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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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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 하는데,

살던 동네가 송악이니 그렇게 우길 수도 있겠으나,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0년 가까이 되었고, 고증할 만한 문서도 없으니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좀 거시기하지만. 그냥 그렇다 치자.

6대조 강충은 집에 천만금을 쌓아놓고 사는 엄청난 부자였고조부 작제건은 당숙종의 사생아라는데...이건 뻥인 것 같고부친 왕륭(용건?)은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고 한다.

대대로 앞 글자가 다른 것으로 보아 성씨를 쓰는 전통의 귀족가문은 아니겠고해상 무역으로 부와 세력을 쌓은 평민 출신의 졸부가문이었을 것이다.

고대의 해상무역은 반 해적질이므로 청해진 계열과 어떤 식으로든 연계가 있었을 것이고뭐가 어찌 되었건 난세에 훌륭하게 어울리는 가문이었다.

 

온 집안의 관심과 기대 속에 무럭무럭 자란 아들이 꼴불견의 여타 부잣집 아이들과는 달리 영특하고 늠름하였던지,

아버지 왕륭은 당대의 석학 도선대사를 가정교사로 들이는 등 최고의 교육을 베풀었고,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궁예에게 투항한 뒤에도, 전 재산을 들여 아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였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명문 귀족 가문에 비해 아무래도 손색이 있는 자신의 가문을, 자식을 통해 업그레드시키고 싶은 욕심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나타난 왕건은 부모 잘 만나 허우대만 멀쩡한 그냥 도련님이었을 것이므로자수성가한 궁예에게 처음부터 높이 평가받지는 못했을 것이나,

이 교육 잘 받은 젊은이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난세에 꼭 필요한 탁월한 전쟁수행 능력뿐만 아니라,

전후 처리면 전후처리, 일반 행정이면 일반 행정, 나무랄 데가 없었다.

군주에게 필요한 것들을 고루 갖춘, 그야말로 신임과 총애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였던 이 엄친아는

군주의 신임과 총애가 깊어질수록 호족들의 중심 인물이 되어갔으며 가문의 영향력도 증대하였을 것인데, 

무릇 강한 신하는 군주의 악몽인 법,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던 궁예에게 근본이 다른 왕건은 점점 맞지 않는 신발이 되어갔다.

 

왕건의 최대위기는 궁예가 말도 안 되는 독심술로 반역을 추궁할 때였는데,

그들의 대화를 보면 궁예가 왕건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중간에 마음을 바꾼 듯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궁예가 왜 빼어든 칼을 도로 꼽는, 일생일대의 패착을 두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그 이유가 뭐였든 궁예의 마음 속에, 왕건을 아끼고 신뢰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적에게서 조차 신뢰를 받는 특이한 성품은 이후에도 계속 위력을 발휘하는데,

견훤이 왕을 만들어 줬던 눈치왕 경순왕은 말할 것도 없고. 

아자개는 후백제 왕인 아들이 아니라 그 경쟁자인 왕건에게 귀순했고, 

견훤 본인도 말년에 아들에게 쫒겨나자 필생의 적수에게 의탁하였다.

참으로 기가 찰 일이지만, 어쨌든 이 특이한 성품이,

군대를 부리는 능력은 견훤에 못 미쳤고, 군신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궁예에 비해 한참 부족했던 왕건이라는 인물이,

당대의 걸출한 영웅들을 모조리 꺾고, 발해의 유민까지 흡수하여, 한민족의 중시조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왕건의 일생을 살펴보면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선 당대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돈 많은 호족 가문의 영특한 맏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가장 훌륭한 운일 것이고,

늠름한 외모, 훌륭한 품성 그리고 최고의 교육이라는 엄친아의 3요소를 두루 갖추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운일 것이다.

비록 좀 위험하기는 했어도, 당대의 영웅 궁예 밑에서 전쟁을 배우고 국정 운영의 노하우를 배운 것도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었고,

궁예가 왕권을 강화하며 부린 광태로 인해, 주군 살해라는 치명적인 오점이 희석되어, 쿠데타 이후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한 것도 운이라면 운이고,

하필 이 시기에 발해가 멸망하여전문 전투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왕건의 힘이 되어 줌에 따라, 쿠데타 이후 자칫 와해될 수도 있었던 고려에 응집력을 선사하였다는 것은 천운이었다.

 

남들은 하나도 힘든 운을 겹으로 소유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었지만, 이로써 불행 끝 행복 시작... 은 물론 아니었다.

왕건의 천하는 이질적인 여러 계파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해계, 신라계, 후백제계, 태봉계, 여타 잡세력.. 마치 잡탕과도 같은 이 제 세력들을 모두 끌어 모은 왕건의 능력이 놀랍기는 하지만

세상에 좋기만 한 일은 없는 법통일 후 이들의 조화를 유지하며 국가를 운영해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시대의 골품귀족들을 대치한 신주류라 할 수 있는 당시의 호족들은 태생적으로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였으므로, 

이들의 원심력을 제어하여, 단일 세력으로 유지하기란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29번의 혼인을 통해 여러 호족들을 인척관계로 묶고 통제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혼인 가능한 딸자식이 없는 호족들도 있었고, 첫 번째 부인 유씨는 왕건이 입신하기 전에 맞이한 부인이었으며, 혜종의 모후가 되는 둘째 부인 오씨는 한미한 가문이었고, 호족 출신이 아닌 후궁들도 있었다.

이는 왕건이 부인을 정략적인 관점에서만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리고 29명은 너무 많다.

이쯤되면 부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외척의 희소성이 없어지므로, 별 다른 신분상의 특혜나 특권을 기대하기 힘들어 지게 되는데이는 외척의 발호를 예방하는 순기능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왕실을 보위하여 정권을 공고하게 해주는 역할 또한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만일 혼인으로 국가의 응집력을 높이려 했다면 유력가문 서넛과 혼인하는 것으로 끝냈을 것이다.

 

왕건은 인척관계 뿐만 아니라, 유력가문의 자제들을 일종의 볼모로 하는  기인 제도를 통하여 호족들을 견제하였고, 반란을 억제하였다.

또한 공신이나 중앙의 고관을 그 출신 지방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등의 향직들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일종의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사심관 제도 도 지방통제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 지방 세력들을 제대로 통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호족들의 사병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고려는  호족 연합체 국가 로 출발하였고중앙집권과는 인연이 없는 귀족 중심의 봉건 국가 를 형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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