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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제 30 대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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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법민
삼국통일의 완성자.
김춘추의 장자로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소생이다.
영특, 총명하였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왕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으므로 진덕여왕시절 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외교를 배웠고,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태자가 되어서도 영원한 후견인 김유신과 함께 전쟁터를 전전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합작품이자 진지왕 계열과 가야 계열의 통합의 상징이었다.
무열왕 7년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고 부왕이 승하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상중에도 전쟁터를 떠날 수 없었고, 당에 군량을 수송하며 즉위년을 보내었다.
즉위 이듬해에 탐라의 복속을 받았고 당의 책봉을 받았으며, 여전히 쌀 배달을 하였다.
3년에는 부산성을 쌓았고 백제 부흥군의 기세를 꺾었으며 계림주대도독에 임명되었다.
이어 당군 40만과 함께 백제,왜 연합군을 백강어귀에서 궤멸시켰고 주류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거의 평정하였다.
4년차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5년에는 당의 강요로 취리산에서 부여융과 회맹하였고, 백제가 형식적이나마 독립하는 꼴을 보아야했다.
6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두들겼으며 연정토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7년에는 신라의 왕을 일개 대장군에 임명하는 등 당의 무시와 무례가 더욱 심해졌으나, 참으며 쌀 배달을 하였다.
8년에 드디어 고구려를 향해 전군을 동원하였고, 김유신에게 내정을 맡기고 친정하여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이 신라마저 먹으려 하자, 이미 선대부터 예견하고 있던 바이므로 당과 전쟁준비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10년에 요동을 선제공격하며 나당전쟁의 시작을 알렸고, 이어 백제를 향해 진군하여,
11년 웅진도독부를 박살내고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문무왕은 당대 최강의 패권국을 상대로 화전 양면책을 적절히 구사하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13년은 외삼촌이자 매부이면서 신화와 같은 김유신이 죽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심적 타격이 막심한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반란의 기미도 보이고, 당의 공세가 가중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14년에도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당과 싸웠으나, 당은 김인문을 신라왕에 봉하면서 대규모 공격을 기획하는 등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다.
15년에는 당과 무려 18회나 크고 작은 싸움을 하여 모두 이겼는데, 그 유명한 설인귀를 패퇴시키는가 하면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던 20만 당군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16년 마침내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을 완성하였다.
21년 죽어 동해의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일생을 마쳤다.

문무왕은 김유신과 김춘추를 합쳐 놓은 듯한 사람으로서, 외교적 능력이 뛰어났음은 물론 군사 전략에도 밝았다.
문무왕이 없었다면 아마도 한반도는 중국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유조로 평을 대신한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위대한 군주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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