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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 2 대 남해 차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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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웅 혹은 자충은 중의 이두식 표기로서 무당을 의미한다고 한다. 

신관이라는 이야기인데...

고대에 신관은 매우 존경받는 직종으로 초기 부족 시대에는 부족장을 겸하기도 하였으나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에서는 손을 떼고 고유 업무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신라가 후진적인 사회였다고 해도 명색이 국가인데 무당이 왕노릇을 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더우기 박혁거세의 둘째 아들인 박특은 개국공신이었는데, 장남은 신관이었다는 것도 이해 불가이고...

진짜 아들이 맞나 싶다.

 

뭐가 어찌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기록을 보면

남해 차차웅은 죽을 때도 신화스럽게 죽은 전왕의 뒤를 이어

서기 4년,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하자 마자 낙랑의 침입을 받아 금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겪었다.

즉위 3년 째에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의 묘를 세웠고,

즉위 5년에 석탈해를 사위로 받아들인 후, 2년 뒤에 대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즉위 11년에 왜구와 낙랑의 침입이 있었고.

즉위 16년에는 북명에서 예왕의 인장을 발견했다 한다.

즉위 21년째인 24년에 죽어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그외 자연 재해에 대한 기록이 다수이다.

 

남해 차차웅은 박혁거세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박혁거세 치세 말기 두 마리의 용이 출현했다는 기록이나 왕비 알영과 거의 동시에 사망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시체가 막난 기사 등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박혁거세의 치세 말기, 내란에 휩싸여 왕과 왕비가 시해되었고,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백성들이 존경하는직종의 인물이 추대되어 혼란의 수습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불안한 시국에 군사 지도자도 아닌 사람이 정권을 맡은 아슬아슬한 상황인데

낙랑이 쳐들어 왔으니..

신라는 시작하자 마자 망할 뻔 했다.

아무튼 어찌어찌 위기를 넘기고 나니 이번엔 자연 재해가 덮쳤고..

고상한 관 나으리가 헤쳐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별 수없이 문제의 인물 석탈해에게 정권을 맡겼고

그에 의지해 겨우 겨우 왕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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