 얻은 남쪽의 두 망망이들이 잠잠해지자.

서경 공략군도 힘을 냈는지 두 경승이 인육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던 평양성을 공격하여 깨뜨렸고,

조 위총을 잡아 효수하였다.

 

나라에 막대한 해악을 끼쳤고 정 중부를 실권자로 만들어 주기도 하는 등, 실로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던 조 위총의 난은 2년만에 이렇게 해결 국면으로 넘어갔으나,

남쪽은 사정이 달랐다.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은 인간의 일반 심리라 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비열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비열함이 이미 생리가 되어 버린 조정의 무신들은 천한 놈들에게 굴복했던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지,

상황이 좀 편해지자 반란의 주동자들을 잡아 처벌하고자 하였다.

두 망망이들은 당연히 길길이 뛰었고.... 재 봉기하였다.

그러나 북쪽을 해결하여 한 숨 돌리게 된 조정은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으므로, 봉기군이 기세를 올린 것도 잠깐이었고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충순현으로의 승격은 없던 일이 되었고, 항복한 두 망망이는 청주목에 수감 되었다는데,

마치 녹두장군의 운명을 보는 듯하다.

 

어찌 되었건 긁직한 반란을 두건씩이나 해결한 정 중부의 도당들은 이제 마음 놓고 권력을 탐하였는데,

이미 고희를 넘긴지 몇 년 된 정 중부는 남 보기에 좀 그랬는지 치사를 하여 막후 조정자로 물러앉았으므로,

조정의 권력은 이 의방 살해의 공신인 아들 정 균과, 장인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났다는 정 중부의 사위 송 유인이 나누어 행사하게 되었다.

일종의 세대교체를 한 것인데,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권력의 남용과 부정부패는 더 심해졌고 서경 지역의 소요사태는 툭하면 일어났으며, 전국적으로 도적이 들끓어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늙은 매부와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던 정 균은 이미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마가 되어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는데,

일국의 공주를 둘째 부인으로 삼겠다는 발칙한 그의 생각은 조야의 엄청난 역풍을 만났고,

청년 장수 경 대승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경 대승은 무사 30여명을 동원하여 대궐에서 궁녀들을 희롱하다 자빠져 자고 있는 정 균을 살해한 후,

금군을 동원하여 송 유인 부자와 민가에 숨어 있던 정 중부를 체포한 후 목을 따버렸다.

1179년의 일이었다. 

 

74년간의 정 중부 인생... 참으로 영욕이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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