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고려사 분류

고려 : 제 17 대 인종 : 묘청의 난

컨텐츠 정보

  • 4,254 조회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이 자겸을 때려잡고 비로소 제대로 된 왕 대접을 받게 된 18세의 인종.....

기뻤을까?

아직 어린 나이었으니 철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랑이가 사라진 산에는 늑대가 출몰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자겸의 난은 정권상층부에서 지네들끼리 지지고 볶은 일이었으므로

당시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저 `~카더라` 수준의 저녁 술 안주감에 불과하였을 것이나.

정치적으로는 외척과 문벌 간의 한판 대결에서,

태생적으로 왕권의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귀족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는 심각한 의미가 있었다.

이는 왕의 처지가 더 악화되었다는 뜻도 되므로,

한참 예민한 시기의 소년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척이나 그리웠을 것이다.

 

묘청은 이자겸의 난이 끝나고, 소년 왕이 폐허 위에서 이렇게 망연자실하며 서있던 시기에 출현하였는데,

이 출신이 모호한 인물은 조정의 비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정 지상 등에게 접근하여,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으니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요설을 늘어놓았다.

음양비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 중의 하나였던 정 지상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속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천도는 기존의 정치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수단이므로 이전에도 툭하면 추진된 바가 있었고,

당시에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손해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이 달변의 인물을 왕에게 소개하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정 지상 등의 비주류는 옮기만 하면 천하가 저절로 앙복할 것이라는 등의 헛소리에 대한 믿음 보다는

현실적인 정치공학적 의도가 강하였겠지만,

이 자겸의 난 한복판에서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며 한 목숨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고,

결과적으로 믿을 놈 하나 없이 홀로 남겨졌다는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던 소년 왕에게,

뭔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언변 좋은 도인은 메시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직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나이의 외로운 소년은

묘청을 자신의 처지를 긍휼히 여긴 열성조께서 보내주신 인물로 확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묘청을 왕사로 삼고 그가 하자는 대로 하였으므로,

서경파는 조정에서 상당한 힘을 갖게 되었다.

 

묘청은 이적을 조작하는 등의 치졸한 수법으로 아직 어린 왕을 홀리며 서경천도를 추진하였고,

서경에 궁을 건설하고 성을 쌓게 하는 등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몇 차례 얻기는 하였으나,

그동안 서경 천도를 추진할 때마다 문제가 되었던 과중한 부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과

기존 개경세력들의 반발이 발목을 잡았다.

대 역사를 시행하다 보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발생되는 각종 사건 사고는 묘청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모면을 위해 남발했던 요설들은 반복될수록 약발이 떨어져 갔다.

적들에게는 조소의 대상이 되고 우군마저 의심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몰린 묘청은

임금을 서경으로 모셔 황제국을 선포하고 천도를 기정사실화하려 한 듯하나,

이 또한 개경세력들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이쯤 되면천도는 물 건너간 것이고 실각 또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일반적인 도인이라면 심산유곡으로 물러나 심신을 닦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나,

이 기이한 인물은 포기하기는 커녕 후세의 단재 선생을 감복시킬엄청난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추종자들을 모아 서경을 국도로 하는 황제국을 선포한 것이다.

 

국호는 대위, 연호는 천개, 국시는 금나라 정벌. 군대는 강아지 이름 비슷한 천견충의군.

소위 위나라를 만든 것인데...

군대의 이름의 뉘앙스나  황제의 자리를 비워둔 것 등으로 보아 인종을 황제로 받들기 위한 일종의 친위 쿠데타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반란을 일으킨 묘청은 순식간에 자비령 이북을 장악하였고,

개경을 급습하여 왕을 확보하려한 듯하나대부분의 허를 추구하는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실제적인 능력은 별로 없었는지시행은 하지 못하였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알려진 개경은 발칵 뒤집혔고,

개경 문벌세력은 이번 기회에 반대파를 박멸하고자 하였으므로어느덧 다 자라 20대 후반이 된 젊은 왕은 다시 볼모신세가 되었다.

 

대군을 이끌게 된 김 부식은 개경에 남아있던 정 지상을 비롯한 서경파들을 도륙한 후 서경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는데,

위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할 추종세력들은 의리도 없이 싸워보지도 않고 바로 항복을 하여 묘청의 영향력이 별 볼일 없음을 증명하였다.

당황한 반란군은 내분을 피할 수 없었고어이없게도 묘청의 목을 잘라 협상을 시도하였는데,

김부식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묘청의 목을 가지고 온 사자를 투옥해 버렸다.

이 꼴을 본 새로운 반란군 지도자조 광은 성급하게 묘청을 죽인 것을 후회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기왕 죽을 몸 여한 없이 싸워나 보자고 대동강 가에 성을 쌓고 저항하였다.

 

고려의 제 2 수도이자 서북방 방어의 요충 서경은 명성 그대로 누가 보아도 상대가 안 되는 김 부식의 대군을 맞아 1년여를 버티어 냈으나

식량까지 만들어주지는 못하였으므로화살에 맞아 죽는 군사보다 굶어 죽는 군사가 더 많아져 결국 함락되었고조광을 비롯한 반란군 지휘부는 모두 자결하였다.

김 부식이나 조 광이나 군사적 능력이 별 볼일 없기는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묘청의 난의 개략적인 전모를 보면,

시작과 진행과정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찌질하기 이를 데 없어도대체 어느 부분이 신채호 선생을 매혹시켰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사건 이후 서경의 지위 격하와 함께 서경세력은 조정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사원세력도 정치에 노골적으로 관여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영원한 여당 문벌 귀족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모두 소멸 되고 마는 지랄맞은 상황이 되었다.

​골수 보수화 된 고려 조정에서 이상주의자들이 발 붙이기란  고목 나무에 꽃 피기를 바라는 꼴과 같이 되었고,

왕의 지위가 조정자에서 얼굴 마담으로 격하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이후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기상은 점차 사라지고, 현실 안주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유학자들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조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국권 상실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단재 선생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움에서 묘청의 난을 조선 일천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한 모양이나,

묘청 그 자체는 아무리 봐도 그냥 요승이었다.

 

어찌 되었건 나라는 안정을 찾게 되었고인종은 다시 권신들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나 보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인종은 예종의 아들답게 왕권을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듯하나,

이 자겸에게 양위했던 전력이나 묘청을 끝까지 편들었던실책 등이 발목을 잡았을 것이고,

친위세력이 씨가 마른 마당에, 전통적으로 야당 역할을 해 왔던 서경세력 마저 사라진 조정에서 문신 귀족들을 제어하기란 지난하였을 것이다.

그나마 이 시기 정국을 주도했던 김 부식이 오리지날 개경세력이 아니라 경주 출신의 옛 신라계열이었으므로,

그 작은 틈바구니가 인종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을까?

 

김 부식도 잘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침을 겪었는데...

김 부식이 정치보복을 두려워 하여 퇴직을 할 때, 그마저 없으면 너무 외로워지게 되는 인종은 그에게 우리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고,

정치가나 군사전략가의 재능 보다는 학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던 김 부식은 우리 민족의 소중한 유산인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인종의 유일한 치적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변변한 치적도 없이 한 평생 시달리기만 했던 인종은 38살이 되는 1146년에 사망하였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새댓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