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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 무주) : 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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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무조, 아명은 무미랑

목재상으로 거부가 된 무사확의 차녀로 태어나 14살에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는데,

이세민에게 이쁜이로 불릴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한 10 여년 총애를 받으며 그럭저럭 잘 살았으나, 이세민이 사망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었다.

황제가 사망하자 황실의 관습에 따라, 일단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는데,

권력의 맛도 알고, 남자도 알고, 장사꾼 집안 출신의 신앙심 없는, 25살이라는 물오른 나이의 미모의 비구니...

뭔 사단이 안나면 그게 이상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여자인 이쁜이의 미모를 잊지 못한 고종이 후궁으로 불러 651년 다시 환궁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황후 왕씨가 후궁 소숙비와의 암투에 무후를 이용하기 위해 불러들였다는 설도 있다.

어찌 되었 건, 무후는 암투에 일가견이 있었던지 소숙비는 물론 황후 왕씨까지 제거하고 

입궁한지 4년만에 고종의 두번째 황후가 되는 기염을 토한다.

애비의 첩이 마누라가 된 것이다. 형사취수는 들어 봤어도...원....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벌인 것을 보면, 고종이 지 애비 생전부터 이 무씨 서모를 엄청나게 사랑했던 것 같지만...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가문 출신에, 아버지의 후궁이었다는 결정적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여자를 

후궁으로 들이고 황후로 세우는 엄청난 짓을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고종이 사랑만으로 실행에 옮겼을까?


당시 황후 왕씨는 북위 시절부터 제국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무벌, 관롱 집단 출신이었으므로 왕황후를 제거한다는 것은 관롱 집단과의 정면대결을 의미했다.

이 거대 무력 집단과 싸울 힘이 이쁜이에게 있었을 리는 없고, 오로지 고종 자신만의 힘으로 싸워야 했을 터인데,

천하에 미인이란 미인은 다 모아 놓은 황궁의 주인이, 사춘기 소년 처럼 오로지 나의 이쁜이만을 위해 이 어려운 싸움을 했을까?

뭔가 정치적 노림이 있었을 것이다. 장희빈을 왕후로 만든 숙종처럼....

 

관롱 집단은 북위 시절부터 존재하던 무벌들이었다.

수나라의 건국과 멸망, 당의 건국 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집단으로서,

그 대단한 당태종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며, 대쪽 선비 위징도 이들의 눈치는 살폈다 하는데,

태종 말기부터 세력이 더욱 커져, 고종 대에 이르러서는 황제도 어쩌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한다.

개국 공신 집단의 발호는 거의 모든 창업국가의 병폐라 할 수 있으나,

지 멋대로 하게 방치해서는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게 될 뿐만 아니라, 수나라의 꼴이 날 수도 있으므로,

고종으로서는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평소 유약하다고 알려진 고종이, 보기 보다는 정치투쟁에 재능이 있었는지 아버지도 못한 쾌거를 이루었는데...

무후의 황후 임명에 반대하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관롱 집단 출신은 이세적이 하나 살아남았다 한다.

틀림없이 힘겨웠을 이 싸움에서, 강인한 성격과 비상한 두뇌를 가진 무후는 유용하고도 사랑스러운 도구였을 것이다.

황후가 된 무후는 저질 건강의 고종을 돌보며 수문제 시대처럼 황제와 황후의 협치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지만

절대 권력은 아직 고종에게 있었고, 무후는 단지 대리자 내지 협조자에 머물렀다.

 

656년 기존의 태자를 폐하고 무후의 장남을 황태자로 세웠으나 곧 죽어 차남으로 대치하였다.

659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1년의 고구려 원정은 실패하였으나, 재수 끝에 668년, 마침내 고구려를 지도에서 지웠다.

아버지가 못한 일을 또 하나 이루었으니 이때를 고종의 전성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669년에 토번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운명의 가르친링에게 패배하며 위세가 꺽이기 시작하였다.

가르친링...

가히 당의 천적이라 할 만하다.

자결하기 전까지 50여회에 달하는 당과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토번의 명장이었다.

병력의 차, 상대 장수와 관계없이 당과 싸우면 무조건 이겼다.

설인귀 등 고구려 원정의 영웅들을 비롯하여, 당의 날고 기는 장수 모두가 가르친링의 밥이 되었고

10배 이상의 병력 차이도 가르친링의 전공을 높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가르친링의 이러한 활약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670년 신라의 선공으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고 토번의 가르친링에게 서역을 빼앗겼다.

672년 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무후가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에 수렴청정을 선언하였다.

676년에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났고, 678년엔 가르친링에게 대패하였다.

682년에는 돌궐 제2제국이 골돌록가한(일테리시칸)에 의해 부활했으며,

683년 고종이 죽은 후 태자인 3남 중종을 제위에 올렸으나, 위황후를 비롯한 외척 세력이 대두하자, 폐위시키고 4남 예종을 즉위시켰다.

684년 이적의 손자인 이경업(서경업)의 난을 진압하고 이세적을 부관 참시하였다.

689년엔 가르친링에게 대패하였다.

 

690년, 예종을 폐위하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의 시대, 무주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691년에는 묵철가한이 즉위해 쿠차(사주)와 돈황(안서도호부)를 위협했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40만 대군을 파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좋지 못했고, 돌궐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했다.

이때 거란의 반란을 틈타 이주하던 대조영을 추격하였으나 대패하였고... 발해의 건국을 허용해야만 했다.

698년 돌궐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바람에 거란이 재 독립하였고 이로 인해 요동 및 요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열 받아 45만 대군으로 돌궐을 공격했으나 패하였다.

699년에 가르친링에게 40만대군이 거의 전멸하여 토번을 서쪽정부라 칭하며 대등한 관계를 인정했다.

705년 병으로 눕자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았고, 별 수 없이 3남 이현(중종)에게 양위했다.

이리하여 무주의 시대가 끝나고 도로 당나라가 되었다.

   

무후의 외치를 보면, 이전 황제들이 정벌하거나 점령했던 지역을 모조리 상실하는 등, 무능의 극치를 보였다.

나당전쟁에 패하여 옛 백제 지역의 지배권을 날렸고, 발해의 독립을 막지 못해서 만주와 요동도 고구려 정벌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거란의 독립도 막지 못했고, 돌궐도 부활했으며, 토번의 기르칭린에게는 연전연패 그것도 대패로 일관하여 서역의 지배권을 잃는 것은 물론 토번의 대등한 위상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내치 쪽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무후는 태생적 한계가 너무 많은 황제였으므로 깔린 게 반대파였고... 상시적 반란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죽지 않기 위해 비밀경찰 조직을 운영하였고 공포정치를 실시하였으며 친정 출신들을 우대하였다.

이것까지만 했으면 그저 그런 독재자의 삶을 살다가, 어느 놈 칼에든 맞아 죽었겠지만 무후는 달랐다.

적인걸, 장간지 같은 뛰어난 자들을 재상으로 등용하였으며, 사상 처음으로 과거제도의 완성이자 황권 강화책인 전시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때 등용된 인재들은 주로 중소지주계층 출신으로 북문학사라 불렸는데, 무후는 이들을 친위 세력으로 삼아 내치를 다졌고, 나라를 효율적으로 운영하였다.

덕분에 무후의 치세에는 당태종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생산력이 회복되었고, 일반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이 북문학사 집단은 현종시기 개원의 치의 주역이 되었고, 당나라 최대의 전성기를 여는 기반이 되었다.

 

과거제도가 정착되었고, 당나라 도자기가 그 특징을 확립하였으며,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처다부제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말년에 회한에 싸여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황후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한다.

.....대단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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