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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 후삼국시대를 열고, 닫은 인물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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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을 꼽는다면, 아마도 견훤이 수위를 차지할 것이다.

상주 촌구석에서 별 볼일 없는 호족의 장남으로 태어나, 맨주먹으로 상경하여, 스스로의 노력으로 비장의 자리에 올랐고,

서남해로 발령을 받아, 해적들을 비롯한 각종 도적들 및 호족들을 제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천년 신라의 심장을 유린하였고, 고려를 곤경에 몰아넣어 한반도 최강자가 되었으며,

후계자를 세우다 역풍을 만나 고려에 투항하였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손수 무너뜨린 후 황산의 한 절에서 지병이 악화되어 쓸쓸히 죽은 그의 인생....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영욕이 교차한 인생이었다.

    

한나라의 창업주답게 탄생설화가 존재하는데, 그는 기둥만한 지렁이의 자식이었다 한다.

이는 지네설화의 변종으로 보이는데, 지네설화는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설화로서 중국과 일본에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설화라 한다.

아마도 견훤이 아버지인 아자개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나온 설화가 아닐까 한다.

그 외에 호랑이 젖을 먹고 컸다는 설화도 있는데 이는 그의 용맹함을 상징한다 하겠다.

 

견훤은 경문왕 7년인 867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자연재해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는 시기였으나 아버지 아자개가 부농이었다 하므로 배는 곯지 않았을 것이다.

계모와 그 자식들에게 구박을 좀 받은 듯하나, 체격이 남달리 컸으며 용모도 비범했다고 한다.

젊은 견훤은 능력있고 반항적인 젊은이답게,

얼마 되지 않는 집안 재산을 놓고, 동생들과 툭탁거리는 찌질한 짓 대신 대처로 나가 운명을 시험하는 선택을 하였다.

 

별 연고도 없이 상경한 몸 좋은 젊은이는 자연스레 군문으로 향했고, 곧 비범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남 다른 그의 기상은 진성여왕기라는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만나 더욱 빛을 발하였고, 비장 직위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비장은 장군 예하의 부장쯤 되는 직위로서 그의 형편없는 골품으로서는 오를 수 있는 거의 최고위직에 가까운 지위였을 것이다.

이후 무역의 요충지인 서남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해적들과 호족들을 때려잡으라는 명을 받고,

서남해 방수가 되어 경주를 떠나게 되었다.

경주를 떠날 때 데리고 간 병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신라 사정에 많은 병사를 배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서남해에서 근무할 때 창을 베게 삼아 잤다고 하는데, 이러한 성실성과 용감성에 감명을 받아서인 지는 몰라도

그가 이르는 곳 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열흘에서 보름 사이에 그를 따르는 무리는 무려 5천여 명이나 되었다 한다.

이를 계기로 견훤은 강력한 군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진성여왕 6년인 892년 마침내 반기를 들고 일어나 무진주( 전남 광주)를 공취하고 세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공교롭게 이때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도 세력을 일으키는데. 이로 인해 견훤의 반란이 더 빨라졌다는 설도 있다.

견훤은 효공왕 4년인 900년 완산주(전주)에 무혈 입성한 후 도읍을 옮겼고, 의자왕의 복수를 명분으로 백제왕을 칭하였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었다.

이듬해에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대신 아직 복속하지 않고 있는 나주 남쪽의 연해변을 공격하였다.

이 시기에 양길의 수하에 있던 궁예가 마침내 독립하여 후고구려(마진)를 세웠고, 견훤은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려주는 등 한반도의 지배자를 자임하였다 한다.

양길은 궁예를 제압하기 위해 형식적으로나마 견훤에게 복속되었던 듯하나, 허무하게도 옛 부하인 궁예에게 패하여,

견훤에게 천하 대신 궁예라는 호적수만을 남겨주고 죽었다.

양길을 꺾은 궁예는 실력을 갈고 닦아 903년 나주를 공격하였고, 견훤에게 반항적인 나주의 호족들의 협조를 받아 점령할 수 있었다.

 

나주는 견훤에게 인후와 같이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는데 영 신통치가 않았고,

909년 다시 나타난 왕건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였다.

910년 견훤은 미련을 못 버리고 나주를 10일간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912년에는 덕진포 싸움에서 친히 군사를 이끈 궁예에게 패하였다.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견훤이 안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나주에서 이렇게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나주의 호족들이 견훤과 적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918년,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피살되었고 드디어 종결자 고려가 개국하였다.

견훤은 호적수 궁예의 퇴장을 반기고 왕건과 화친하였는데,

아마도 평화롭게 흡수하고 싶었던 모양이나, 오산이었다.

왕건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궁예의 세력을 자기세력으로 만들었으며, 견훤의 아비인 아자개마저 복속시켰다.

아자개...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다.

농부에서 한 지역의 패자로까지 성장한 것을 보면 능력이 뛰어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고,

견훤을 비롯한 자식들도 딸을 포함해서 모두 출중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견훤의 세력이 더 컸는데도 불구하고 왜 아들과 합칠 생각을 하지 않고 왕건에게 갔을까?

