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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나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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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70년부터 676년까지 진행 된, 삼한통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쟁이다.

통일전쟁에서 비록 신라가 최종 승자가 되긴 하였으나,

삼국 중 가장 약했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던 신라는, 통일 직전까지도 나라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신세였다.

신라는 살기 위해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은 고구려의 배후에 위치한 신라의 지정학적 가치를 고려하여 동맹을 맺었으나, 힘의 차이가 현격하였으므로 당연히 대등한 동맹은 아니었고, 신라가 제후국이 되는 종속적 동맹이었다.

통일전쟁은 당이 고구려를 남쪽에서도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기지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면서 시작되었는데, 주력은 당군이었고 신라는 주로 보급부대의 역할이었다. 

당은 신라를 알뜰히 부려서 고구려까지 멸망시켰으나, 삼국을 통일 시켜 신라에게 헌납하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 옛 영토에 괴뢰국을 세워 자신들의 기미지배체제에 편입시켰다.

기미지배체제는 점령지의 항복한 수장에게 벼슬을 주고 자치를 허용하는 온정적 식민 지배체제인데,
문제는 신라마저 그 체제에 편입시키려 한 데 있었다.

665년 8월, 웅진의 취리산에서 당나라의 주관 하에 부여융과 문무왕 간의 회맹이 이루어졌다.
이때 양자는 "땅을 구획하여 양측의 경계를 확정하고, 백성을 살게 하여 각각 산업을 영위하게 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당으로서는 식민지 관리를 위한 당연한 조치였으나, 신라의 입장에서는 간신히 멸망시켰던 백제의 옛자리에, 

겁나는 당의 무력이 들어 앉아 있게 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이는 648년 당태종과 김춘추 간에 맺은 영토분할약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이기도 했으나,
더욱 열 받는 일은 승자인 문무왕이 패자인 부여 융과 동급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고, 

신라 또한 당의 지배체제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힘의 논리였으며, 신라의 국가 존립 근거가 희미해진 상황이었다.
당연히 신라는 인정할 수 없었고 당과 전쟁을 준비하였다.

670년 3월, 진골도 아닌 설 오유가 당시 신라 국력으로는 대 부대라 할 수 있는 2만의 기. 보병 혼성의 정병 부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선제공격하였다.
뭔 배짱인가 싶지만... 

바로 전 해에 있었던 당과 티벳의 대비천 전투에서, 당이 티벳의 영웅 가르친링에게 개망신을 당하는 등, 당의 사정이 예전만 못하다는 감을 잡고 문무왕이 베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설 오유 부대..무슨 빨치산 부대 이름 같기도 하고.. 하는 짓도 비슷했다.
이 부대가 엄동설한에 산넘고 물건너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행군을 한 끝에,

요동의 오골성을 전격적으로 공격하여 박살 내버리고, 백성으로 물러나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당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나, 신라가 이러한 정예 특수부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은 문무왕의 준비가 얼마나 철저했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문무왕은 일종의 양동부대인 설 오유 부대를 요동으로 진출시킨 후에,
7월부터 백제 땅으로 대규모 진격을 개시하여 80여성을 전격적으로 함락시켰고,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671년 6월에는 석성에서 당나라 군사 5,300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고,
10월에는 당나라 선박 70여척을 박살내고 군사 1백 명을 사로잡는 성과도 올렸다.
전격적인 신라의 공격에, 방심하고 있던 당이 제대로 한방 먹은 셈이나, 

당은 역시 강국이었다.
바로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672년 7월 고간과 이근행이 한시성, 마읍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백수성 근처에서 신라군과 교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신라는 상급 지휘관만 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것이 석문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원술랑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가 아버지 김유신에게 맞아죽을 뻔했고,
문무왕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느나, 

결국 파문당하여 김유신이 죽을 때까지 산속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음..연개소문의 자식 교육과 비교된다.
이 패전으로 야전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안 문무왕은 이후 수성전에 치중하였고,
당에 사죄하는 서신을 보내는 등 화전양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673년 7월 1일, 당과의 싸움이 열세인 상황에서 신라의 정신적 지주인 김유신이 세상을 떠났다.

원술랑에게는 다행이었을지 몰라도, 조야에 불안감이 확산되어 반란이 발생하는 등 문무왕에게 또 한번의 위기가 닥쳐온 셈이었으나 문무왕은 침착하게 위기를 넘겼고, 꾸준히 성들을 증축하고 보강해 수성에 만전을 기했다.

그리하여 다시 당의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는 아홉 차례를 싸워, 모두 승리할 수 있었고, 2천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674년,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을 거둬들여 옛 백제 땅을 수비하게 하는 등 대동강 이남에 대한 권리 행사를 노골화 했고,
이에 당 고종은 격노하여,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했으며, 신라를 공격하였다고 하는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섭정을 하는 시기였고, 당 고종은 병석에서 빌빌대고 있었다.

675년 2월, 유인궤가 칠중성을 깨뜨렸고, 이근행이 다시 신라를 공격하자,
문무왕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며 사죄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주며 군사를 물렸는데,
문무왕은 이 틈에 백제 전토를 수복하고 대동강을 넘어 평양까지 공격하였다 한다.
참으로 눈부신 화전양면 전술이 아닐 수 없다.
9월에는 설인귀가 천성을 공격했으나,
문훈 등이 반격을 가해 당군 1400명의 수급을 베고 전함 40여 척, 군마 1천 필을 탈취했고,
이근행이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이에 맞서 싸워 군마 3만여 필과 수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고 한다.
이게 나당전쟁 최대의 승리라는 매소성 전투인데, 당군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기록이 없다.
문무왕은 이때에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하는데....

참나... 보내는 사람도 어지간하지만 보낸다고 받는 측천무후는 또 뭐란 말인가?
아무튼 신라는 이후로도 아달성, 석현성, 적목성 등지에서 당군과 격전을 벌였고, 성을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676년 11월, 절치부심한 설인귀가 수군을 이끌고 서해로 쳐들어왔으나, 시득에게 기벌포에서 막혔다.
이후 당은 가르친링에게 얻어맞느라 신라에 대한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고...
마침내 7년 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끝이 났다.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은 것은, 그저 죽지 않고 살아보겠다는 약소국의 몸부림이었다.
이 몸부림이 어찌어찌 통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동참하게 되었고,

덕분에 전통의 강적들의 위협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나,

백제와 고구려를 없애버린 자리에 대신 들어선 최강대국 당은 신라를 다시 생존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된 신라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으나,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 중에 야기된 당조정의 혼란 및 때 맞춰 등장한 티벳의 영웅 가르친링은

문무왕에게 도박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이래 저래 정신 사나운 당군을 문무왕은 강인한 의지와 노련한 전술로 괴롭혀, 결국 당의 전쟁수행의지를 꺾게 만들었다.

 

신라에게 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은 쥐뿔도 없었을 것이나

신라마저 삼키려는 당의 야욕은 삼한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7년 간의 나당전쟁은 한반도의 삼한 백성들을 부조의 원수에서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운 동지들로 바뀌어 주었다.

또한 당군이 종전 협정을 맺고 물러간 것이 아니기에,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서로를 의지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결국 같은 민족으로 살아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당 전쟁은 한민족의 출발이 된 전쟁이다.

이 어려운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에서 당을 축출한 문무왕,

한겨레의 실질적 시조라 불리어 마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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