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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제 55 대 경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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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위응

 

신덕왕의 둘째 아들로서 경명왕 시기 상대등을 지내었고,

경명왕 사후 조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형의 뒤를 이었다 하는데,

조카들이 8형제나 되었으므로, 맏이는 제법 나이를 먹었을 것이니,

예전처럼 섭정을 몇 년하고 친정을 하게 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과 야심을 지닌 인물이었던 듯하다.

 

924년 즉위 하자마자, 신궁에 제사를 지내기도 전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은 듯한데,

이듬해에 고울부장군 능문이 고려에 항복하여 영토가 또 줄었다.

이 해에는 왕건과 견훤이 서로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하여 잠시 천하가 조용하였으나,

다음해에 왕건에게 가 있던 견훤의 인질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열받은 견훤이 고려의 인질을 처형하자,

이 번에는 왕건이 열받아 견훤이 점령하고 있던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천하가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경애왕은 고려와 연합하여 후백제를 공격하며 재기를 꿈꾸었으나,

진주일대의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여 맥이 빠져 버렸고,

분노한 견훤의 침략까지 받아 포석정에서 피살되고 말았다.

재위 4년차인 927년의 일이었다.

 

견훤은 욍건과 싸우며 북진하던 중 갑자기 방향을 돌려 서라벌을 공격했다고 하는데

왕건의 동맹노릇을 하는 갖잖은 신라를 먼저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놀라 왕건에게 구원을 청했고 왕건은 친히 구원병을 이끌고 왔으나, 이미 늦어 경애왕이 사망한 후였고,

분노한 왕건은 철군하는 견훤의 뒤를 쫓았으나 팔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비참하게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견훤이 서라벌로 쳐들어왔을 때 경애왕은 비빈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는데,

그 꼴을 본 견훤은 혀를 끌끌 차며 경애왕에게 자살을 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빈들을 모조리 강간했다고 하는데...

고려의 악의적인 왜곡일 것이다.

포석정은 왕실 놀이터라기 보다는, 주변에 나정, 신궁 등 성지가 많고 절도 있는 일종의 피신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애왕의 이전 행적이나 당시 기후 등을 고려할 때, 포석정에서 술잔을 띄우고 논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모종의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비빈을 강간했다는 부분도 이해하기 곤란한데...

환갑이 넘은 견훤이, 자기가 거느린 전라도 미녀들로도 벅찼을 텐데, 위험한 적지에서 다 늙은 적국의 왕비를 강간했을까?

눌러 살 것도 아니고 왕건 때문에 바로 철군해야하는데, 장군들 오입까지 챙겨주며 그 짓을 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다.

 

경애왕...

마지막까지 나라를 살려보기 위해 발버둥을 친, 실질적인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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