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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제 28대 보장왕 그리고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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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

대고구려의 간판을 내린 안습의 군주.

연개소문에게 참살된 영류왕의 조카로 무늬만 왕인 오욕의 세월을 살았다.

당나라로부터 노자의 도덕경을 처음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으므로 노자의 무위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평양성 함락 후 당나라로 압송된 보장왕은 실권이 없었으므로 책임 또한 없다 하여 벼슬을 하사받았고

기미지배 정책에 따라  요동도독조선군왕에 임명되어 요동에 머물렀다.

그러나 700여 년을 존속하며 만주의 강자로 군림했던 고구려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재기를 노려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아쉽게 발각되었고

양주에 유배되어 682년에 사망하였다.

대고구려 왕으로서의 기개를 하필 막판에 보여준 것이 아쉽기는 하나

그나마 민족의 자존심을 살려준 고마운 일이었다.

 

 

* 연 개소문

신흥 귀족 세력인 동부 대인 연태조의 아들.

정변을 일으켜서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들 100여명을 시해하고 대막리지에 올라 철권을 휘둘렀다.

그러나 왕이 아닌 한계때문이었는지 지방세력까지는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여,안시성주를 비롯한 많은 군벌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대당 방어의 약화를 초래하여 여당 전쟁에서 요동방어선이 조기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적이었던 안시성주의 활약이 없었다면 연개소문은 역사상 최악의 역신이 되었을 것이다.


운이든 뭐든 당의 침입을 수차례 막아낸 공로는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와중에 국력을 알뜰히 탕진하고 자식 농사까지 망치는 바람에 고구려를 멸망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신라 김춘추의 제의를 거절하고 백제와 더불어 신라를 압박한 것 또한 최대의 외교적 실책이었다.

이 이외에도 여러가지 비판이 있을 수 있겠으나

당대 최강 당나라의 전력을 기울인 침입을 막아 민족의 자부심을 드높였고

고구려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공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며

민족의 영웅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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