 

어찌 되었건 왕건과 화친하는 동안 힘을 기른 견훤은

920년 10월, 1만여명의 군사로,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대야성 공략에 성공하였다.

첫 공격 이후 무려 19년만의 일이었다.

견훤은 숙원을 이루었으나 신라는 목숨 줄이 끊어져 버렸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진례성까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물러난 후 왕건의 반대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공주로 진출하였다.

924년 7월, 아들 신검에게 조물성 (김천)을 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고려와 화친하였다.

이듬해에는 견훤이 친히 기병 3천으로 조물성을 공략하였으나,  왕건 역시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나섰고, 결국 화의하였다.

화의의 조건으로 서로 볼모를 교환하였는데,

견훤은 자신의 조카(혹은 사위)인 진호를 인질로 보냈으며 왕건은 사촌동생인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채 일 년도 못되어 진호가 죽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였고, 견훤은 고려의 책임을 물어 왕신을 죽여버렸다.

당연히 왕건은 열 받았고 분노의 공격을 퍼부어 대야성을 빼앗아버렸다.

왕건의 공격이 심상치 않자 견훤은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여 신라의 근품성을 빼았고 영천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군사를 돌려 서라벌로 진군하였다.

자기 목숨 줄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두 맹수들의 싸움을 넋 놓고 바라보던 신라는

돌연한 맹수의 공격에 화들짝 놀라, 다른 맹수인 왕건에게 구원요청을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궁성을 점령한 견훤은 경애왕에게 항복의 예를 받은 뒤 그를 자진하게 하고 김부를 왕위에 앉힌 후,

왕궁을 약탈하여 진귀한 보물들과 병장기를 빼앗고, 왕의 동생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포로로 잡았으며 귀족 자제들과 실력있는 장인들을 끌고 떠났다.

허를 찔린 왕건은 철수하고 있는 백제군의 후미를 급습하기 위해 정예 기병 5천명을 이끌고 대구 팔공산으로 향했으나,

견훤의 역 매복 작전에 걸려 참패하였고, 왕건 자신도 신숭겸의 희생으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공산 전투인데,

이 전투 이후 견훤은 승승장구하여 그 영역이 오늘날의 충북, 경북 일대에까지 이르렀고 왕건에게 빼앗겼던 나주도 무려 20년 만에 탈환하였다.

신라의 속국화라는 덤까지 얻은 견훤은 명실상부한 한반도 최강자가 된 것이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견훤은 이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다 늦게 인생의 절정을 맞은 견훤은 고창(안동)을 공략하여 고려의 세력을 경상도에서 완전히 지우기로 마음먹었고

929년 12월, 3천명의 고려군이 주둔해있는 고창을 포위하였다.

분위기상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으나 고려에는 유금필이라는 명장이 있었고, 견훤의 서라벌 만행에 분노한 안동 호족 삼태사가 있었다.

양측은 고창의 병산에서 맞붙었는데 견훤의 예상과는 달리, 고창 토착세력의 고려 지원과 희대의 명장 유금필의 활약에 밀려.

8천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고 참패하였고, 고창 일대의 30개 군현이 고려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창 전투이다.

이 싸움의 여파는 대단해서, 속국으로 만들었던 신라에 대한 영향력 상실은 물론,

나주도 다시 고려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후백제에 속했던 호족들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이 꼴을 본 견훤은 심기일전하여 수군을 이용하여 반격하였는데,

수군력에서는 항상 우위에 있던 왕건의 방심을 이용한 이 전략은 멋들어지게 성공하여

염주, 백주, 정주 등에 정박해있던 고려의 선박 1천여 척을 불 지르고 300필의 군마를 약탈하는 성과를 올렸다.

 

서로 펀치를 한 번씩 주고받은 후

934년, 견훤은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운주(홍성)에서 다시 고려군과 맞붙었으나, 천적 유금필에게 유린당하며 참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2/3의 병력을 잃었고 측근 장수들이 포로가 되었으며 견훤은 도망치기기에 급급하였다 한다.

운주전투이다

이 운주 전투로 인하여 고려가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게 되었고,

공주 일대의 30군현, 동해연안의 110여성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 호족들의 이탈도 심화되어 갔다.

 

운주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늙은 견훤은 후사를 생각하였고,

자수성가한 노인들이 그러하듯이 고집대로 자신의 기준에 맞는 넷째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역사에 흔한 역풍을 만나,

그동안 아버지 눈에는 안 찼어도, 나름의 헌신과 맏아들이라는 명분을 지닌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억류되고 말았다. 금강은 살해되었다.

이 분통터지는 일들은 자부심 강한 늙은 아버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견훤이 탈출하여 아버지처럼 왕건에게 의탁한 것이다.

알다가도 모를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일 것이다. 특히 난세에는...

 

왕건은 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을 환대하였고 맛있게 요리하여 신검을 꺽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 하였다.

후백제가 망한지 겨우 며칠 만에 견훤은 황산 근처의 사찰에서 등창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936년의 일이었다. 향년 7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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